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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6부, 3. 라캉 : 정신분석의 언어학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6부, 3. 라캉 : 정신분석의 언어학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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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의 대상

 

 

라캉은 직업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는 미국식 정신분석학에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식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자아심리학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자아의 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즉 정신분석학을 구순기, 항문기, 성기기 등을 거쳐 하나의 표준적인 자아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대한 일종의 임상심리학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라캉은 이것을 한편에선 생물학주의에 의해, 다른 한편에선 행태주의에 의해 프로이트 이론의 고유한 정신이 훼손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나름의 비판적 입지점을 설정한 라캉은 프로이트 이론에서 생물학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나아가 프로이트 이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새로이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그는 레비-스트로스처럼 구조언어학을 끌어들입니다. 즉 구조언어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기초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슬로건을 자신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이럼으로써 그는 사실 일종의 소쉬르적인 프로이트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돌아가야 할 프로이트란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한 프로이트요, 무의식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 성숙기의 프로이트를 말합니다.

 

라캉이 말하는 성숙기프로이트는 결코 노년의 프로이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꿈의 해석이 씌여진 1890년대 말부터 1914년 정도까지의, 시기적으로 중기 프로이트라고 불릴 수 있는 때의 프로이트입니다. 그가 프로이트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취급하는 것은 꿈의 해석, 외에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년을 전후해 씌여진 저작입니다(무의식에서 문자의 심급, 혹은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 욕망이론). 이 시기의 프로이트는 의식/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됩니다(이처럼 어떤 이론 전체의 틀을 가장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개념의 관계 곧 위상으로 요약하는 것을 위상학이라고 하지요). 거시기(id)/초자아(super-ego)/자아(ego)라는 후기의 위상학은, ‘거시기라는 개념이 생물학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적극 받아들이지 않으며, 단지 그것’(ça)이란 말로 번역해 피해갑니다.

 

그러면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가 어떤 대상을 발견했기에 새로운 정신분석학이란 영역을 개척했다고 하는 걸까요?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무의식입니다. 그렇다면 무의식이란 무엇일까요? 라캉에게 그것은 하나의 생물학적 존재를 인간의 자식으로 변환시키는 메커니즘이며, 계속해서 인간의 아이로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 내부의 메커니즘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레비-스트로스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 금지를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문화로 넘어가는 고개요 문화성립의 결정적인 계기로 봅니다. 라캉에게서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게 바로 오이디푸스(Oidipous,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하는 시기)지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고 싶다는 욕구, 그것은 인간이 되기 위해 억압되어야 할 최초의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의 근친상간 금지지요. 욕구에 대한 금지란, 사실 인간이 따라야 할 가장 원초적인 규칙이요 법인 것이고, 오이디푸스적 욕망에 대한 금지를 통해 사회적 법과 규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지요. 그리고 바로 이처럼 사회문화적 규칙을 통해 욕구를 억압함으로써 무의식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이란 동물에겐 없으며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고 하지요. 이렇듯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라캉의 체계에서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것은 라캉에겐 무의식 자체에 대한 정의를 뜻하는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라캉의 무의식/오이디푸스 개념은 레비-스트로스의 근친상간 금지와 매우 유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타자의 담론, 무의식의 담론

 

 

다른 한편 라캉이 무의식을 파악하는 데서 전통적 개념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소쉬르 등의 구조언어학의 개념들과 이론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조차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이 그대로 배어 있는 것입니다만, 그 개념들을 사용함으로써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나 기존 프로이트주의자들의 정신분석학과는 전혀 다른 새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명제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신경증이든, 실수든, 농담이든, 꿈이든 대개 어떤 무의식이 드러난 것으로 간주합니다. 즉 그런 현상들은 무의식의 징후라고 하지요. 언어학 용어를 쓰면 개개의 징후란 무의식상의 어떤 의미를 표시하는 기표(S)를 뜻합니다. 무의식은 기의(s)인 셈이지요. 라캉은 이를 소쉬르와 유사하게 S/s로 표시합니다. 하지만 무의식의 기표는 기의를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기의를 이해하려면 그 기표(징후)를 다른 기표(징후)들과의 연관 속에서 해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기표들의 연쇄, 기표들의 관계 속에서 어떤 하나의 기표가 갖는 의미는 정해지지요. 하지만 이것은 무의식에 있는 어떤 궁극적인 기의를 표시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하며, Ss를 가르는 /는 무의식의 장벽을 뜻한다고 합니다.

