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랑의 비극을 막는 방법
바닷새 이야기
또한 너만 들어보지 못했는가?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지락」 6
且女獨不聞耶?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於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노나라 임금이 몰랐던 것
『장자』는 법전처럼 정리된 경전과 같은 책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 모음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라는 게 한번 읽고 쉽게 잊히는 흥미 위주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계속 자극하는 철학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들을 모두 장자가 직접 쓴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장자가 세상을 떠나고 최소 300여 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야기들도 그가 남긴 이야기인 양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장자』는 크게 내편, 외편, 그리고 잡편으로 구분됩니다. 보통 내편을 구성하는 일곱 편에 담긴 이야기들이 장자가 쓴 이야기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내편에 장자 본인과 관련된, 그러니까 ‘장자적인’ 이야기가 많을 뿐입니다. 외편과 잡편에도 비록 작지만 장자적인 이야기들이 분명 있습니다. 내편 일곱 편이나 그중 가장 장자적이라 꼽히는 두 번째 「제물론」 편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가급적 뒤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황천 이야기 다음으로 읽어볼 일화는 장자 자신의 속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좋을 듯해서 「지락」 편의 ‘바닷새 이야기’를 골랐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닷새 이야기가 간접 인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너만 들어보지 못했는가?”라는 물음은 바닷새 이야기가 이미 있었던 이야기임을 알게 해줍니다. 누가 만든 이야기였을까요? 장자 본인이 만들어 즐겨 말했던 이야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물어본 것입니다. “너만 들어보지 못했는가?” 이 반문은 “너는 장자의 사유, 혹은 장자의 철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가?”라는 물음과 같지요. 흥미롭게도 바닷새 이야기는 외편의 「지락」 편 말고 「달생」 편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지락」 편과 마찬가지로 간접 인용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러니까 누군가 바닷새 이야기를 중시하고 이를 언급한다면 이는 장자의 사유를 따르고 있음을 자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닷새 이야기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합니다. 노(魯)나라(BC 1055 ~ BC 249) 임금이 왕궁 밖에서 매우 아름답고 근사한 바닷새와 마주칩니다. 바닷새를 사랑하게 된 임금은 바닷새를 궁궐로 데리고 오죠. 그리고 바닷새를 궁궐 안 가장 존귀한 곳, 종묘에 살게 합니다. 그렇게 임금은 종묘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바닷새에게 술을 내주고 가장 고귀한 음악인 구소도 들려줍니다. 소와 돼지와 양을 잡아 대접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해풍이 몰아치는 바닷가 암벽 틈에서 행복했던 바닷새에게 종묘는 가시방석 같았을 겁니다. 작은 물고기나 벌레를 잡아먹고 살았을 바닷새는 소나 돼지 같은 육류가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바람 소리와 나뭇가지 소리를 듣고 살았을 바닷새에게 구소의 음악은 소음이었을 테고요. 결국 바닷새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사흘 만에 죽고 맙니다. 이렇게 바닷새 이야기는 새드 엔딩(Sad Ending)으로 마무리됩니다.
