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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7. 허영 애달파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미인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7. 허영 애달파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미인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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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허영, 애달파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미인 이야기

 

 

양주가 송나라로 갈 때 어느 객사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객사 주인에게는 부인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아름답고 한 명은 못생겼다. 그런데 못생긴 부인은 귀한 대접을 받고, 아름다운 부인은 홀대를 받았다.

陽子之宋, 宿於逆旅. 逆旅人有妾二人, 其一人美, 其一人惡. 惡者貴而美者賤.

 

양주가 그 이유를 묻자 객사의 어린아이가 말했다.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아름다운 줄 모르겠습니다. 못생긴 여자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못생긴 줄 모르겠습니다.”

陽子問其故, 逆旅小子對曰: “其美者自美, 吾不知其美也; 其惡者自惡, 吾不知其惡也.”

 

양주는 말했다. “제자들은 명심하라!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자신이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어디에 간들 아낌을 받지 않겠는가!” 산목9

陽子曰: “弟子記之: 行賢而去自賢之行, 安往而不愛哉!”

 

 

모든 인간은 허영의 존재

 

현대 서양 지성인들은 사변적 생각에 몰두하는 사유 경향을 데카르트(Cartesian)’이라고 하고, 반면 현실을 냉혹할 정도로 응시하려는 사유 경향을 파스칼적(Pascalian)’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파스칼(Blaise Pascal, 1623 ~ 1662)은 서양철학자들 중 최고 수준의 현실 감각을 자랑하는 지성이죠. 이런 그의 눈에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기본적으로 그에게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기보다 만물의 허접이었습니다. 인간 삶에 대한 비정한 진단서라고 할 수 있는 주저 팡세(Pensée)에서 파스칼은 말합니다. “허영(vanité)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라서 병사도, 아랫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자신의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인간은 이성의 존재라기보다는 허영의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파스칼의 말은 알 듯 모를 듯합니다. 허영(虛榮)이라고 번역되는 불어 바니테(vanité)’ 혹은 영어로는 배너티(vanity)’라는 개념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죠. 다행히도 파스칼은 허영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모든 인간은 타인의 찬양을 원한다는 이야기로 그의 설명은 시작됩니다. 그의 말대로 병사, 아랫것들. 인부마저 남들의 찬양을 욕망할 정도이니 장군, 윗사람, 고용주들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사실 장군, 윗사람, 고용주가 되거나 혹은 이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도 남들로부터 받는, 혹은 받을 찬양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기보다 남의 시선이나 평판을 의식해서 행동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자유와 자신의 의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모습과 상상한 모습 사이의 괴리도 서글픈 일이지만, 남의 시선과 평판에 따라 일희일비를 반복하니 인간의 삶은 경망스럽기까지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바니테의 의미이고, 이 말이 허영이라고 번역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이끄는 찬양, 영광’ ‘헛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가장 지혜롭다는 철학자들도 허영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 혹은 신에 대해 논쟁할 때조차도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진리 탐구가 아니라 자신의 찬양자를 갖는 데 있으니까요. 똑똑하다는 혹은 심오하다는 찬양을 듣고 싶었다는 이야기죠. 심지어 철학책을 읽은 독자들마저 어려운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남들의 찬양을 들으려 한 것입니다. 파스칼의 냉정함은 자신마저도 허영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토로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허영을 폭로한 자신의 글도 타인의 찬양을 받기 위한 허영의 표현일 수 있다는 이야기죠. 물론 파스칼의 통찰을 읽고 인간은 허영의 존재라고 떠드는 독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인간은 허영의 존재라고 떠드는 사람조차도 허영의 존재일 수 있다는 것, 파스칼의 철저함이자 무서움이 드러나는 대목이죠.