 

 

 수태고지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와 리포 메니(Lippo Menni)가 그린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수태고지, 신의 아이를 잉태했음을 천사가 와서 알려주는 모습으로, 서양의 화가들이 무수히도 그렸던 장면이다. 마리아를 쳐다보는 천사 가브리엘의 시선도, 그걸 대하는 마리아의 시선도 뭔가 특별한 데가 있어 보인다. 그저 대상을 보는 평범한 시선과 달리 이처럼 남다른 시선을 사르트르는 응시’(gaze)라고 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의 얼굴을 응시하고, 그렇게 우리는 고통받는 인간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렇게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 와서 꽃이 되거나 고통이 된다. 나를 놀라게 하는 응시. 그 응시로 인해 인간은 얼굴을 갖게 된다. 쥐나 개에게는 얼굴이 없지 않던가! 마리아를 보는 천사의 응시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무어라 말하고 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이로써 마리아의 얼굴은 성모의 얼굴이 된다. 그리고 이제 마리아는 바로 천사의 그 응시 안에서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응시가 의식의 작용이고 지향성인 한, 우리는 응시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에 적응하려 하게 된다.

 

 

다른 한편 결합관계와 계열관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지요? 그게 바로 문장으로 언어가 조직되는 방식이라고 말입니다. “먹었어라는 말은 누가 무엇을 이란 말과 결합되며, 그 말이 표시되지 않은 경우에도 그것은 먹었어와 공존합니다. 이걸 야콥슨환유라고 하지요. 반면 무엇을 자리에 빵 대신 밥이나 물처럼 유사성을 갖는 말들이 대체 되며 선택되는 관계를 은유라고 한다고 했지요? 이처럼 결합관계와 계열관계를 통해 단어들은 문장으로, 언어로 조직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직하는 규칙이 언어규칙(소쉬르의 랑그)입니다.

 

프로이트는 꿈을 분석하면서 꿈의 작업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세 가지를 둡니다. 응축과 치환, 그리고 대리표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도 A의 모자를 쓰고, B의 옷을 입었으며, C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D의 이미지를 하고 있는 모습을 꿈 속에서 본 일이 있을 겁니다. 이처럼 여러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압축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응축(condensation)입니다. ‘치환’(displacement)의 예로는 성교가 피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사정이 눈물로 표현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대리표상은 싫다는 뜻이 자기가 싫어하는 동물인 뱀으로 나타나거나, ‘소원감이 멀리 떨어져 앉아야 하는 커다란 테이블로 나타나거나 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응축과 치환이라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이 앞서 언어학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꿈을 조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라캉에 따르면 꿈에서 응축은 유사한 여러 가지가 한군데 뭉쳐 나타나기 때문에 은유, 치환은 인접한 다른 기표를 빌려 나타나기에 환유라고 합니다.

 

이처럼 무의식이 표현되는 방식이나 그것이 조직되는 방식은 라캉이 보기에 언어적인 구조와 동일합니다. 이런 뜻에서 그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어학에서 보았듯이, 언어는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의미망을 가지고 있고,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려면 그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가야 합니다. 무의식 역시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나란 개인으로부터 독립적인 질서와 체계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무의식이란 타자(Autre)의 담론이라고 합니다. 결국 무의식이란 타자의 담론이라고 요약되는 이 질서가 개개인에게 내면화되는 메커니즘을 의미하며, 개개인이 질서로 편입되는 메커니즘을 의미합니다(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오이디푸스적 욕구의 억압을 통해 형성되는 무의식은 이렇듯 사회적 규범과 질서와 연관됩니다).

