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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9. 타자와 함께 춤을(포정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9. 타자와 함께 춤을(포정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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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타자와 함께 춤을

포정 이야기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며 소를 잡는데, 설컹설컹, 썩둑썩둑, 칼 쓰는 동작이 리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소 잡는 것이 무곡 상림(桑林)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 경수(經首)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다.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이에 문혜군이 말했다. “참 훌륭하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文惠君曰: “, 善哉! 技蓋至此乎?”

 

표정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이고, 이는 기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온전한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으로 조우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소의 고유한 결을 따르기[]’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全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之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微礙, 而況大軱乎!

 

훌륭한 푸주한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푸주한이 달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간 이 칼로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곳처럼,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하지만 매번 근육과 뼈가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士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삶의 기름이 무엇인지 터득했노라.” 장자』 「양생주

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체험된 상황들을 위하여

 

숫자나 문자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지배/피지배 관계 혹은 국가질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거나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확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처음 등장한 거대 문명 혹은 최초의 국가들이 복잡한 숫자나 문자 체계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물을 남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세금 체계, 법률 체계 그리고 행정 체계는 숫자나 문자로 뒷받침됩니다. 숫자나 문자는 기억과 분석 그리고 예측이라는 마법을 부리는 요술 지팡이니까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본가는 국가의 요술 지팡이를 그대로 벤치마킹합니다. 기업 내부에 떠돌아다니는 문서만 살펴봐도, 복잡한 숫자들과 문자들이 상명하복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인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문서를 잘 해독해 실행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문서를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라는 원초적 분업이 숫자와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죠. 정신노동은 숫자와 문자를 다루는 노동을 말하니까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농부, 어부, 광부, 목동, 노동자 등의 육체노동이 없다면, 정신노동은 그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억압체제를 받아들인 대부분 사람들은 정신 노동에 종사하려고 합니다. 수고는 덜한 데 비해 이익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그야말로 동물적인 판단에 따르는 셈입니다.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이나 오늘날의 입학시험, 임용 시험 혹은 입사 시험에 열심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농림축산식품부 관리나 혹은 그와 관련된 학과의 대학교수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소에 대해 박식함을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소를 직접 기르거나 도살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에 경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관리나 대학교수들에게 직접 소를 기르거나 도살해보라고 하면, 그들 중 제대로 소를 기르거나 도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들은 문자나 숫자로 이루어진 책에서 배운 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들 뿐이니까요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의 저자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1900~1976)이라면 아마 실천적 지식(know-how)은 이론적 지식(know-that)을 가능하게 하지만, 이론적 지식이 실천적 지식을 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했을 겁니다. 장자가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씨름하는 육체노동자, 전국시대 당시 용어로 말해 소인(小人)이 작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큰 존재라고 긍정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육체노동자는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지만 정신노동자는 육체노동자에 기생해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정신노동자는 육체노동자에 비해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이는 소를 기르는 일, 소를 도살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자전거 타는 일, 여행하는 일, 사랑하는 일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책이나 영상으로 떠올리는 자전거 여행지 혹은 매력적인 사람은 실제로 타는 자전거, 걷고 있는 대지 혹은 만나고 있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 울퉁불퉁한 길을 잘 걷는 사람, 제대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뿌듯한 행복감에 젖어들 테니까요. 이럴 때 우리 삶은 정신과 육체라는 해묵은 이분법을 넘어 완전해지는 게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이론적 지식은 실천적 지식과는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실천적 지식을 방해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든 문자와 숫자로 기억하고 분류하고 통제하며 예측하려 하니, 현실을 체험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배우기 힘든 법입니다. 삶에서 만나는 타자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혹은 타자와 같이 하면서 관계를 맺지 않으면삶도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육체노동자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것이 타인이든, 소이든, 나무이든, 물고기든, 철이든 티타늄이든, 혹은 땅이든 물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죠. 반면 상명하복에 포획된 정신노동은 삶의 세계에서 조우하는 타자와 제대로 관계하기 어렵습니다. 지배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타자는 우리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이제 사무실에서 나와 햇빛이 찬란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영상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내비게이션에서 눈을 떼고 창가로 불어들어오는 바람과 꽃내음을 느껴야 합니다.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표상된 상황들(vorgestellte Situationen)’체험된 상황들(erlebte Situationen)’을 구별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체험된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 상황은 나만이 아니라 타자와 어울려야 만들 수 있습니다.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고사의 기원인 표정 이야기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입니다. 체험된 상황이 좌절감을 안기지 않도록 만드는 팁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내 몸을 매개로 타자와 하나가 되는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은 포정이 소를 바르다라는 뜻입니다. 자전거를 잘 타게 된 사람이나 근사하게 사랑하게 된 사람처럼 포정은 소를 잘 잡게 된 푸주한입니다. 네 번째[] 푸주한[]이라는 그의 이름과는 달리 그는 최상의 푸주한, 랭킹 1위의 푸주한이 된 겁니다. 포정 이야기는 그의 주인 문혜군이 포정이 소잡는 모습을 관찰한 데서 시작됩니다. 핵심은 칼 쓰는 동작이 리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奏刀騞然, 莫不中音]”는 표현에 있습니다. 리듬이 관건이었던 겁니다. 바이올린 소나타를 생각해보세요. 근사한 연주가 펼쳐지려면, 바이올린의 리듬과 피아노의 리듬이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이 소리를 내지 않은 그 여백에 잘 들어가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이올린이나 피아노가 동시에 음을 내는 부분일 겁니다. 잘못하면 두 리듬 중 하나가 상쇄되어 파괴될 수도 있으니까요. 피아노 리듬이 바이올린의 리듬으로 들리고, 반대로 바이올린 리듬이 피아노의 리듬인 듯 들려야 할 겁니다. 그 순간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은 상태가 달성됩니다. 공연장 관객들의 귀에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다 바로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일순간 그 소리는 다시 바이올린 소리로 들리게 될 겁니다. 아니면 두 남녀의 근사한 탱고를 떠올려도 좋을 듯합니다. 남녀 사이에 호흡의 리듬, 심장 박동의 리듬, 팔의 리듬 그리고 다리의 리듬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혹은 남자의 마음이 모두 여자의 몸에 가 있고 여자의 마음도 남자의 몸에 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고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런 순간에만 멋진 탱고가 플로어에 가득 찰 수 있을 겁니다.

