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발견
아시다시피 프로이트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를 철학자로 다루는 철학사 책을 만나기도 그다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는 철학에, 특히 근대철학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매우 간단한 단 하나의 개념 때문입니다. ‘무의식’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개념 말입니다. 이 개념은 근대철학의 기초였던 ‘주체’를 그리하여 주체철학 전체를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프로이트가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파괴 효과는 사실 무의식이란 개념 하나만으론 이루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다양한 증거와 임상적 사례들, 그리고 정신분석학이란 독자적인 학문을 창출해낸 체계적이고 강력한 개념들과 이론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을 겁니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의식 개념의 변화와 발전만을 간략히 다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 ‘무의식’을 발견합니다. 그는 대학을 마친 뒤 프랑스의 유명한 생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샤르코(J. M. Charcôt) 밑에서 공부를 합니다. 샤르코는 최면술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 당시에 베른하임(H. Bermhein)이라는 의사가 최면술 요법을 통해 아주 주목할 만한 발견을 합니다. 그는 어떤 여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최면이 깬 후에 우산을 펴도록 시켰답니다. 그랬더니 최면에서 깬 그 여자는 우산을 들고 펴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베른하임이 시치미를 떼며 왜 우산을 폈냐고 물었더니 그 여자는 그 우산이 자기 것인지 보려고 했다는 겁니다(물론 집요하게 계속 캐물은 결과, 누군가가 시킨 것 같다는 대답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최면 상태에서 암시받은 행동을 최면이 깬 후에도 하게 되는 현상을 ‘후최면 효과’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기가 왜 하는지 모르는 채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여자는 나름대로 이유를 대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라 단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되지 않지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일이, 곧 의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전혀 의식되지 않은 채 판단하는 영역이 사람의 정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신 안에 있지만 의식되지 않는 영역을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그 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J. Breuer)라는 동료 의사와 함께 히스테리에 대해 연구하면서 이런 현상이 히스테리 환자에게도 나타난다는 걸 알게 됩니다. 브로이어의 환자 가운데 안나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는 히스테리 발작 증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히스테리의 근본 원인은 안나 역시 모르고 있었는데, 브로이어는 최면 상태에서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캐물어 그 원인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더니 히스테리 증상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모르던 원인을 알아내 그걸 알려줌으로써 증상을 치료하는 방법을 ‘카타르시스 요법’이라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무의식이 최면술이나 히스테리 환자처럼 특별한 경우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무의식의 존재를 일반적인 게 아니라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 「정신분석가의 집을 나오는 여자」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의 그림이다. 문패에 Dr, FJA (아마도 Freud, Jung, Adler의 이니셜일 게다)라고 적힌 정신분석가의 집에서 나오는 여자의 손에는 ‘아버지’임이 틀림없는 남자의 얼굴이 거꾸로 들려 있다. 그 밑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다. 거기다 버리고 가라는 뜻일까? 이 여자도 버리려고 하는 듯하다. 바로는 아버지를 이처럼 떨구어 버리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면, 정신적 질환(신경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적 질서 전체와 결별하는 것이 되진 않을까? 정신병의 시작? 결국 우리는 아버지에 매여 있어도 문제고,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도 문제다. 여인의 머리에는 머리카락 대신 아버지 수염 같은 ‘기운’이 꿈틀대며 뻗쳐 있다. 뜯어내도 남아 있는 아버지의 흔적처럼, 그리고 또 하나의 얼굴이 외투처럼 그 신체를 감싸고 있다. 두 얼굴의 시선은 각각 좌우로 엇갈려 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난 ‘본능’, 혹은 ‘거시기’를 보호하고 통제하는 자아의 옷일까? 아니면 내면의 무의식을 감추고 있는 의식의 껍데기일까? 정신분석가의 문 밑에서 은밀히 흘러나와 여인의 발목을 잡고 있는 희끄무레한 연기는, 아버지 대신 정신분석가의 손에 사로잡힌 운명을 암시하려는 것일까?