 

 

정신분석가는 여기서도 남근을 본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그림 대사들(Ambassadors)

두 사람이 선 발 아래, 그 둘 사이로 무언가 기이한 것이 그려져 있다. 무얼까?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하긴 워낙 유명한 그림이니까. 그래 맞다. 해골이다. 아직도 눈치를 못 챈 사람은 그림을 들어 썩은 오징어처럼 생긴 그 형상의 밑에 눈을 대고 책을 시선과 나란히 뉘여보라. 그럼 해골이 나올 것이다. 두 사람의 삶이 무상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을까? 그런데 라캉은 홀바인의 이 그림을 다시 기이하게 해석한다. 그것은 남근과 결부되어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물론 라캉 말대로 쪼그라든 남근에 해골 문신을 했다면, 그 남근이 발기한 경우 이처럼 해골의 형상은 길게 늘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보단 덜 하지만 시계를 늘어뜨린 달리의 그림에서도 그는 늘어진 남근을 본다. 알고 있겠지만, 위대한 정신분석가는 어디서나 이렇게 남근을 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해골의 형상을 눈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남근이기 때문이란다. 라캉은 사르트르와 달리 응시와 시선이 나란히 가는 게 아니라, 언제나 분열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응시는 시선이 깨어 있는 상태에선 소멸하며, 시선을 돌리는 순간 비로소 살아난다는 것이다. 응시는 언제나 남근을 향하고 있지만, 그것은 의식이 깨어 있는 한 거세의 형태로 소멸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선은 타자의 응시 안에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응시가 향한 것을 보지 못하며, 시선이 사그라들 때 응시는 자신이 찾는 것을 본다. 그런데 저 그림의 해골을 보지 못한 게 정말 그래서일까?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다. 그건 무의식에 의해 행해진 부인이어서, 의식이 깨어 있는 한 알지 못하는 사실이니까.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완벽하다! , 그런데 섹슈얼한 이미지를 항상 중의적으로 사용하는 광고를 보는 시선은 어떨까? “좀더 쎈 걸로 넣어주세요.”

 

 

무의식에 담긴 타자의 욕망

 

 

다음으로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desire)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몇 가지 다른 개념을 함께 알아야 합니다. 그는 욕망을 욕구(need), 요구(demand)와 구별합니다. 욕구는 식욕, 성욕처럼 가장 일차적인 충동입니다. 만족을 추구하여, 그걸 충족시켜 줄 대상을 찾고자하는 충동이죠. 이는 다른 사람에게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 대개는 사랑의 요구로 나타납니다. 거칠게 말하면 요구는 욕구를 표현한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요구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으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욕구가 그대로 표현될 수는 없습니다. 즉 어머니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지요. 한마디로 말해 요구는 사회적 질서와 언어적(상징적)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욕구는 언제나 요구를 통해서 표현되고 충족되어야 하기에 그 충족은 늘 불충분합니다. 즉 욕구와 요구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말입니다. 욕구와 요구 사이의 이 격차로 인해 욕망이 생겨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결핍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결핍을 메울 대상을 찾아나서지만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것이기에 또 다른 대상으로 끊임 없이 치환됩니다. 즉 대상이 끊임없이 치환되는 욕망의 환유연쇄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무서운 머리

-존스(Edward Coley Burne-Jones)의 그림 무서운 머리(The Baleful Head)

메두사의 머리는 하도 끔찍하게 생겨서 그것을 보는 자는 누구나 공포와 혐오로 얼어붙어 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페르세우스는 갈라온 메두사의 머리조차 안드로메다에게 직접 보여주지 못한다. 그랬다간 연인을 석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물에, 아니 거울에 비추어 보여준다.

라캉은 이처럼 실재계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고 한다. “실재계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거울에 비친 것을 보거나(상상계), 아니면 그것에 대해 언어로 표시한 것(상징계)만을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신경증 환자는 자신이 반복하는 이상한 행동의 이유를 자신도 알지 못한다. 정신분석가는 환자 자신도 모르는 그 실재, 미지수 X와 같은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 실재계의 대부분은 프로이트 말대로 성욕이나 남근과 결부되어 있다. 혹은 어머니에 대한 애시당초 불가능한 욕망과. 그러나 그것은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알 수도 없다. 환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분석하거나, 아니면 눈에 보이는 증상을 통해서 추정하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신분석가는 답을 알기 때문에, X가 무언지 언제나 쉽게 찾아낸다. 답을 알고서 방정식을 푸는 것은 사실 장난아닌가!

