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5. 소인의 힘 소인의 권위(윤편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5. 소인의 힘 소인의 권위(윤편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1:03
728x90
반응형

 5. 소인의 힘, 소인의 권위

윤편 이야기

 

 

환공이 회당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당 낮은 곳에서 수레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나무망치와 끌을 밀쳐두고 올라와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말했다.

윤편이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라고 묻자 환공은 그는 죽었다라고 대답했다.

윤편은 반문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가 아닙니까?”

환공이 말했다. “수레바퀴 깎는 장인인 네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논의하려 하는가! 만일 네가 자신의 행위를 해명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일 그러지 못하면 너는 죽을 것이다.”

윤편은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저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겁니다. 바퀴를 깎을 때 끌질이 느리면 끝은 나무에서 미끄러져 제대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빠르면 끝은 나무에 박혀 빠지지 않습니다.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저는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 입이 있어도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끌질하는 동안 몇몇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제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제 아들도 또한 제게서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이 일흔이 되도록 제가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천도13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七十而老斲輪. 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소인들의 조용한 자기혁명

 

장자에 실려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한 가지 눈에 들어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 상당수가 책상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에 던져진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즉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맹자(孟子, BC 372 ~ BC 289)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인(大人)이 아니라 소인(小人)이었던 겁니다. 아마도 장자는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했던 사상가들, 제자백가 중에서 유일하게 소인으로부터 배우고 소인의 삶을 긍정했던 사상가였을 겁니다. 장자전편에 농사를 짓는 사람, 물고기를 잡는 사람, 소를 도살하는 사람, 투계를 기르는 사람, 수레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사람, 악기를 만드는 사람 등등이 진정한 삶의 달인으로 등장해 군주나 고관대작 혹은 철학자에게 지혜를 전해주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대인들은 명령만 내리면 고기 요리를 먹을 수 있고, 명령만 내리면 투계장을 열 수 있고, 명령만 내리면 악기를 연주하라고 시킬 수 있죠. 마치 지금 우리가 돈만 내면 이삿짐 나르는 사람들을 살 수 있고, 음식을 배달시켜 먹을 수 있고, 돈만 내면 대리운전 기사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삿짐 나르는 사람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우리 대신 이삿짐을 옮겨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몸소 이삿짐을 날라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알게 되죠. 육체노동이 얼마나 힘들고 위대한지, 그리고 이삿짐을 능숙하게 나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춘추전국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권력이 있으면 맛난 음식이나 근사한 음악을 향유할 수 있지요. 하지만 권력자나 지식인들도 소를 도살하는 사람이나 악기를 만드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이 사라진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그들, 소인들에 업혀서 살아왔다는 사실, 심지어 그 소인들의 노동을 착취해 호의호식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되겠죠. 소인들은 자신들을 부리는 대인들이 없어도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온몸으로 세상과 관계하면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죠. 사실 소인들은 대인들이 없을 때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소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강자들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인들은 대인이 지배하는 억압체제 속에서 자신들이 진정한 강자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훈육되었습니다. 농사를 짓든 사냥을 하든 아니면 물고기를 잡든 자신들의 수확물을 대인들에게 일정 정도 갖다 바칩니다. 대인들의 강제 노동력 동원에도 응하고요.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수확물 일부를 제공한다고 믿지만, 이는 분명 착취이고 수탈입니다. 어떤 소인들도 대인들에게 보호를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대인이 요구하는 바를 거부하면 소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세요. 가공할 폭력에 노출되어 자칫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할 겁니다. 대인들의 집에 거의 노예처럼 근무하던 다양한 기술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도 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온갖 것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수리하면서 살았습니다. 대인들이 사라진다 해도 기술자들은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겁니다. 자신들이 익힌 기술로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테니까요.

 