 

파스칼이 분명히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허영의 논리를 숙고하다 보면 우리는 비교라는 중요한 개념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 허영의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비교 우위에 서려는 존재라는 말과 같으니까요. 장군, 윗사람, 고용주 등은 아무나 될 수 없고 소수의 사람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런 지위를 갖는 사람은 선망과 찬양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특정 장군을, 특정 윗사람을, 그리고 특정 고용주를 쉽게 찬양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를 찬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비교 우위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신이 비교 열등에 있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허영의 존재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열등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자신도 비교 우위에 서서 남들로부터 찬양을 받고 싶기 때문이죠. 결국 자신이 비교 우위에 서려는 사람은 남들이 열등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병사, 아랫것들, 인부들은 겉으로는 자신의 장군, 윗사람, 고용주를 찬양하지만, 뒤돌아서서 혼자 있거나 아니면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그들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는 겁니다. 물론 장군, 윗사람, 고용주 등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죠.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찬양받기 위해 헛된 노력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찬양하게 되었다면, 열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차원에서 비교 우위에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비교의 대상만 바꾸면 됩니다. “나는 여가 시간에 철학책을 읽지” “여기서 내가 가장 아름다워!” “내가 패션 감각이 더 뛰어나!” 등등, 인간은 비교 우위에 서려는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헤겔, 나아가 현대 독일 철학자 호네트(Axel Honneth, 1949 ~)가 강조했던 인정 투쟁(Kampf um Anerkennung)’은 모두 인간은 허영의 존재라는 파스칼의 통찰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는 것이 말이죠.

 

 

 

 

 

 거대한 허영의 감옥

 

찬양받는 자나 찬양하는 자 모두가 허영에 물들어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거대한 허영의 감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의문 한 가지가 뒤따릅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파스칼은 신에게 헌신하면 허영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다소 황당한 답을 제공합니다. 그는 허영이란 기독교에서 말한 원죄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파스칼의 팡세후반부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허영의 세계를 구원이라는 종교적 논리에 따르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산목편의 이야기 하나가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미인 이야기입니다. 미인 이야기는 겉보기에 매우 단순합니다. 양주라는 철학자가 제자들과 함께 송()나라(BC 11세기 ~ BC 286)로 갈 때 한 객사에 머물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객사 주인은 부인이 두 명이었습니다. 양주 일행이 보기에 한 명은 외모가 아름다웠고, 다른 부인은 못생겼습니다. 그런데 객사에 일하는 직원들은 아름다운 부인은 홀대하고 못생긴 부인은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상히 일이죠. 아름다운 부인을 귀하게 여기고 못생긴 부인을 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궁금해진 양주는 객사의 머슴아이에게 그 연유를 물어봅니다.

 

아이의 대답으로 이야기는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아름다운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아름다운 줄 모르겠습니다. 못생긴 여자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못생긴 줄 모르겠습니다[其美者自美, 吾不知其美也; 其惡者自惡, 吾不知其惡也].” 이 말에 양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제자들을 돌아보더니 말합니다. “너희가 능력을 발휘하되 나는 능력자다라는 마음을 버리라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름다운 부인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고, 버린다면 어디에 간들 아낌을 받지 않겠느냐고 말이죠. 미인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미인은 미인입니다. 그렇지만 미인이 미인으로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을 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능력 있는 사람도 겸손해야 하죠.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가진 능력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가 옳다면, 결국 미인 이야기가 문제 삼은 것은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마음, 즉 자미지심(自美之心)’이나 스스로 능력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자현지심(自賢之心)’이라는 독해가 가능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인 이야기의 주인공을 미인에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객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이 눈에 들어와야 미인 이야기의 진정한 매력이 드러나니까요. 분명 미인은 허영의 가장 분명한 상징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못생긴 부인, 즉 추녀도 그리고 객사의 머슴아이로 대표되는 나머지 객사 직원들도 허영의 존재입니다. 문제는, 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허영은 은밀하고 복잡하기에 눈에 바로 띄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두 부인을 제외한 객사 식구들의 허영을 생각해볼까요. 머슴아이의 두 부인에 대한 평가가 그 실마리가 됩니다. 외모에서 미녀는 비교 우위에 있고 심지어 그것을 객사 식구들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는 객사 식구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외모에서 열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 겁니다. 그래서 비교 우위에 대한 욕망을 가진 객사 식구들은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며 미인에게 저항하게 되죠. 반면 추녀는 외모에서 자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당연히 객사 식구들은 최소한 외모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추녀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추녀는 객사 식구들의 허영을 제대로 충족시켜준 셈이죠. 이제 가장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추녀의 허영을 들여다볼까요. 미녀 때문에 객사 식구들은 외모라는 차원에 갇히고 맙니다. ‘외모 때문에 부인이 된 주제에. 너는 외모가 망가지면 버림 받을 거야.’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순간, 객사 식구들은 추녀가 외모가 아닌 무언가 힘이 있어 부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라이벌이 객사 식구들과 외모로 인정 투쟁에 들어가자, 추녀는 외모에서의 비교 우위를 포기하면서 객사 식구들로부터 우리는 그녀가 못생긴 줄 모르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끌어낸 거죠. 자신의 못생김이 찬양은 아닐지라도 상대적으로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게 했으니, 추녀는 외모에 대한 자신의 허영을 나름 충족시킨 셈입니다. “얼굴이 고와야 미인인가, 마음이 고와야 미인이지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니죠.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사실 미인 이야기는 객사 이야기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객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허영의 세계, 혹은 허영이 지배하는 세계를 상징하니까요. 미녀뿐만 아니라 나머지 객사 식구들, 심지어 추녀까지도 모두 자신의 허영을 충족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장자는 객사 전체를 인정 투쟁의 장이자 허영의 감옥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철학자이기에 앞서 장자가 일급 소설가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의 기본 모티브가 미인과 관련되었기에 기억하기 쉽게 미인 이야기라고 부르지만,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객사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어쨌든 이제야 우리는 미인 이야기가 표면적으로 왜 겸손을 강조하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비교 우위에 서려는 욕망을 가진 인간, 즉 허영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고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인간은 허영의 존재가 되어 타인들에 대해 비교 우위에 서려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비교 우위에 서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비교 개념과는 무관한 삶에 들어가려는 장자의 분투하는 모습이 분명해질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루소라는 철학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 ~ 1778)는 자신의 진정한 주저 인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에서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우리 인간을 허영의 존재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죠.