 

 

여기서 욕망은 생물학적인 충족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며, 다른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를 라캉은 음경’penis과 구분하여 남근phallus이라고 합니다)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정 욕망입니다. 예컨대 어머니를 욕망한다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남근임을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은 허용될 수 없으며, 계속 추구한다면 거세되리라는 위협 앞에서 꺾이고 만다고 합니다. 거세 콤플렉스를 통한 이러한 억압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욕망의 환유연쇄가 바로 인간의 무의식을 구성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무의식이란 타자(다른 사람, 사회적 용인, 사회적 질서)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정 욕망이란 거지요.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란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정의와 신의 복수는 죄인을 추적한다

피에르-폴 프뤼동(Pierre Paul Prudhon)정의와 신의 복수는 죄인을 추적한다(Justice and Divine Vengeance pursuing Crime)

푸코는 벤덤의 원형감옥에서 근대사회에서 작동하는 시선의 배치를 발견한다. 원을 그리며 늘어선 감방들이 있고, 그 원의 중심에 높은 감시탑이 있다. 가능하면 감방들의 저쪽 창에 빛이 잘 들어서 감방 안에 있는 수인(囚人)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잘 보이게 한다. 감시탑은 높이 솟아 있기에 탑에서는 앉아 있어도 감방들이 모두 잘 보이지만, 감방에서는 감시탑이 보이지 않는다. 즉 감시자가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볼 수 없다. 따라서 수인들은 언제나 감시자의 시선이 자기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아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이 감시자의 시선으로 자기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시선은 지향성이 담긴 응시도, ‘욕망이 담긴 응시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다. 규범과 법에 따라, 혹은 도덕에 따라 자기 신체를 규제하는 권력, 그런데 이런 시선의 배치는 단지 감옥처럼 감금된 공간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감옥에서 모델화되었지만, 이는 타인들의 눈이 있는 길거리나 광장처럼 개방된 곳에서도, 혹은 가족이나 아이들이 있는 자신의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이것이 왜 우리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가?”를 설명해 준다. 프뤼동의 위 그림에서처럼 심지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경우에도, 우리는 신이 그것을 지켜본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양심이란 그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나의 시선이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근대사회 전체가 감옥을 닮았다고 야유한다.

 

 

타자의 욕망 : 도둑 맞은 편지

 

 

이상의 이야기를 포의 소설 도둑 맞은 편지를 통해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라캉의 저작집이자 활동의 기록’(écrit)에크리Écris는 바로 이 소설에 대한 세미나로 시작하지요. 아시다시피 그 소설의 주 스토리는 왕비가 왕이 있는 자리에서 왕이 봐선 안 될 중요한 편지를 장관에게 도둑맞음으로써 시작하지요. 경시청장이 탐정 뒤팽에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왕비가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왕이 갑자기 들어오고, 왕비는 약간 당황하지만 그걸 책상 위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서처럼 그냥 펼쳐두지요. 물론 왕은 그 편지를 못 봅니다. 그리고 그 방에 들어왔던 눈치 빠른 장관은 비슷한 문서를 하나 책상에 펼쳐두고 설명하는 체 하다가 그걸 두고 대신 왕비의 편지를 가져가지요. 그렇지만 왕비가 그걸 저지할 순 없는 상황입니다. 이 편지로 인해 장관은 왕비를 이용해 권력을 키웁니다. 왕비의 요청으로 이 편지를 찾기 위해 경찰이 개입하여 장관의 집을 샅샅이 뒤지지만 편지를 찾지 못하고, 결국 탐정 뒤팽에게 사건을 의뢰합니다. 결과는 뒤팽이 그 편지를 찾아주고 현상금을 받는 거지요.

 

여기서 왕은 눈이 있으되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 눈치도 못 챕니다. 반면 왕비는 장관이 뻔뻔스레 편지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도 전혀 저지하지 못합니다. 장관은 왕비에게 편지를 가져간다는 것을 오히려 분명하게 알리고, 그걸 자신이 갖고 있음을 아는 왕비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합니다.