보편적인 무의식
둘째 단계, 무의식이 우연적인 게 아니라 보편적인 것임을 발견합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그는 브로이어와 싸우고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게 되는데, 그가 선택한 주제는 바로 꿈이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꿈의 해석』이라는 책이지요. 그는 이 연구를 통해 무의식이 최면이나 히스테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보편적인 거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꿈을 안 꾸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꿈에는 잠재몽(潛在夢)과 현재몽(顯在夢)이 있는데, ‘현재몽’은 흔히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고, 잠재몽은 그 꿈에 왜곡된 모습으로 잠재해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꿈의 작업’을 통해 변형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잠재몽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어서 그대로 나타났을 때는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수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검열하고 왜곡시키는 거지요. 히스테리나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증상처럼 꿈 역시 자신이 의식하지는 못하는 어떤 생각이나 욕망 등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한편 프로이트는 농담이나 실수, 일상생활에서까지도 무의식의 징후들을 찾아냅니다. 신경증 역시 이런 징후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지요. 이 예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사고와 행동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는 걸 뜻합니다. 요컨대 무의식이 항상, 그리고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인간, 혹은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은 벽으로 단절되어 있어 의식은 무의식이 어떠한 상태인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무의식이 특히 성욕과 연관되어 있으며,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힘든 욕망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억압되고 감추어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성교하고 싶다는 ‘끔찍한’, 그래서 억압되어진 욕망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거쳐야만, 즉 그 용납될 수 없는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해야만 어린아이는 비로소 인간의 질서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고 하지요.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거지요.
▲ 세네트에게 바침
마그리트(René Magritt)의 그림 「세네트에게 바침」(Homage to Mack Sennett)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가장 열광적으로, 그리고 가장 명시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란 현실을 넘나들려는 입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대상의 겉에 드러난 것을 보는 ‘실재론’(reallism)과 달리, 그것을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의 ‘징후’ 내지 ‘증상’으로 보려는 태도를 초현실주의라 한다. 그들은 마치 정신분석가들이 그러하듯이, 모든 것에서 성욕의 징후를 보고, 모든 곳에서 성욕의 표상을 찾는다. 철학적 사유가 담긴 재치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던 마그리트 또한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 그림에서 옷장에 걸린 옷에서도 그것이 가리고 있는 것을 본다. 혹은 옷장에서도 그것을 보고, 사람의 얼굴에서도 젖가슴과 음부를 보는 강력한 투시안을 가졌다. 그러나 사실 이런 투시안을 갖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자, 이제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을 시작하라. 그리고 떠오르는 모든 대상을 남근이나 성욕의 대상, 그리고 엄마와 아버지에 연결시켜 보라. 가령 플러그는 남근이고, 콘센트는 질이고, 쭈쭈바는 남근이고 그것을 빨아먹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등등……. 눈이 친히 밝아진 게 느끼지지 않는가? 이것을 찾아내는 데 재능이 있다고 생각되면, 주지 말고 광고 기획사를 찾으면 좋다. 알다시피 TV 광고의 많은 부분이 지금은 이런 상징을 일부러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무의식의 분열
셋째 단계, 무의식 자체 내에 분열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프로이트는 의식/무의식이라는 이론적 틀(위상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의식 개념은 상반되는 두 가지 것으로 분할됩니다. 왜냐하면 성적인 욕망이나 통제되지 않는 충동이 무의식을 이룬다고 했는데, 이것을 억압하는 것 또한 의식된 행동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식은 그것이 억압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억압되는 욕망이나 억압하는 기제 모두 무의식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두 가지 개념으로 분할합니다. 억압되는 욕망과 충동을 ‘거시기’(이드id)라고 하며, 억압하는 기제를 초자아(Super-ego)라고 합니다. 거시기는 ‘쾌락원칙’에 따라 움직이며, 초자아는 그것을 통제하려는 사회적 질서ㆍ도덕적 질서가 내면화된 것입니다. 이 양자는 언제나 충돌합니다. 거시기는 쾌락을 찾아서 움직일 걸 요구하고, 초자아는 그러면 안 된다고 금지하니까요. 이 충돌을 화해시키고 조절하는 것을 자아(ego)라고 합니다. 이것은 금지된 것을 피하면서 쾌락을 추구하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현실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거지요. 거시기와 초자아가 무의식인 반면, 자아는 대략적으로 의식과 일치합니다. 결국 이전에 프로이트의 이론적 틀이 ‘의식/무의식’이었다면, 이젠 ‘거시기/초자아/자아’로 전환된 것입니다.