 

각자의 지위와 운명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거나 해가 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미모, 체력이나 재주, 장기나 재능 등에 의해서도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질을 지닌 사람들이라야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실제로 갖추든지 적어도 갖고 있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실제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고 이 차이에서 엄숙한 겉치장과 기만적인 책략과 이에 따른 모든 악덕이 나왔다.”

 

여기서 각자의 지위와 운명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미 지배/피지배라는 위계질서, 그 사이에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복잡한 신분 질서가 구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서러운 일이지만, 이제 대부분의 인간은 파란만장한 자유보다는 평온한 굴종에 적응하고 만 것입니다. 도망쳐서는 살 수 없어서 도망치지 않는 노예와 같은 신세죠.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말,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말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루소의 말이 서늘한 이유는, 지금 현재 우리 대부분이 다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취업을 하든 무엇을 하든 돈을 주는 사람을 떠나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도망을 생각하지도 못했던 과거 노예나 지금 우리나 자신의 필요를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억압체제는 우리에게 먹이를 주지 않을 테니까요. 자신이 쓸모가 없더라도 쓸모 있는 척이라도 해야만 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자신을 찬양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이것이 인간의 허영을 설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억압체제에 길들여져, 억압체제라도 이곳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된 인간의 서글픈 면모가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찬양이 아니더라도 인정을 얻지 못하면 생존이 어렵습니다. 그러니 더 찬양받고 더 인정받는 자리로 가려 하고, 적어도 동료들보다 비교 우위에 있으려 하는 것입니다. 평온한 굴종에 이미 적응해버린 인간, 도망치려는 의지가 없는 노예나 자본주의에 순응한 우리에게만 허영의 논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라캉(Jacques Lacan, 1901 ~ 1981)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습니다. 비교 우위를 꿈꾸는 허영 논리의 정신분석학적 버전이죠. 그러니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나 라캉의 정신분석 담론을 인간 내면의 본성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평온한 굴종의 메커니즘에만 적용되니까요. 결국 우리는 억압 체제에서 벗어나야 허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정신분석이 말하는 일체의 정신병들로부터 치유될 수 있습니다. 미인 이야기를 빌리자면 등불이 빛나는 따뜻한 객사를 떠나 어둡고 차가운 밖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객사는 바로 허영의 각축장이니까요. 객사라는 공간을 설정하면서 그 밖을 상상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장자의 위대함일 것입니다. 소요유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객사 안이 전체 세계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객사 밖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향’,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나 쓸쓸한 들판’, 광막지야(廣莫之野)’일 것입니다. 객사 밖 그 어둠, 그 낯섦, 그 추움이 익숙해지면 무하유지향은 어디에나 있는 고향으로, 광막지야는 파란만장한 자유의 땅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 장자의 속내는 바로 이것일 겁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6. 쓸모없어 좋은 날 / 8.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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