 

우선 편지가 ‘letter’라는 점을 주목합시다. 이 단어는 문자라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지요. 라캉이 보기에 이 letter는 언어적으로 짜여진 무의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통해 각지는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편지에 대한 각자의 관계로 인해,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왕, 편지를 못 보리라 생각하는 왕비, 하지만 그걸 알아보고 유유히 가져가는 장관의 위치가 정의됩니다. 각자가 서 있는 지점은 letter에 의해, letter에 대한 각자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외부에 있는 이 관계가 바로 타자며, 그걸 전달하는 편지는 타자의 담론인 것이죠. 이는, 못 찾는 경찰과 그걸 못 찾으리라 생각하는 장관, 하지만 그걸 유유히 찾아내 가져가는 뒤팽의 관계에서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이러한 반복은 이 관계들이 우연적이라기보다는 구조적임을 보여줍니다.

 

 

 거울 앞에서 누드를 그리는 화가

그래서 우리는 나의 행동거지가 타인의 눈에 드러나는 공간과 달리 그것을 프라이버시의 형태로 감추고 은폐할 수 있는 사적 공간에서 쉽사리 편안해진다. 더구나 아이가족도 없는 나만의 방이라면, 혹은 옷을 벗어버리고 욕망의 움직임에 몸을 맡겨도 좋은 내밀한 공간이라면, 하지만 푸코는 집요하게 거기서도 타인의 시선이, 그 시선을 대신하는 나의 시선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 시선의 주인공은 탑 위의 감시자가 아니라 의사다. 17세기에 기독교는 자신의 은밀한 욕망과 행위, 느낌까지 말하도록 했던 고해라는 장치를 통해, 신부의 시선으로 침실 안에서 자신의 신체를 보게 했다.

그런데 그 시선이 19세기에 이르면 의사의 시선으로 대체된다. 이를 위해 19세기 의사들은 어린이의 자위가 얼마나 육체와 정신에 해악을 끼치는지를 주장하고, 여성의 성욕은 자궁의 경련에 기인하는 히스테리(그리스어로 자궁을 뜻한다)의 일종임을 증명하며, 다양한 변태적 욕망과 도착적 행위들을 찾아내서 일종의 정신병으로 규정한다. 독일 의사 크라프트-에빙이 쓴 성의 정신병리학1870년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따라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성욕이 너무 빈번히 느껴질 때면 이거 병이라던데하며 자신의 신체를 보게 되고, 배우자가 이상한체위를 하자고 하면 저거 병이라던데하며 그의 신체와 욕망을 보게 된다. 이로써 건강을 염려하는의사의 시선이 내밀한 침실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에곤 쉴레(Egon Schiele)가 그린 위 그림 거울 앞에서 누드를 그리는 화가에서 모델은 화가의 시선을 위해 포즈를 취하며, 화가의 시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움직인다. 만약 저 화가를 의사로 바꾸기만 한다면, 그 시선 안에서 옷을 벗고 서 있는 모델이 바로 침실 안의 우리 자신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왕비가 편지가 도난당하는 걸 보고도 아무 말 못한 것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편지의 부재를 왕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장관이 그 편지를 눈에 보이게 도둑질 한 것 역시, 자신이 왕비의 약점을 쥐고 있는 존재며 왕비가 되찾고자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용해 장관은 왕비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이 별짓 다해가며 장관의 집을 뒤지고 편지를 찾는 것은 왕비가 욕망하는 것을 자신이 가져다 줌으로써 왕비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각자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갖고자 하며, 타자의 욕망의 대상임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letter남근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 점에서 언어적으로 구조화된 무의식을 타자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즈니랜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되는 보드리야르는 감옥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곳이 감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기 따로 있는 것이라고, 마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즉 허구적 환상 속에서 현실을 잊고 사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저기 따로 있는 것처럼, 그는 걸프전이 터졌을 때도 그것을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했다가 많은 진지한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아마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처럼 조작되는 무기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새로운 전쟁의 양상을 지칭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이란 그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그가 말한 것은 차라리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걸프전은 마치 전세계가 항상-이미 미국이 벌이는 잠재적 전쟁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기 따로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걸프만에 퍼부어지는 미사일을 보면서, 우리가 거기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지 않았는가! 7함대의 미사일과 폭격기는 언제든 어디로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도, 이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시뮬레이션이란 개념 또한 시선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대상을 보게 함으로써 일상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특별한 종류의 시선의 이름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 시선의 주인’, 그 시선의 발원지는 누구일까?