 

포정이 소를 가르는 기술이 문혜군에게는 한마디로 멋진 춤처럼 보였습니다. 포정과 소 사이에 벌어진 공연이 얼마나 근사했던지 문혜군은 그 공연에 개입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공연이어서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니, 어떻게 그가 공연에 개입해 포정의 퍼포먼스를 방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쉽게도 퍼포먼스가 끝나자, 문혜군은 그제야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맙니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물론 포정도 소를 자를 때 문혜군을 의식할 틈이 없었죠. 모든 마음이 자신의 칼과 소의 살결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퍼포먼스를 마친 순간 포정의 마음은 평상시로 돌아오죠. 바로 그때 그는 주군 문혜군과 그의 탄성을 의식하게 됩니다. 플로어에서 춤을 마친 뒤에야 관객을 의식하는 댄서처럼 말입니다. 마침내 표정은 자신의 퍼포먼스가 매력적인 춤으로 보인 이유를 문혜군에게 알려줍니다. 포정의 말은 문혜군 뿐만 아니라 2,500여 년이 지나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이고, 이는 기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디어 그 유명한 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다음 소 잡는 방법에 대해 길게 이어지는 포정의 생생한 묘사는 왜 포정의 댄스와 같은 퍼포먼스가 단순한 기술을 넘어 도라고 불릴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포정 이야기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포정의 도는 어디에 있으며,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을 자신의 이야기에서 찾으라고 포정은 유혹합니다. 이제 자신이 어떻게 최고의 푸주한이 될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포정의 설명을 따라가보도록 하죠.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보이는 것마다 소로 보였다고 합니다. 당구를 꽤 쳐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당구에 확 빠져드는 시기에는 사람들의 머리마저도 다 당구공으로 보이죠. 포정도 모든 사물이 소로 보일 정도로 소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이제 소를 보면 온전한 소로 보이지 않고 살, 근육, 뼈 등으로 분해된 것처럼 보이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죠.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스미스 요원을 볼 때 그를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의 흐름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마침내 포정이 자신의 현재 경지를 설명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지금은 신()으로 조우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소의 고유한 결을 따르기[]’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본 일이 없습니다[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之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微礙].” 신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나 감각 자료를 처리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내 손과 하나가 되어 있는 마음, 소의 내부 결을 느끼는 마음, 한마디로 자신의 몸의 리듬과 소의 몸의 리듬과 하나가 되는 마음입니다. 개념화해본다면 육체적 이성(bodily reason) 정도가 될 것 같네요. 몸과 하나가 되고 그 뿐만 아니라 내 몸을 매개로 타자와 하나가 되는, 그 어떤 마음을 신()이라 부릅니다. 족구나 야구 등 구기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봤을 겁니다. 공에 집중해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공이 슬로모션처럼 굉장히 느리게 다가옵니다. 그뿐 아니라 공을 패스하는 사람들의 동작도 느려 보이고, 공기조차 느려지는 것 같고 주변 소음마저 느릿느릿해져 다 식별되는 느낌! 당연히 공을 발로 차거나 배트로 치는 것이 너무 쉬울 겁니다. 나의 그러한 동작을 본 사람은 탄성을 지르겠지요. 어떻게 저렇게 빠른 공을 정확히 맞힐 수 있을까!

