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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충돌이나 극심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거나 압도적인 포획자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자기 파괴적 동물입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진행되는 전쟁을 보세요. ‘우리는 같은 종이야’라는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늑대나 토끼가 보았다면 당혹스러울 일이고, 인간을 전염 병균처럼 여기며 멀리 떠나려 할 겁니다. “인간들은 서로 거침없이 착취하려 하고 심지어 서로를 살육하니, 우리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지만 늑대와 토끼마저도 동족의 피를 묻힌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불행하게도 자신들이 도망할 곳마저도 인간에 의해 이미 잠식되어 버렸으니까요.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인류학적 스케일에서의 안목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장자가 대붕(大鵬)이라는 거대한 새를 이야기한 이유입니다. 대붕은 천하를 벗어나 저 까마득한 북쪽에서 출발해 천하를 벗어난 저 멀리 아득한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여기서 대붕은 주인-인간과 노예-인간이 구분되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꿈,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다른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삶에 대한 꿈을 상징합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구만리 상공에서 대붕은 천하로 상징되는 국가, 사회, 그리고 문명을 측은한 마음으로 내려다보았을까요, 아니면 무심한 마음으로 제 갈 길을 갔을까요? 이런 의문이 생기는 이유는 만물의 허점이 연출하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장자로서도 여간 불쾌한 풍경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대붕은 우리 삶에 무심하지 않습니다. 애틋하게 우리를 내려다볼 뿐만 아니라, 간혹 구만리 창공의 상쾌한 바람을 몰고 우리 곁으로 하강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 대붕은 “내 등에 타라! 그러면 너는 네 삶을 너의 것으로 향유할 것”이라고 유혹하는 듯하고, 어떤 때 대붕은 “작다고 체념하는 그대여! 너는 대붕보다 더 크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죽비를 내리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48편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대붕의 등에 탈 수 있는 48번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붕의 등을 타는 건 생각보다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대붕이 우리 곁 가까이 날 때 발생하는 그 섬광과도 같은 바람을 느껴야 하고, 이어서 그 바람을 타고 대붕의 등에 올라타는 방법도 알아야 합니다. 이 책에서 제가 시도하고자 한 건 바로 이겁니다.
대붕이 거침없이 나는 푸른 하늘, 그리고 전쟁과 갈등으로 흙먼지와 동족의 피를 흩날리는 인간 사회! 이 구만리의 차이, 이 아득한 공간에 머물지 않으면, 『장자』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거나 몽환적 관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오해될 수 있습니다. 20년전 『장자』로 박사학위를 마친 뒤 다시 장자의 사유를 숙고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를 지금까지 수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도 구만리의 공간에 제대로 머물겠다는, 혹은 그 공간에서 장자만큼 자유롭겠다는 저의 무의식적 의지입니다. 마침내 이 책으로 과거보다 더 생생하게 대붕의 날갯짓을 포착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그의 많은 이야기가 새롭게 눈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다루었더라도 애매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이제 분명해졌으니까요. 그 사이 두 번에 걸쳐 동·서양 철학사를 정리했던 『철학 VS 철학』과 5권으로 기획되어 두 권이 먼저 출간된 『강신주의 역사철학ㆍ정치철학』이 없었다면, 구만리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대붕을 따라잡기 힘들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간절히 발원해봅니다. 대붕의 등에 타거나 혹은 대붕이 될 48번의 기회 중 한 번은 잡으시기를. 자, 이제 바람이 붑니다. 드디어 대붕의 등에 탈 시간이 되었네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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