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유하라, 당신의 삶을
빈 배 이야기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가고 있는데 빈 배가 떠내려와 부딪힌다면, 아무리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 해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 배에 누군가 타고 있다면, 그 타고 있는 이에게 저리 비키라고 소리칠 것이다. 처음에 소리를 질렀는데 듣지 못하고, 두 번째 소리를 질러도 듣지 못한다면, 세 번째 소리를 지를 때는 틀림없이 험악한 소리가 뒤따르게 될 것이다. 전에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화를 내는 것은, 전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산목」 2
方舟而濟於河, 有虛船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 有一人在其上, 則呼張歙之. 一呼而不聞, 再呼而不聞, 於是三呼邪, 則必以惡聲隨之. 向也不怒而今也怒, 向也虛而今也實.
人能虛己以游世, 其孰能害之!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
『장자』의 첫 번째 편 제목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소요유(逍遙遊)’죠. ‘소요(逍遙)’라는 말은 ‘한가롭고 여유로운’ 혹은 ‘목적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소요유’는 ‘한가로운 여행’이나 ‘목적 없는 여행’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제목은 장자가 붙인 것은 아닙니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진(秦)나라(BC 221 ~ BC 207)를 거쳐 한(漢)나라(BC 202 ~ AD 220)에 이르러 『장자』를 편집했던 누군가가 붙인 겁니다. 최초의 편집자가장자 사유의 지향점을 소요유라고 이해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대체 그는 장자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소요유」 편에는 ‘목적 없는 여행’이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특별히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목」 편에 등장 하는 ‘빈 배 이야기’에 주목하게 됩니다. 소요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에 이만한 이야기도 없으니까요. 빈 배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빈 배가 떠내려와 그의 배와 쿵 하고 부딪힙니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빈 배였으니까요. 그런데 누군가 배에 타고 있었다면 그는 격노했을 겁니다. “야! 배를 어떻게 그 따위로 몰아!” 상대방이 잘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괜찮겠지만, 상대방이 적반하장식으로 대들기라도 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겁니다. 심하면 칼부림도 일어날 수 있죠. 지금도 도로에서 흔히 벌어지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가볍게는 말다툼, 심하면 살인으로까지 비화할 수 있는 상황을 원천봉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부딪힌 배가 비어 있으면 됩니다. 빈 배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듯 “빈 배가 떠내려와 부딪힌다면, 아무리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 해도 화를 내지는 않을” 테니까요. 여기서 교훈을 쉽게 끌어낼 수 있습니다. 빈 배처럼 살아야 잘못과 실수를 저질러도 우리는 어떤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빈 배 이야기도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라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되물어야 합니다. 빈 배처럼 살려면, 다시 말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의문을 갖는 순간 우리는 머뭇거리게 됩니다.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닌다는 게 뭔지 막연하기만 하니까요. 빈 배 이야기의 의미를 제대로 맛보려면, 우리는 자신을 비운 상태가 아니라 자신을 채운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결국 핵심은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는[方舟而濟於河]” 사람을 숙고하는 데 있죠. 이 사람은 ‘사람이 타고 있는 배’ 혹은 ‘자신을 채우고 있는 사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빈 배 이야기가 제안하는 바람직한 삶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배를 붙여 황하를 건너는’ 사람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니는 사람일 테니까요.