장자는 대인들이 사라진 사회, 억압이 사라진 사회를 꿈꾸었을까요? 분명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장자는 혁명에 조바심을 치지는 않습니다. 지배당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특정 지배자를 제거해도 다시 지배 구조를 만들거나 용인하기 쉽습니다. 특정 대인을 몰아내도 소인들이 소인으로 남아 있는 한 대인은 다시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나쁜 왕 대신 좋은 왕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라는 형식으로 상징되는 억압 구조입니다. 혁명이 완성되려면 대인/소인, /신민 혹은 지배자/피지배자라는 구조 자체가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장자는 더 무서운 혁명을 꿈꾸게 됩니다. 소인들의 조용한 자기혁명! 소인들이 더 이상 자신을 작다고 보지 않아야 하고, 자신의 삶과 앎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인이 대인이 될 때, 그래서 소인들이 사라질 때, 억압 구조는 들어설 자리가 없을 테니까요. 모두가 대인인 사회, 그래서 누구도 다른 누구를 소인으로 몰아 지배하지 않는 사회, 이것이 바로 장자가 꿈꾸던 사회였습니다. 장자전편에서 소인들, 혹은 육체노동 종사자들이 제()나라(BC 1046? ~ BC 221) 환공(桓公) 같은 위대한 군주들이나 공자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보다 더 심오한 삶의 지혜를 갖춘 성인으로, 흔히 말하는 재야의 고수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장자편찬자들이 장자가 은밀하고 조용한 혁명, 느리지만 확실한 혁명을 꿈꾸었던 것을 모를 리 없죠. 그 흔적이 지금도 외편과 잡편 여러 편에 들어 있습니다. 변무(騈拇), 마제(馬蹄), 거협(胠篋)편 등이 대표적일 겁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소인이 사라지는 사회로 억압 구조를 돌파하려는 장자와 달리 그의 후학들은 대인이 사라진 사회를 강조하니까요. 장자의 기대와는 달리 진나라와 한나라가 연이어 등장하자, 장자 후학들은 혁명에 조바심을 치기 시작한 겁니다.

 

 

 

 

 

말로 옮길 수 없는 것

 

대인을 압박하는 소인의 기상, 심지어 대인을 가르치려는 소인의 당당함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는 윤편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윤편(輪扁)이라는 장인과 그의 주인인 제나라 환공 사이에 오간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환공은 춘추시대의 패자로 유명한 군주입니다. 비록 제후의 신분이었지만 천자 국가였던 주()나라(BC 1046 ~ BC 256)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중국 전체를 지배했던 권력자가 바로 패자입니다. 환공은 춘추시대를 지배했던 다섯 패자 중 가장 강력한 패자였습니다. 반면 환공을 위해 수레바퀴를 만드는 편은 그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윤편이라는 이름을 보세요. 윤편이라고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그는 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은 세습 귀족에게만 허용되었으니까요. 환공이나 관료들은 그를 성 없이 그냥 ()’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아마 그의 얼굴이 넓고 납작했겠지요. ‘넓다혹은 납작하다는 뜻이니까요. 편이라고 불린 수레바퀴 장인에게 수레바퀴를 뜻하는 ()’이라는 글자가 덧붙여집니다. 그러니까 윤편은 수레바퀴를 만드는 편이라는 의미입니다. 내편 양생주편의 포정 이야기의 주인공 포정(庖丁)’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를 잡는 정이라는 뜻이거든요. 군주를 위해 소를 도살하는 푸주한 중 아마 그는 네 번째 푸주한이었을 겁니다. , , , . 정은 네 번째를 의미하는 글자니까요.

 

어쨌든 이런 비천한 윤편이 맨바닥에서 수레바퀴를 만들다 환공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갑자기 터벅터벅 올라오면서 윤편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시작부터 파격이죠. 당하(堂下)에 있어야만 하는 윤편이 환공이 앉아 있던 당상(堂上)으로 올라온 것이니까요. 노예 신분에 지나지 않은 장인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상하 신분 질서에 대한 도발이자 도전입니다. 이때 환공은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읽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윤편은 환공이 경전을 읽고 있는 것에 시비를 겁니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경전을 읽고 있던 환공에게 윤편은 말합니다. “공께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가 아닙니까?” 지금 윤편은 환공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넘어 당시 모든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경전마저 깔끔하게 부정한 것입니다. 권위주의에 젖은 다른 군주라면 장인이 당상에 올라오는 순간 아마 칼을 휘둘렀을 겁니다. 하지만 패자 환공은 현실주의자입니다. 그 자신도 주나라 천자라는 상전의 권위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 실권을 잡았습니다. 자신도 주어진 상하 질서를 우습게 여겼으니, 편의 도발적인 언행에 감정적으로만 반응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참기 어려웠던 분노를 간신히 참은 환공은 윤편에게 변명할 기회를 줍니다. “수레바퀴나 깎는 장인인 네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논하려 하는가! 만일 네가 자신의 행위를 해명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일 그러지 못하면 너는 죽을 것이다.”