▲ 거세된 남근
이 사진을 여기에 넣은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면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사람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건물, 거기서 정신분석가들은 발기한 남근을 본다. 남성성, 힘, 능력 등등을 상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남근이다. 마치 우리가 자랑스레 일어선 자신의 남근을 보며 은근히 목에 힘을 주듯이, 도시의 건물들은 “내가 좀더 높아야 돼”하며 경쟁하듯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간다. “아시아 최고층” “세계 최고의 높이” 등을 목표로, 능력이 안 되면 남산탑처럼 산 위에라도 지어서 최고 높이를 자랑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단지 군사독재 시절 자랑할 것이라곤 없던 후진국의 특징만은 아니다. 정신분석가가 보기엔 얼마 전에 비행기 테러로 무너진 위 사진의 쌍둥이 빌딩이나, 100층을 넘은 최초 기록을 가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눈에는 고스란히 무너져 내려버린 이 한 쌍의 빌딩이 ‘거세’의 상징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국의 자존심”을 외치며, 확실한 증거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대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할지도. 어쨌든 정신분석가들에게 도시란 남근들이 경쟁하듯 세워지고, 그 남근 주변을 사람들의 욕망이 배회하는 초현실주의적 세계일지도 모른다.
무의식과 주체철학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의 최대 업적이고 정신분석학이 존재하게 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근대철학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의식이란 개념은 철학의 영역에 들어오자마자 근대철학의 기초를 해체하는 강력한 작용을 합니다. 근대철학에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되었고, 통일성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투명한 존재였지요. 또한 주체가 모든 대상에 대해 판단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대상을 지배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요컨대 근대적 주체는 의식적 주체며, 통일성과 투명성ㆍ중심성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나 칸트에게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데카르트에게 세계가 확실한 것은 내가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칸트에게 세계나 진리는 (선험적) 주체 안에 있는 것이었고요. 그리고 이런 특징은 흄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자아’를 지각의 다발로 해체시킬 때조차도 그것은 지각이나 인상, 혹은 관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요. 그것들이 아무리 변덕을 부린다 해도 판단의 중심이 ‘자아’인 건 분명했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확실하게 반복될지는 모르지만, ‘자아’가 볼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의식이란 개념이 끼여들자마자 난감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첫째로 이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커다란 부분은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나’ 이외에 ‘생각하는 나’가 알지 못하는 ‘나’가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투명한 존재가 아닙니다. 신경증 환자의 행동이나 꿈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왜 하는지도 모르는 행동을 하고, 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장면이 의식이 잠든 사이에 눈앞을 스쳐갑니다. 따라서 내가 알지 못하는 행동을 내가 하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욕망을 내가 갖고 있다면, 그래서 무의식에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쳐져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게 됩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접근이 봉쇄되어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인 셈이지요. 또 앞서도 말했지만,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무의식은 의식에 영향을 끼치며, 의식이 사고할 수 있는 가이드 라인이기도 합니다. 즉 자아는 거시기와 초자아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 안에서 작동할 뿐입니다. 때로는 자아(의식)가 손을 쓸 수 없는 행동을 야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식이 몰두할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자아(의식)가 중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중심성을 상실하게 된 겁니다.