철학사적으로 바닷새 이야기는 공자(孔子, BC 551 ~ BC 479)의 윤리를 향한 정면 비판입니다. 공자 윤리의 핵심은 바로 ‘서(恕)’로 요약됩니다. ‘같다’는 뜻의 ‘여(如)’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으로 구성된 ‘서’는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같다고 여겨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구체적으로 공자는 말합니다.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에 나오는 말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뜻이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할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이 윤리는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에게서도 유사하게 발견됩니다. “당신은 당신 의지의 원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실천이성비판(Kritit der praktischen Vernunft)』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가 남에게 하려는 모든 행동은 남들이 나에게 해도 괜찮을, 그런 행동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공자든 칸트는 아니면 우리의 상식이든 이런 생각이 옳으려면, 내가 원하는 것과 남이 원하는 것이 같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남은 타자가 아니라 또 다른 나에 지나지 않겠죠. 본래 타자란 나와는 다르게 느끼고 욕망하는 존재인데 말입니다. 바닷새, 그것은 노나라 임금에게는 타자였습니다. 그런데 노나라 임금은 공자나 칸트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었죠. 나와 타자를 동일시해, 남들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들, 즉 종묘와 같은 근사한 숙소, 소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맛난 음식, 품위 있는 음악을 바닷새에게 그대로 제공했으니까요. 이런 노나라 임금은 나쁜 사람이었을까요? 그가 설마 바닷새를 죽이려고 그렇게 해주었을까요? 그는 바닷새를 정말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그 마음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마음과 달리, 사랑하는 존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비극이 발생한 겁니다. 비극이 생긴 원인은 간단하죠.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가 자기와 유사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타자라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타자를 절실하게 읽으려면
장자는 타자를,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고민했던 철학자입니다. 한마디로 타자의 철학자였죠. 혹은 사랑의 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바닷새에 대한 노나라 임금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면서 장자는 사랑의 한계와 가능성을 고민하니까요. 어쨌든 장자의 결론은 단순합니다. 노나라 임금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말고,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닷새로 하여금 해풍이 몰아치는 바닷가 암벽 틈에 살게 하고, 작은 물고기나 벌레를 먹게 하고, 바람 소리와 나뭇가지 소리를 듣게 해야 했다는 거죠. 바로 그게 노나라 임금과는 달리 바닷새가 원하는 것들이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공자의 ‘서(恕)’가 전도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남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로 바뀌게 됩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이 폐기되고, 그 대신 ‘인소불욕(人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 새로운 윤리 강령이 되는 것입니다. 타자를 사랑한다면 타자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합니다. 장자의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이면 우리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 남편, 아내, 딸, 아들, 선배, 후배 등등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도 바닷새처럼 타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파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또 엄습합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노나라 임금일 수도 있다는 서늘한 자각이죠.
자신의 사랑과 삶을 간절하게 되돌아보는 순간, 바닷새 이야기에서 또 주목해야 할 부분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바닷새가 사흘 만에 죽었다는 부분입니다. 노나라 임금에게는 사랑이 파국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사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요? 우리는 자기 사랑에 취해 바닷새의 타자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노나라 임금의 사흘을 더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흘 동안 임금은 바닷새를, 그 바닷새의 내면을 읽으려 했을까요? 바닷새 이야기에는 새가 어리둥절해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슬퍼했는데, 노나라 임금은 어째 서 사흘 동안 그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요? 타자는 말이죠, 처음 봐서는 그가 도대체 뭘 원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타자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게 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내가 하는 행동을 타자가 견디기 힘들어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충분한 시간이었는데도 임금은 그것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타자가 진실로 원하는 것을 읽으려 하기보다, 자신의 행동을 타자도 좋아할 것이라는 자신만의 확신에 완전히 취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 노나라 임금은 일종의 스토커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스토킹은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위인데도 상대방이 원한다고 믿는 데서 시작되니까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일상적인 차원에서 사랑은 일차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주려는 감정입니다. 좋아하는 대상이 생기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죠. 상대방이 원하는 걸 내가 해줄 때 상대방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나를 떠나지 않죠. 나로 인해 행복을 느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나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막 시작된 연애 초기에 우리는 상대방이 원하는 걸 포착하려고 그야말로 혈안이 됩니다. 그걸 알아야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어 그 사람 이 내 곁에 있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연애 시절에는 집요하게 상대방을 읽으려 하고, 그만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잘 압니다. 시간이 흘러 오래된 커플이 되거나 혹은 결혼을 하게 되면, 상대방을 읽으려는 노력은 점점 사그라들죠. 읽기를 멈추는 순간, 상대방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사랑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부부는 연인이든 상대방이 원하는 걸 더 이상 찾지 않는 관계가 된다면 그 사랑은 사실상 끝난 겁니다. 상대방이 내 곁에 머물도록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사라진 것이니까요. 그 대신 이제는 웬만하면 상대방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아니 떠나기 힘들다는 오만함이 자란 겁니다.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궁궐로 데려와 종묘에 가둔 정황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바닷새가 나를 떠날 수 없으니, 바닷새를 절실하게 읽으려는 의지도 약해진 거죠. 만약 바닷새가 언제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었다면,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가 무엇을 원하는지 읽으려 했을 겁니다. 바닷새가 싫어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행하는 순간, 바닷새는 나를 떠나 표연히 날아 가버릴 테니까요.