 

 

 

 

 

모든 소는 다르다

 

내게 날아오는 공이 슬로모션처럼 느려 보인다는 것은 나의 몸이 빠르다고 느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게 날아오는 공이 수박처럼 커 보이려면 나의 몸이 작아진 것처럼 느껴야 할 겁니다. 포정도 유사한 경지에 이른 것이죠.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소의 결, 근육과 뼈, 근육과 인대 사이의 너무나 미세한 결이 그야말로 고속도로처럼 넓게 보였으니까요. 이는 포정의 마음이 칼날의 그 날카로운 끝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곳처럼,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당연히 뼈나 인대 등과 부딪힐 일이 없죠. 마치 16차선 도로를 천천히 걸어가는 것 같으니, 도로 외벽에 부딪힐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포정은 19년 동안 칼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하긴 텅 빈 공간을 가르는 칼이 무슨 저항을 받았다고 무뎌질까요. 바로 여기가 소 잡는 기술이 이를 수 있는 정점입니다. 마침내 포정은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갈 수 있는기술을 얻은 겁니다. 이제 포정에게는 못 잡을 소가 없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소 내부의 결들이 16차선 도로를 넘어 허공처럼 휑하게 느껴지니, 두께가 없는 칼을 휘두르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일 겁니다. 바로 이 기술의 정점에서 표정은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산 정상에 올라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자신의 도는 기술을 넘어선다고 자신했을 때 그가 기술 끝에서 발견했던 것은 네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으로 응축됩니다. 매지어족(每至於族)! ‘매번을 뜻하는 부사 ()’, ‘이르다를 뜻하는 동사 ()’, ‘~를 뜻하는 일종의 어조사 ()’, 그리고 무리묶음을 뜻하는 명사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매지어족매번 근육과 뼈가 모여 있는 곳에 이른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16차선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는데 그 한가운데서 차를 전복시킬 장애물을 만난 셈이고, 허공에 칼을 휘두르는데 그 허공에서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조우한 셈이죠.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갈 수 있는기술이 무력해지는 지점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어제 잡은 소와 달리 지금 잡는 소에게만 있는 장애물입니다. 바로 여기서 포정은 모든 소는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소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매지어족이라는 문장에서 ()’라는 글자가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옵니다. 각각의 소는 다른 소와는 다른, 자기만의 단독성(singularity)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타자의 완전한 타자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단독성과 소통하지 못하면 지금 칼을 댄 소는 제대로 해체될 수 없습니다. 틈이 있는 뼈마디가 갑자기 틈이 없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이 하늘 위에서 올라갈 수 없지만 올라가야 하는 어떤 곳을 발견한 형국입니다. 누구도 가본 적이 없기에 길도 없습니다. 올라가면 길이 만들어질 테지만, 그 길은 푸른 하늘에 잠시 만들어졌다 사라지고 말 겁니다. 하지만 허공 속에서 만난 그 무언가, 소의 단독성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날개 없이 나는, 목숨을 건 비약일 겁니다. 그만큼 조심스럽고, 그만큼 과감해야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죠.

 

탱고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 진정 위험한 대목이 시작된 겁니다. 이 부분을 통과하지 못하면 앞의 전체 춤사위는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성공하면 근사한 희열이 찾아올 테지만, 실패하면 19년의 기술마저 무용지물이 되고 칼날도 이가 빠질 겁니다. 도가 없는 곳에 도를 만드는 일이기에 포정은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다행히도 포정의 칼은 최종 장애물을 무사히 통과합니다. 포정은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는 곳을 통과한 것이고, 날개 없이 날아 창공 위 더 높은 곳에 이른 겁니다. 포정에게는 묵직한 행복감이 찾아듭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 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하지만 포정은 압니다. 행복은 잠시뿐이라는 것을요. 내일 또 다른 소를 만나면 포정의 칼날은 여전히 망가질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포정만의 상황은 아닙니다. 연애의 고수도 새로 만난 연인과의 연애를 두려워합니다. 지금의 연인은 과거의 연인들과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연애는 하면 할수록 힘들고, 산은 타면 탈수록 힘들고, 악기는 연주하면 할수록 힘들고, 탱고는 추면 출수록 힘든 법입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이야기를 다 듣고서 마지막에 덧붙입니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삶의 기름이 무엇인지 터득했노라[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삶의 기름은 한자 양생(養生)’을 풀이한 말입니다. 문혜군이라는 군주는 정말로 포정의 도를 이해했을까요? 이해했다면 포갑, 포을, 포병 그리고 포정이라는 네 명의 푸주한을 그들의 단독성으로 만나게 될 겁니다. 여기서 푸주한이라는 신분이나 지위는 힘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신분과 지위의 힘이 무력해지는 순간, 군주로서 그의 지위도 덧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과연 문혜군은 네 명의 푸주한, 나아가 피지배자들과 동등한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요? 타자와 같이하면서 관계를 맺는춤은 이렇게 치명적인 데가 있는 것입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8.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네 / 10. 텅 빈 하늘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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