더 나아가서 초자아는 내 욕망이 아닌, 그러나 내가 따라야 할 무엇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분명히 ‘타자’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내 의사나 욕망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것,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도록 나를 설득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바로 초자아로서 내 안에 장착됩니다. 나의 성과 이름이 그렇고, 내가 해선 안 될 ‘짓’들이 그렇고, 내가 남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도덕과 가치가 그렇습니다.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는 이 ‘타자’가 오히려 내 안에 장착되어 나를 움직이는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존재는 단일하고 일관된 성격을, 통일성을 갖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간단히 말하면 ‘주체’는 서로 대립되며 상충하는 부분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거죠. 최소한 서로 대면하지 못하는 의식과 무의식, 서로 충돌하며 싸우는 거시기와 초자아로 나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체란 통일적인 중심이 아니라 매우 이질적인 복합체이고,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주체’란 (초자아라는) ‘타자’가 요구하는 규칙을 받아들여 행동함으로써 구성되는 결과물이란 것이지요. 이로써 근대철학의 지반이 해체되는 또 하나의 경로가 그려집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발견은 애시당초 철학의 영역 밖에서 행해진 것이었고, 철학적 주제와 관련된 것도 아니었지만 ‘주체철학’이라는 근대철학의 지반을 철저하게 허물고 깨뜨리는 발견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제공한 다양한 임상적 사례와 문헌적인 분석들은, 해체가 일단 시작되면 끝까지 밀고 가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 욕망은 잠들어 있을 때 옷을 벗는다.
위 그림은 델보(Paul Delvaux)의 「잠든 도시」(La ville endormie)다. 델보 또한 초현실주의 화가인데, 그의 그림은 대부분 가슴과 치모를 드러낸 여인들로 가득차 있다. 특히 그는 그리스나 로마 풍의 건물이 질서정연하게 세워진 도시, 하지만 어딘가 썰렁하고 텅 빈 듯한 도시와 옷을 벗은 여인들을 나란히 병치시키는 경우가 많다. 옷을 입은 여인들이 대개 도시를 향해 서 있다면, 옷을 벗은 여인들은 대개 도시를 등지고 서 있다. 옷 또한 문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반면 옷을 벗은 여인, 어떤 것도 감추지 않은 신체는 욕망을 억누르고 억압하는 문명의 껍데기를 벗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대비는 종종 루소를 연상시키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 같은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 이는 실제로 프로이트가 『문명과 그 불만』에서 쓰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잠든 도시를 옷 벗은 욕망이 걷고 있다. 잠든 도시와 잠들지 않는 욕망의 대비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니 잠들어 있을 때 비로소 욕망은 웃을 벗어던지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거라고 해야 할까? 그처럼, 꿈일까? 어둠과 교교한 달빛, 그리고 어둠으로 물든 신체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도 옷을 다 벗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옷을 입고 등징하는 남자야 문명의 일부분이라고 하자. 여인들은 옷을 반쯤 걸친 사람과 나뭇잎으로 옷을 삼은 사람만이 있다. 잠든 도시 안에서도 어느새 문명을, 옷을 다 벗어버릴 수 없게 된 숙명을 그리려던 것이었을까?