내가 변하는 것이 사랑
노나라 임금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바닷새에게 해주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바닷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처음부터 알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바닷새는 노나라 임금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속내를 표현합니다. 불행히도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를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닷새가 자신을 버리고 날아갈 위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닷새를 읽으려는 절박함이 약해진 거죠. 바닷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임금이 해주지 않자, 임금의 곁에서 몸이 떠나지는 못하지만 생명을 다함으로써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닷새의 비극적인 죽음은 바닷새의 마지막 자유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선녀가 내려오자 나무꾼이 선녀가 입고 왔던 옷을 숨깁니다. 여기서 옷은 자유를 상징하죠. 선녀 옷을 빼앗긴 선녀는 종묘에 갇힌 바닷새와 같습니다. 선녀 옷을 입은 선녀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했는데, 나무꾼은 선녀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 사랑을 얻으려 했던 겁니다. 나무꾼은 불완전한 사랑이자 폭력과 비극이 예견되는 사랑을 택한 셈이죠. 사랑이 힘든 것은, 양쪽 다가 주인이고 양쪽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자유와 자유가 만나는 팽팽한 긴장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건 상대방이 가장 자연스럽게 어떤 강요도 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라는 이야기도 성립되는 셈이죠.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 ~ 1980)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강조한 것도 바로 이겁니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는 『에티카(Ethica)』에서 타자를 만나면 우리에게 두 가지 감정이 든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기쁨, 하나는 슬픔. 기쁨이란 타자로 인해 내 삶이 상쾌해지는 느낌,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코나투스(conatus)’, 즉 삶의 자유가 증진되는 느낌을 말하죠. 반대로 슬픔은 사는 것이 고욕으로 느껴질 정도로 삶이 버거운 느낌, 코나투스가 위축되는 느낌입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단순합니다. 기쁨은 지키고 슬픔은 제거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따르기는 생각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사회생활을 생각해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와 동료가 있어도 우리는 회사에 출근합니다. 슬픔을 주는 타자와 함께하니, 우리 삶은 점점 무거워지죠. 그래서 우리는 슬픔이든 기쁨이든 감정 자체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무감각의 전략인 셈입니다. 그래서 사실 타자를 만나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타자를 만나도 사실 ‘만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만나되 만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만난 사람은 거의 없는 셈이죠.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택시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식당에서 물리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의 감정도 슬픔의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심지어 귀가해 남편을, 아내를, 딸을, 아들을 봐도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아내를, 남편을, 딸을, 아들을 만난 것 같지만 만나지 않은 겁니다. 내 감정에 기쁨이나 슬픔이 일어야 내가 만난 타자를 타자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왠지 경쾌해지는 날, 그럴 때 그 바람이 기억에 남듯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 기억에 남아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게 기쁨을 주었거나 슬픔을 준 경우죠. 그 타자는 사람일 수도 있고, 꽃이나 풍경이나 음식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고 구름일 수도 있습니다.
노나라 임금도 바닷새를 ‘만난’ 겁니다. 바닷새가 기쁨과 함께 그에게 날아든 거죠, 지금까지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들을 포함해 수많은 새들을 만났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으니 무심하게 그것들을 스쳐 지나갔다고 할 수밖에요. 그런데 이번에 그는 바닷새를 제대로 만났습니다. 그 바닷새가 날 아들자 기쁨도 함께 날아왔으니까요. 그 기쁨을 포기할 수 없어서, 기쁨을 주는 존재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서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를 데리고 온 겁니다. 문제는 바닷새에게 노나라 임금과의 만남은 슬픔이었다는 것이죠. 그 슬픔은 종묘에 갇히면서 더 심화됩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 그리고 궁중음악도 바닷새의 코나투스를 더 감소시킵니다. 불행히도 임금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자명한 진리,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상대방의 코나투스를 증진시켜주지 못하면 상대방은 나를 떠나가거나 죽어갈 겁니다. 그렇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를 보기 싫어하는 것까지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가 사라지는 것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각오가 없으면 사랑은 비극으로 귀결될 테니까요. 그럴 각오까지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버리는 것쯤 못 할까요? 나 자신이 송두리째 죽고, 내가 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것을 유지하고 내가 강하게 유지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 아닙니다. 바닷새가 사흘 만에 죽자 노나라 임금은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이 그리 아껴주었는데 왜 죽었을까를 생각하며 슬피 울었겠죠. 여기에 기괴함이 있습니다. 자신이 죽게 만들고서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라고 탄식할 테니까요.
인용
목차 / 1. 철학을 위한 찬가 / 3. 소유하라 당신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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