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3. 인간은 열려 있는 존재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충서는 도(道)로부터 멀지 않다. 자기에게 베풀어 보아 원하지 않으면 역시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 盡己之心爲忠, 推己及人爲恕.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을 서(恕)라 한다. 違, 去也, 如「春秋傳」齊師‘違穀七里’之違. 言自此至彼, 相去不遠, 非背而去之之謂也. 道, 卽其不遠人者是也. 위(違)는 거리이니, 「춘추전」에서 제나라 군대가 ‘穀으로부터 7리 떨어져 있다’라고 할 때의 위(違)다. 이것으로부터 저것까지의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뜻이지, 등지고서 떠났다는 말은 아니다. 도(道)가 곧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게 이것이다.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忠恕之事也. 以己之心度人之心, 未嘗不同, 則道之不遠於人者 可見.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은 충서(忠恕)의 일이다. 자기의 마음으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일찍이 같지 아니함이 없으면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故己之所不欲, 則勿以施於人, 亦不遠人以爲道之事.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으니, 또한 사람으로서 도를 행하는 일이 멀지 않은 것이다. 張子所謂“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 是也. 장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한다면 인(仁)을 다한다”라는 게 이것이다. |
‘충서위도불원(忠恕違道不遠)’는 공자의 핵심적 사상으로서 ‘공자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면 충서일 뿐이다’라고 했었죠. 충(忠)이라는 것은 중(中)에 심(心), 즉 자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서(恕)는 타인의 마음[心]과 내 마음[心]이 같아지는 것[如]으로 그래야 용서가 가능해져요. 충(忠)을 로열티(Loyalty)로 해석을 하는데, 그것은 내 마음 가장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옛날에 신하와 임금에 대한 마음으로 오해해서 그런 것이지만, 사실 그 관계도 원래의 충(忠)의 의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로얄티도 내면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지 형식적이거나 지위 때문은 아니니까요.
동양윤리는 매우 내면적인 것이라 형식에서 출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베버(M. Weber)가 ‘동양사상은 내면성이 없다’고 한 주장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동양사상은 내면성이 아주 깊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과학 문명을 만들지 못한 것만이 한이지, 내면적 덕성으로 들어가면 서양이 당해낼 수가 없어요.
주자 주를 보면, ‘위(違)는 거리라는 뜻이니 곡(穀)나라로부터 7리(里)의 거리다. 이 말은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름에 거리가 멀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違 去也 違穀七里之違 言自此至彼].’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말은 “위(違)는 위배하다는 뜻이 아니고 ‘∼로부터‘라는 단순한 전치사이니, 과하게 해석하지 말라.”는 문법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違)는 ‘프롬(from)’으로 해석하라!” 주자 주는 이렇게 치밀합니다.
“충서는 도(道)로부터 멀지 아니 하니, 그것을 자기에게 베풀어 봐서, 원치 아니하면, 남에게도 역시 베풀지 말아라[施諸己 不願 亦勿施於人].” 이 구절은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의 다음 구절과 같은 맥락입니다. “其恕乎 其所不欲 勿施於人”
문법적인 것 또 하나 보죠. 자기라는 말을 쓸 때는 ‘아(我)’를 쓰지 않고 ‘기(己)’를 씁니다. 또 ‘인(人)’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자기를 제외한 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영어로 말하면 ‘맨(man)’이 아니라 ‘아더(other)’에 해당). 갑골문에서 ‘인(人)’이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옛 사람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척추가 아직 덜 굽은 고대 원시인의 걸어가는 옆모습을 나타낸 것으로서, 사람을 옆에서 본다는 것은 자기를 빼 놓은 타인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이라는 보편적 용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거든요. 다시 해석을 해보죠. “자기에게 베풀어 보아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라!”
여기에 동양인의 훼밀리즘으로서의 보편주의가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보편적 덕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또 자기에서 끝나버리는 자아개념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의 ‘나’란 말이죠. 그런데 이게 왜 자꾸 오해되느냐 하면, 내가 『삼국통일과 한국통일』에서 강조하고, 또 함재봉 교수가 한 이야기지만, 근대 서구 인간관의 가장 큰 맹점은 데카르트로부터 절대적 자아를 형성했다는 데에 있는데, 그것은 개인을 이야기할 때 타인과의 교섭이 완벽하게 끊어진 절대적 자아가 확보될 때에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건 미친놈들의 이야기예요! 그런 것은 동양사상에는 없습니다. 라이프니쯔가 모나드이론(monadology), 단자론을 펴면서 개인은 ‘윈도우레스(windowless)’라고 표현했죠.
그러나 동양의 자아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가지고는 있으면서도 ‘기(己)’ 이기 때문에 타(他)와 항상 소통하는 자아라는 게 강조됩니다. 창문이 없는 게(windowless) 아니라 창문이 너무도 많아! 눈, 코, 귀, 입, 땀구멍 등등, 이게 모두 창문들이잖아요? 가장 명백한 창문은 몸 구멍들이고, 눈 떠서 보고 있다는 것, 눈이 있다는 것, 이것 자체가 교섭하는 존재임을 그냐∼ㅇ 말해 주고 있는데, 어떻게 절대적 자아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관념화해서 무지몽매한 자아개념을 만들었던 것이 서양의 근대 리버럴리즘의 크나큰 오류입니다. 우리는 양면을 봐야죠. 인간 존재는 독립된 존재일 수 없고, 항상 관련된 전체로서의 개체인 것입니다.
인용
'고전 > 대학&학기&중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올선생 중용강의, 14장 - 1. 현재의 위(位)에서 (0) | 2021.09.17 |
---|---|
도올선생 중용강의, 13장 - 4. 도덕의 일용성 (0) | 2021.09.17 |
도올선생 중용강의, 13장 - 2. 동양의 교육론 (0) | 2021.09.17 |
도올선생 중용강의, 13장 - 1. 도는 가까이 있다 (0) | 2021.09.17 |
도올선생 중용강의, 12장 - 6. 생명의 약동 (0) | 2021.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