▲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초현실주의자들은 새로운 과거를 발견해냈다. 그들은 문학에서 욕망의 극한을 실험하고자 했던 사드를 역사의 망각 속에서 되찾아냈고, 그의 실험에 기꺼이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미술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예언자를 찾아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가 바로 그다. 르네상스기 중반의 플랑드르 화가였던 보쉬는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The Temptation of St. Anthony)이나 「쾌락의 정원」과 같은 삼면화에서 몽환적이고 ‘엽기적인’ 세계를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것은 당시 플랑드르 화파의 다른 사람들처럼 기독교의 성인이나 예수를 그린 것도 아니었고, 새로이 그림의 중앙에 등장하게 된 새 인물을 그린 것도 아니었다. 성 안토니우스를 유혹하던 환상 안에서 사람의 형상은 두더쥐나 멧돼지, 새, 혹은 기이한 동물들과 뒤섞이고, 물고기를 타고 물 위를, 아니 하늘을 난다. 그뿐 아니라 「쾌락의 정원」의 유명한 지옥도에선 절단된 몸이 나무와 섞여 있고, 귀 두쪽과 나이프는 하나로 꿰어져 남근을 만들고 있으며, 옷 벗긴 신체를 꿰고 뚫고 때리는 극히 엽기적인 장면들이 정신없이 펼쳐져 있다. 굳이 정신분석에 심취한 눈이 아니어도, 그 중 많은 것이 성욕, 특히 변태적이라고 비난받던 성욕과 결부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긴 프로이트는 그리스까지 올라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예언자 혹은 족보의 화려한 시발점이나 중간 매듭을 찾으려는 욕망, ‘아버지’를 찾으려는 욕망 역시 정신분석가나 초현실주의자에게도 다르진 않았던 모양이다.
▲ 드러난 욕망
위의 그림은 달리(Salvador Dalí)의 「드러난 욕망」이다. 달리는 델보와는 다른 방식의 ‘꿈’을 통해 욕망을 보여준다. 달리에게 욕망은 명확히 성욕이며, 그래서 그의 그림은 대부분 성욕과 섹스를 직접적인 주제로 하고 있다. 그는 「욕망의 수수께끼」라는 그림에선 느끼한 질감의 벽에 얕은 구멍을 파고는, 그 구멍마다 수도 없이 그 답을 써 놓았다. “ma mére”, 우리 엄마, 그것이 욕망의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다. 이 점에서 달리는 미술계의 프로이트였다.
이 그림은 달리가 즐겨 사용했던 일종의 중의적 ‘응축’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보여준다. 오른쪽의 머리, 왼쪽의 꼬리를 보아 이 그림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자다. 그러나 왼쪽의 털은 유심히 보면 여인의 머리털이다. 그 옆엔 젖가슴도 있다. 이처럼 이는 사자와 여인이 섞인 그림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이런 형상을 종종 본다. A의 모자를 쓰고, B의 얼굴에 C의 머리 모양을 한 상(像), 이런 걸 프로이트는 ‘응축’이라고 불렀다. 여러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응축된 것이란 말이다. 이미지를 섞는 꿈의 작업 방식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치환’이다. 예를 들어 성교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나 다쳐서 피를 흘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치환이다. 이 그림에선 여인이라는 욕망의 대상이 사자의 형상으로 치환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달리는 응축과 치환에 의해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중의적으로 복합되는 형상을 탁월하게 만들어냈다. 프로이트를 이보다 더 철저하게 써먹은 사람을 찾긴 힘들 것 같다.
▲ 욕망과 정치
그러나 달리가 단지 프로이트주의자였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욕망은 일차적으로 성욕이며, 그것이 ‘승화’되어야 지식이나 예술, 사회적 활동에 대한 욕망으로 변환된다고 보았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책도, 이 책을 읽고 싶다고 느끼는 여러분의 욕망도 성욕의 승화라는 것이다. 납득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도리도 없다. 하지만 욕망이 어째서 모두 성욕이고, 그것의 승화인지가 증명된 것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들뢰즈/가타리 같은 사람들은 사회적 욕망은 직접적으로 사회적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성욕을 거치지 않고 사회적 장에 직접 투여된다는 것이다.
위의 그림은 달리의 「삶은 콩으로 만든 연한 구조물 : 내란의 예감」(Soft Construction with Boiled Beans Premonition of Civil War)이다. 이 그림에서는 내란이라는 사회적 사건이, 신체를 찢고 가르는 신체적 고통으로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강렬한 고통에서 승화된 성욕을 찾아내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 사회적 삶을 바꾸기 위해선 사회적 장에 투여되는 욕망의 양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런 이론적 변환을 통해 ‘욕망’(성욕이 아니라)이 오히려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할 수 있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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