먼저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추측해보죠. 이 사람은 왕이나 고관대작, 혹은 부자일 거라 추측됩니다. “배를 붙여서”라는 표현이 나오죠. ‘방주(方舟)’라는 말입니다. 파도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배들을 서로 옆에 붙이는 것을 말합니다. 파도에 배를 덜 흔들리게 해서 뱃멀미를 피하려는 겁니다. 한마디로 “배를 붙이면” 배는 육지와 비슷해집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군주 등은 바다가 아니더라도 하천을 건널 때 큰 배를 타거나 아니면 작은 배들을 붙여서 타고 건넜죠. “배를 붙여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은 육지의 삶을 긍정하고 황하의 삶을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는 자신의 육지에서의 지위를 흔드는 황하의 파도를 혐오하죠. 그러니 반대편 육지에 닿기 위해 황하를 가급적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요동치는 파도와 극심한 뱃멀미는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법입니다. 작은 배를 탔다가는 시중드는 신하나 하인들과 함께 뱃멀미를 하고 먹은 걸 게울 것이 자명합니다. 신하나 하인과 함께 먹은 것을 게운다! 황하는 모든 신분 질서를 뒤흔들고 군주나 부자라는 자의식을 흔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를 붙여서 황하 위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작은 배들을 붙여 만든 일종의 거대한 배는 그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누군가 이 거대한 배를 건드리거나 배의 진행을 막는 것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소유욕은 자의식과 함께한다
자, 이제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 즉 ‘자신을 비우지 못해 세상에 노닐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을 철학적으로 심화해보도록 하죠. 첫 번째는 소유욕과 자의식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배를 얻어 타고 황하를 건넌다고 해볼까요. 이때 다른 배가 잘못해서 이 배에 부딪히면, 배 주인과 배를 얻어 탄 사람 중 누가 더 화를 낼까요? 아마도 ‘내 배야’라는 의식을 가진 배 주인일 겁니다. 층간 소음이 발생한 경우도 생각해보세요. 같은 집이어도 월세로 사는 사람과 자기 집인 사람 중 누가 층간 소음에 민감할까요? 비슷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면 집 소유자가 더 민감할 가능성이 클 겁니다. 산길에 있는 바위와 내가 집 앞에 설치한 벤치가 있다고 해보세요. 그 바위나 벤치는 두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 내가 먼저 앉아 있는 곳에 다른 사람이 앉으려 할 경우, 바위와 벤치 중 어느 곳에서 더 불편하고 심지어 불쾌한 감정이 들까요? 벤치 쪽일 겁니다. 바위는 내 것이 아니지만 벤치는 내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죠. 이는 모두 내가 가진 것이 나를 설명한다는, 달리 말해, 나는 내가 가진 것이고 내가 가진 것이 바로 나라는 인간의 해묵은 편견과 관련됩니다.
재산, 지위, 권력, 명예, 학위, 소위 스펙이라고 말하는 것 등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희소하고 근사한 것을 가질수록, 혹은 평범한 것이라도 많이 가질수록,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되고 부유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죠. 권력을 가지면 위대한 사람이 되고, 돈을 많이 가지면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당연히 위대한 사람인 나를 유지하고 싶다면 나는 권력을 쥐고 있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부유한 사람인 나를 유지하고 싶다면 돈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하죠.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 침범할 때 우리가 격렬히 분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누군가 내가 가진 것을 훼손하면 그는 나를 훼손하는 것이고, 누군가 내가 가진 것에 침을 뱉으면 그가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소유욕은 자의식과 함께합니다. 식당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포크를 들어내 파스타를 덜어갈 때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내가 가진 돈으로 산 파스타야” “이 파스타는 내 거야” 이런 생각이 강할수록 나의 분노는 클 겁니다. 그러나 공짜로 얻은 파스타라면 화가 덜 나겠죠. 혹은 내 사람이라고 여기는 아내나 남편, 아이 혹은 친구나 애인이 내 파스타를 가져갔다면 모멸감을 느끼거나 화가 나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 공식처럼 외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 것이라는 의식은 나라는 의식과 함께한다”고 말이죠. 이제야 우리는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그 군주가 왜 자신의 배에 부딪힌 다른 배에 분노하는지 알게 됩니다. 배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거대한 배는 바로 자신의 소유물이자, 나아가 군주로서 자기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빈 배가 와서 부딪힌 경우 화를 삭이거나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소유물을 훼손하는, 혹은 빼앗을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야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어야 한다”는 장자의 가르침 중 “자신을 비운다”는 말의 의미가 우리 눈에 드러납니다. ‘실(實)’이 가득 채운다는 의미라면 ‘허(虛)’는 텅 비운다는 뜻입니다. 이미 ‘비운다’는 말에는 어떤 소유 의식의 부정이 전제되어 있죠. 자신을 비운다고 해서 멍하니 의식을 버린다거나 무언가 신비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층간 소음이 들리면 윗집 아이들이 아파트에서도 건강하게 자란다고 생각하고, 내가 앉아 있는 벤치에 누군가 앉으려 하면 그가 편히 앉도록 엉덩이를 옮겨주고, 누군가 파스타를 가져가 먹으면 그가 얼마나 배고팠을지 걱정하는 것이니까요. 결국 “자신을 비우자” 놀랍게도 그 자리에 타자가 들어섭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자연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비운 사람은 극도로 타자에 민감한 상태에 있게 되니까요.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니는 사람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람의 목적지가 황하가 아니라 건너편 육지라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황하는 없으면 좋았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황하에서의 시간은, 황하의 물결을 타는 시간은 없애도 되는 시간, 빨리 지나가야 하는 시간으로 보일 겁니다. ‘위(爲)’라는 한자를 아시죠. 사람들은 누군가와 술잔을 부딪치며 말하곤 합니다. “성적 향상을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내 집 마련을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취업을 위하여!” 등등.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아니라 앞으로 도달해야 하는 어떤 상태를 생각하는 겁니다. 철학에서는 이런 것을 목적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목적에 대한 생각이 강하면 지금 이 순간은 빨리 지나가야 할 것이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미래에 달성할 목적을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수단으로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이런 문맥에서 바로 ‘합목적성(合目的性, Zweckmäßigkeit, purposiveness)’이라는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이 개념은 목적(目的, Zweck, purpose)에 부합한다는, 혹은 부합해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장자』를 포함해 『도덕경(道德經)』 『논어(論語)』 등 중국 고전에는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글자 그대로 무언가 위하는 것이 있는 행위가 바로 ‘유위’라면, 위하는 것이 없는 행위가 ‘무위’죠.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합목적성에 지배되는 행동’이 바로 ‘유위’이고, 대조적으로 ‘합목적성에 지배되지 않는 행동’이 바로 ‘무위’인 것입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저자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5)라면 유위를 노동이라고, 무위를 놀이라고 했을 겁니다.
