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유목하기’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三更)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乾隆四十五年庚子八月七日夜三更, 朝鮮朴趾源過此].” 이름이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연암이 이름을 남긴 곳. 그것도 남은 술을 쏟아 먹을 갈고, 별빛을 등불삼아 이슬에 붓을 적셔 자신의 흔적을 새겨넣은 곳, 고북구,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험준하기로 이름난 동북부의 요충지다. 연암이 ‘무박나흘’의 고된 여정 속에서 통과했던 이곳을 우리는 베이징을 나선 지불과 반나절만에 도착했다. 백 개가 넘는다고 하는 입구 중 우리가 오른 곳은 반룡산(蟠龍山)에 있는 관문, ‘백두대간’을 연상시키는 천연의 요새 위로 장성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마치 용의 비늘인 양 꿈틀거린다. 오, 놀라워라!
하지만 어쩐 일인가. 이 기념비적 축조물에서 제국의 위엄보다는 유목민에 대한 제국의 공포가 느껴지는 건, 대체 얼마나 오랑캐가 무서웠으면 이토록 엄청난 장성을 쌓았단 말인가? 실제로 이 장성이 완성된 뒤에도 오랑캐들은 중원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않았다. 거란, 여진, 몽고 등 초원의 ‘노마드’들은 수시로 이 장성을 넘어 중원을 유린했다. 들뢰즈는 말한다. 요새는 유목민의 절대적인 소용돌이 운동에 상대성을 부여하는 장애물일 뿐이라고.
물론 제국의 역사는 반대로 기록한다. 오랑캐들에겐 문자도, 문명도 없다, 그래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제국을 침범하긴 했으되, 언제나 제국의 문명적 위엄 앞에 굴복했고, 흡수되었으며, 마침내 역사에서 사라져 갔노라고.
그러나 정말 그럴까? 오히려 그들에겐 문자도, 그 ‘잘난 역사’도 불필요했던 게 아닐까? 초원의 목초지를 따라 구름처럼 떠도는 ‘와호장룡’들에게 귀환해야 할 중심이나 위계 같은 건 필요없다. 어떤 기억을 시간의 장벽 속에 가두어버리는 역사 따위는 더더욱. 사건에 대한 기억이란 문자가 아니라 삶 속에서, 신체적 감응을 통해 곧바로 표현되는 것이므로, 그런 점에서 오랑캐의 패배를 힘주어 강조하는 건 그들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제국의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연암이 이곳에서 본 것도 제국의 위용이나 영광이 아니었다. 승리에 대한 회상 따위는 더더욱 아니었다. “슬프다, 여기는 옛날부터 백 번이나 싸운 전쟁터이다[噫! 此古百戰之地也].” 그의 가슴에 사무친 것은 다만 형용할 길 없는 전쟁의 비애, 그것이었다.
고개에 걸린 초승달은 빛이 싸늘하기가 갈아세운 칼날 같고, 짐승 같은 언덕과 귀신 같은 바위들은 창을 세우고 방패를 벌여놓은 듯, 큰 물이 산 틈에서 쏟아져 흐르는 소리는 마치 군사가 싸우는 소리나 말이 뛰고 북을 치는 소리와 같다.
時月上弦矣, 垂嶺欲墜, 其光淬削, 如刀發硎; 少焉月益下嶺, 猶露雙尖, 忽變火赤, 如兩炬出山. 北斗半揷關中, 而蟲聲四起, 長風肅然, 林谷俱鳴. 其獸嶂鬼巘, 如列戟摠干而立, 河瀉兩山間鬪狠, 如鐵駟金鼓也.
5천 년 이래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는 이렇듯 전쟁의 메타포와 음산한 귀곡성으로 그득하다.
이제 가공할 힘과 속도로 제국을 위협했던 오랑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유목은 이제 불가능해졌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제 모든 종류의 국가장치 내부에 잠입해 전혀 다른 전쟁의 배치를 작동시킨다.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기 위한 탈영토화운동으로, 도시의 ‘홈 파인 공간’을 가로지르며 ‘매끄러운 공간’들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탈주선으로, 이 전쟁에선 더 이상 피가 튀고 살점이 흩어지지 않는다. 니체의 말처럼 “좋은 전쟁에선 화약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건 초원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바로 그 자리를 초원으로 만드는 일이다. ‘앉아서 유목하기’, ‘도시에서 유목하기’, 장성을 벗어나 벚꽃이 눈부신 산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나에게 묻는다. “과연 네가 발딛고 서 있는 곳은 초원인가? 아니면 제국의 영토인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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