 

윤편은 경전을 왜 옛사람들의 찌꺼기라고 할 수 있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생명을 구걸하는 비루함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를 가르치겠다는 여유로움이 느껴집니다. 하긴 생명에 연연했다면 당상에 올라가지도 않았을 윤편입니다. 윤편은 수레바퀴를 깎는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목재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수 있게 되었죠. 수레바퀴 깎는 노하우(know-how)’를 얻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문제는 이걸 다른 사람에게 말로 옮길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이 자전거 타는 방법을 자전거 못 타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들은 자전거 타는 방법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운다 해도 자전거 못 타는 사람이 자전거를 바로 탈 수는 없는 법이죠. 윤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에게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아들의 끌질이 나아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나처럼 타봐라는 말과 함께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전거 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듯, 아들 앞에서 끌질의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 그나마 윤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겁니다. 물론 아버지의 시범을 본다고 해서 아들이 곧바로 아버지처럼 끌질을 하기란 불가능할 테지만 말입니다.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

 

오서리티(authority)’라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주로 권위라고 번역되죠. 그런데 이 단어를 들여다보면 권위’, ‘authority’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단어가 하나 들어 있습니다. 바로 ‘author’, ‘작가를 의미하는 말이죠. 작가는 기본적으로 남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떠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나아가 그를 존경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표절은 윤리적 문제나 법적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본질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죠. 결국 오서리티는 권위라는 뜻 이전에 작가임으로, 그리고 작가임앵무새가 아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윤편의 말이 권위 혹은 힘을 갖는지 알게 됩니다. 윤편은 작가였던 겁니다. 최소한 끌질과 관련된 모든 것, 구체적으로 말해 그가 만든 근사한 수레바퀴, 그의 끌질 퍼포먼스, 아들에게 끌질에 대해 했던 말 등등은 모두 그의 작품이니까요. 윤편의 아들은 아버지가 만든 수레바퀴, 아버지의 끌질, 나아가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을 언제쯤 이해하게 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아버지 윤편의 모든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아버지가 그랬듯 윤편의 아들도 직접 끌을 잡고 수레바퀴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버지처럼 목재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을 때, 아들은 아버지 윤편의 모든 작품을 이해할 겁니다.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된 아들이 왜 과거 아버지가 자전거 타는 법을 그렇게 설명했는지 깨닫는 것처럼 말입니다.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윤편의 가르침은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그의 아들 또한 배울 수도 없는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아들에게 그나마 도움이 되려면, 윤편이 아들과 함께 수레바퀴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마 아들이 수레바퀴를 깎은 모습을 본다면, 윤편은 이와 다른 가르침을 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갑자기 끌이 부드럽게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 끌 잡은 손에 힘을 풀고, 끌이 겉도는 느낌이 들면 약간 끌을 비틀어라라는 식으로 말이죠. 윤편의 몸과 아들의 몸이 다르고, 아울러 모든 목재가 같지 않으니, 가르침은 그야말로 수천 가지로 변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하나의 가르침은 윤편에게는 그야말로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좋을 찌꺼기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윤편이 몸소 아들과 함께 수레바퀴를 깎으며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 수레바퀴 깎는 법을 글로 남겨 아들에게 전했다면 어떨까요. 아버지의 비법이 담긴 책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아들이 수레바퀴를 잘 만드는 장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그냥 참고 자료일 뿐이죠. 어차피 아들은 자기만의 시행착오를 거쳐 목재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수 있는 자기만의 노하우를 얻어야 하니까요. 사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비책은 외려 방해가 될 가능성이 많을 겁니다. 최종적으로 아버지 윤편의 손이나 마음이 아닌, 자기만의 마음과 손이 중요한 순간이 올 테니까요.

 

수레바퀴 깎는 방법만 그럴까요. 사랑하는 방법, 수영하는 방법, 요리하는 방법, 사회생활 하는 방법 등등 삶과 관련된 모든 방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 윤편의 눈에는 경전을 읽고 그 지침대로 살면 성인처럼 되리라는 환공의 믿음이 우스워 보였겠지요. 오히려 성인을 앵무새처럼 흉내 낸다면, 환공이 자기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온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죠. 물론 경전이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인이 살아서 시범을 보이고 아울러 환공이 정치하는 것을 보고 있다면 말이죠. 물론 이 경우 경전의 내용은 지금 환공이 읽고 있는 것과 사뭇 다르게 표현되겠지요. 그래서 윤편은 환공에게 물었던 겁니다. 경전을 만든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던 이유를 윤편은 변론 마지막 질문으로 다시 강조하죠. “옛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 이제 변론은 끝났습니다. 환공은 윤편을 살려두었을까요, 아니면 죽였을까요? 환공은 경전을 던져버렸을까요, 아니면 계속 읽었을까요? 어쨌든 환공의 권력에 맞섰던 작가 윤편의 권위와 당당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4.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 / 6. 쓸모없어 좋은 날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