놀이가 주로 어린아이들의 행동에서 발견된다면, 노동은 어른들에게서 쉽게 확인되죠. 대부분 어른들에게는 수단과 목적이 늘 나뉩니다. 커피 물을 끓이기 위해 가스 불을 켠다면, 가스 불을 켜는 것이 수단이 되고 커피 물을 끓이는 것이 목적이 되죠. 커피물을 왜 끓이느냐 하면 이게 다시 수단이 됩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죠. 커피는 왜 마시나요? 이게 또 수단이 됩니다. 잠을 깨기 위해서, 이렇게 수단과 목적이 계속 분리됩니다. 중요한 것은, 합목적인 행동은 항상 행복을 뒤로 미룬다는 사실입니다. 가스 불을 켤 때는 행복하지 않고 물이 끓어야 행복하고, 물이 끓을 때는 행복하지 않고 커피를 마셔야 행복하고, 커피를 마실 때는 행복하지 않고 잠에서 깰 때가 행복하니까요. 반면 놀이처럼 합목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가스 불을 켤 때도 즐겁고, 물이 끓을 때도 즐겁고, 커피를 마실 때도 즐겁고, 잠이 깰 때도 즐겁죠. 정확히 말해, 즐겁지 않으면 가스 불도 안 켜고, 물도 끓이지 않고, 커피도 마시지 않고, 잠에서 깨지도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서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불장난은 그냥 불장난이고, 곤충 껍질을 모으는 것도 그냥 모으는 것이니 목적이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죠.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행복한 아이들을 질투하는 걸까요. 어른들은 지혜로운 척하면서 아이들을 훈계합니다. “그걸 하면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매 순간 행복을 뒤로 미루며 행복의 꽁무니만 좇고 있는 사람들, 불행이 생활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훈계를 하는 걸까요.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결국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은 유위나 노동의 화신이었던 겁니다. 작은 배가 충돌했을 때 그가 화를 내기 쉬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반대편 땅에 닿으려는 목적을 빨리 달성하는 걸 방해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물을 끓여야 하는데, 가스 불이 잘 켜지지 않아 짜증을 내듯 말입니다.
이제 빈 배 이야기의 의미, 혹은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뿐만 아니라, 주어진 순간을 부정하는 목적의식을 비운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빈 배는 바로 이를 상징합니다. 빈 배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도 없고 황하를 건너겠다는 목적의식도 없으니까요. 빈 배는 그저 황하의 물결과 즐거운 놀이를 할 뿐이죠. 이 점에서 세상에 노닌다로 번역된 유세(遊世)라는 말이 그 은은한 빛을 드러냅니다. ‘유(遊)’라는 동사는 ‘논다’ 혹은 ‘여행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여행은 출발과 귀가의 시간이 정해진, 일정이 미리 잡힌 관광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여행은 즐거우면 지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만두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장자』 편집자는 장자가 제안한 여행에 ‘소요(逍遙)’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입니다. 진짜로 한가로운 여행, 목적 없는 여행, 그래서 즐거운 곳이 있으면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는 놀이와 같은 여행이 바로 소요유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노니는 세상은, 노닐고 있다면, 절대적인 긍정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순간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세계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니까요. 세상에 노니는 사람은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가고 싶으면 떠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자유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 모든 사람들이 이 빈 배처럼 되는 사회가 장자가 꿈꿨던 사회일 겁니다. 빈 배와 빈 배가 떠다니는 세계! 육지에 빨리 이르려는 생각이 없기에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은 배들입니다. 물결을 타고 여유롭게 움직일 뿐이니 충돌할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간혹 부딪혀도 쿵 소리가 아니라 통 소리가 날 겁니다. 그러면 까르르 웃음소리가 이어질 겁니다. 재미난 해프닝이 벌어졌으니까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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