 

 

진리의 배달부, 그리고 주체화

 

 

앞서 타자는 편지를 통해 나의 위치를 지정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좋으나 싫으나 이미 지정된 내 자리인데, 이걸 굳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즉 왕비가 도둑질하는 장관을 그 자리에서 제지하고 질책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런 편지가 왕비에게 없으리라는 왕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됨을 뜻합니다. 즉 왕비로서 인정받아야 할 중요한 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맙니다. 따라서 이런 불행한 사태를 바라지 않는다면, 왕비는 편지로 인해 지정된 자리를 자기 자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왕으로부터 훌륭한 왕비로서 계속 인정받고자 한다면, letter가 지정하는 자리를 자기 내부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라캉은 에스(ES)라고 합니다. 독일어로서 흔히 이드로 번역되는 것이고 저는 거시기로 번역했던 게 이건데, 라캉은 그런 번역어들이 갖고 있는 생물학주의적 요소에 반대해 단지 그것’(ça)을 지칭하는 말로 그냥 사용하며, 또한 주체(subject)의 머릿글자를 뜻하는 에스(S)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왕비가, 타자(관계)가 지정하는 위치를 내 자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왕비로서 걸맞는 이상적인 상()에 자신을 동일시(identification)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왕비의 행동을 좌우하는 이상적인 상을 자아의 이상’(ego-ideal)이라고 합니다. 역으로 왕비의 행동은 이 자아의 이상에 동일시하는 것인 셈입니다. 즉 왕비가 소설 속에서 맡은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자아의 이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서죠.

 

앞서의 얘기로 도식을 설명하면, 대문자 타자(Other, 이를 큰 타자라고 합시다)는 왕비(me)의 자리를 지정합니다(meOther), 그리고 왕비는 왕비로서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이 큰 타자가 지정해 주는 자기 자리를 받아들입니다. 그 자리를 자기가 받아들임으로써 왕비는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SOther). 에스가 주체의 약자인 S를 뜻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욕구가 소외되는 것을 뜻하며, 이런 의미에서 결핍(빈자리)을 야기합니다(S0). 작은 타자라고 불리는 object(o)는 바로 이런 근원적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을 지시합니다.

 

이 빈자리를 채우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빈자리를 메울 욕망의 대상들(이 역시 작은 타자라고 부릅니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원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대상을 통해 욕망이 충족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대상의 치환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머물 수 없는 것이기에, 대상의 끊임없는 환유연쇄가 나타나지요.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치명적인 도둑질도 못 본 체 해야 했고, 때로는 경찰을 시켜 장관의 집을 뒤지게 하기도 했고, 때로는 장관의 요구를 싫어도 받아들여야만 했던 왕비의 태도를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다양한 모습들 각각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O me), 즉 그게 바로 라고 오인함으로써 타자에 의해 주어진 나의 자리(me)를 채워가는 거지요.

 

Es(S)   other(o)
 
   
me Other

 

 

큰 타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letter는 왕비를 주체화시킴으로써, 그리고 그것에 상응하는 다양한 대상들에 대한 왕비 자신의 동일시를 거쳐, 큰 타자가 애초에 지정한 자리에 배달된다고 합니다. So를 거쳐 이미 지정된 me의 자리에 배달된다는 거지요. 이로써 왕비는 전체 관계 속에서 자기에게 배정된 역할을 자신의 일로 알고 수행하게 된다는 겁니다.

 

 

 

 

 

야누스 라캉 :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

 

 

라캉의 이론은 레비-스트로스가 그렇듯이 주체나 인간이란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습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주체의 통일성이나 중심성을 해체하는 효과에 대해선 앞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라캉은 이런 해체 효과를 아주 멀리까지 밀고 갑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왕비는 자신의 자아의 이상을 획득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사실은 타자가 지정한 자리를 받아들입니다. 내 자리는 내가 아니라 타자가 지정하는 것이란 얘깁니다. 따라서 자아의 중심성은 거꾸로 타자의 중심성으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를 겨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예컨대 왕비는 편지에 대한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즉 내가 아니라 타자의 담론 속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서 있어야 할 곳, 즉 내가 존재해야 할 곳은 타자가 지정해 준 내 지점이지요.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타자가 생각하는’(지정하는) , 즉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즉 타자의 담론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캉이 보기에 혹은 자아라는 주체는 떤 중심성도 통일성도 갖지 않으며, 오히려 타자의 담론, 타자의 욕망으로서 의식의 결과물입니다. 즉 무의식이란 형태로 내면화된 체계와 구조의 결과요 효과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라캉의 출발점은 레비-스트로스와 방식으로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나아가 주체의 구성을 타자라는 구조의 효과로, 그 결과물로 본다는 점에서도 레비-스트로스와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라캉 역시 구조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라캉에게는 단순히 평가하기는 곤란하게 만드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즉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형성되는 무의식을 통해, 그 서의 체계 속에 편입됨으로써 개개인은 주체로 구성된다고 한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와 동형적입니다. 또한 그 결과 타자라는 이름의 체계가 하는 자리에 결국은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점에서도 구조주의적입니다. 편지는 목적지에 배달되리라는 라캉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미는 기표들의 작용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의미(signification)이란 기표들의 관계를 통해 기표들이 기호(sign)로서 를 갖게 되는 것 의미화(signification) 을 뜻합니다. 기표들 그러한 관계들이 성립되기 이전에 기표들의 의미(기의)는 어느 하나로 정되지 않으며, 이런 점에서 기표는 기의 밑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 미끄러지기만 한다면 의미작용은 물론 기호를 한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게 될 겁니다. 여기서 라캉은 고정점’(point capiton)이란 개념을 도입합니다.

 

고정점이란 말 그대로 기의를 고정함으로써 기표의 미끄러짐을 시키는 점을 말합니다. 원래는 의자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쿠션을 capiton이라 하고, 그것이 튀어나오도록 속을 넣고 고정시킨 지점을 point de capiton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말을 하고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그 문장 안에 있는 기표들의 의미는 고정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 고정점입니다. 즉 마지막 기표와 마침표를 통해 기호들의 연쇄가 매듭지어지고 기호의 의미는 고정됩니다. 마치 배가 닻을 내림으로써 잠시나마 그 위치가 고정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를 정박점’(anchoring point)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호가 의미작용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차라리 의미작용을 통해서 기호의 의미가 고정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고정점의 기능은 잠정적입니다. 그것은 고착된 것이 아니라 잠시 고정된 것이고, 따라서 뜯어서 다시 변경할 수도 있는 것이며, 기표연쇄의 항들을 변경시킴으로써 의미의 흐름이 다른 것으로 고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표의 의미작용이 갖는 이러한 잠정성은, 의미를 언어(랑그) 전체에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는 구조주의의 입장과 매우 상이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라캉은 분명히 말합니다. 언어에 대해, 다양한 기호연쇄들에 대해 하나의 잣대로 작용하는 기준은 없다고 말입니다. 어떤 기호연쇄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그 기호연쇄의 의미를 결정해 주는 메타언어’(야콥슨)는 없다고 합니다. 이는 야콥슨의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모든 언어에 공통된 어떤 잣대를 찾아보려는 야콥슨의 시도와 분명하게 구분선을 긋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점들로 인해 라캉은 포스트구조주의자’ ‘탈구조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들은 구조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대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탈각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라캉이 타자란 개념을 통해 주체를 구성해내는 방식에 특징적인 것을 간략히 언급하겠습니다. 첫째는 주체를 구성하는 타자란 바로 질서를 의미하며, 이는 언제나 단수/대문자(Other)로 쓰인다는 것, 그리고 이 타자(질서)의 외부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질서를 벗어나 사람을 사고하는 일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무의식의 형성 메커니즘이 질서의 체계에 대한 동일시로만, 즉 타자가 지정한 자리를 자기 걸로 동일시하는 것으로만 이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의 것과 이를 합하면, 모든 사람이 결국은 기존의 질서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동일시한다는 것, 거기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주체를 구성하는 타자가, 질서의 체계가 오직 아버지-어머니-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 내부에서만 정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라캉의 이론은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들에게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알튀세르나 크리스테바(J. Kristeva), 혹은 라클라우(E. Laclau)처럼 라캉의 개념이나 이론적 틀을 직접적으로 원용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보드리야르처럼 사회적 현상을 기호적 현상으로 소급해서 파악하는 흐름 전체가 라캉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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