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변하는 것이 사랑
노나라 임금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바닷새에게 해주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바닷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처음부터 알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바닷새는 노나라 임금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속내를 표현합니다. 불행히도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를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닷새가 자신을 버리고 날아갈 위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닷새를 읽으려는 절박함이 약해진 거죠. 바닷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임금이 해주지 않자, 임금의 곁에서 몸이 떠나지는 못하지만 생명을 다함으로써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닷새의 비극적인 죽음은 바닷새의 마지막 자유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선녀가 내려오자 나무꾼이 선녀가 입고 왔던 옷을 숨깁니다. 여기서 옷은 자유를 상징하죠. 선녀 옷을 빼앗긴 선녀는 종묘에 갇힌 바닷새와 같습니다. 선녀 옷을 입은 선녀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했는데, 나무꾼은 선녀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 사랑을 얻으려 했던 겁니다. 나무꾼은 불완전한 사랑이자 폭력과 비극이 예견되는 사랑을 택한 셈이죠. 사랑이 힘든 것은, 양쪽 다가 주인이고 양쪽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자유와 자유가 만나는 팽팽한 긴장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건 상대방이 가장 자연스럽게 어떤 강요도 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라는 이야기도 성립되는 셈이죠.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 ~ 1980)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강조한 것도 바로 이겁니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는 『에티카(Ethica)』에서 타자를 만나면 우리에게 두 가지 감정이 든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기쁨, 하나는 슬픔. 기쁨이란 타자로 인해 내 삶이 상쾌해지는 느낌,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코나투스(conatus)’, 즉 삶의 자유가 증진되는 느낌을 말하죠. 반대로 슬픔은 사는 것이 고욕으로 느껴질 정도로 삶이 버거운 느낌, 코나투스가 위축되는 느낌입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단순합니다. 기쁨은 지키고 슬픔은 제거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따르기는 생각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사회생활을 생각해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와 동료가 있어도 우리는 회사에 출근합니다. 슬픔을 주는 타자와 함께하니, 우리 삶은 점점 무거워지죠. 그래서 우리는 슬픔이든 기쁨이든 감정 자체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무감각의 전략인 셈입니다. 그래서 사실 타자를 만나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타자를 만나도 사실 ‘만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만나되 만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만난 사람은 거의 없는 셈이죠.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택시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식당에서 물리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의 감정도 슬픔의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심지어 귀가해 남편을, 아내를, 딸을, 아들을 봐도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아내를, 남편을, 딸을, 아들을 만난 것 같지만 만나지 않은 겁니다. 내 감정에 기쁨이나 슬픔이 일어야 내가 만난 타자를 타자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왠지 경쾌해지는 날, 그럴 때 그 바람이 기억에 남듯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 기억에 남아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게 기쁨을 주었거나 슬픔을 준 경우죠. 그 타자는 사람일 수도 있고, 꽃이나 풍경이나 음식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고 구름일 수도 있습니다.
노나라 임금도 바닷새를 ‘만난’ 겁니다. 바닷새가 기쁨과 함께 그에게 날아든 거죠, 지금까지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들을 포함해 수많은 새들을 만났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으니 무심하게 그것들을 스쳐 지나갔다고 할 수밖에요. 그런데 이번에 그는 바닷새를 제대로 만났습니다. 그 바닷새가 날 아들자 기쁨도 함께 날아왔으니까요. 그 기쁨을 포기할 수 없어서, 기쁨을 주는 존재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서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를 데리고 온 겁니다. 문제는 바닷새에게 노나라 임금과의 만남은 슬픔이었다는 것이죠. 그 슬픔은 종묘에 갇히면서 더 심화됩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 그리고 궁중음악도 바닷새의 코나투스를 더 감소시킵니다. 불행히도 임금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자명한 진리,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상대방의 코나투스를 증진시켜주지 못하면 상대방은 나를 떠나가거나 죽어갈 겁니다. 그렇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를 보기 싫어하는 것까지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가 사라지는 것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각오가 없으면 사랑은 비극으로 귀결될 테니까요. 그럴 각오까지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버리는 것쯤 못 할까요? 나 자신이 송두리째 죽고, 내가 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것을 유지하고 내가 강하게 유지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 아닙니다. 바닷새가 사흘 만에 죽자 노나라 임금은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이 그리 아껴주었는데 왜 죽었을까를 생각하며 슬피 울었겠죠. 여기에 기괴함이 있습니다. 자신이 죽게 만들고서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라고 탄식할 테니까요.
인용
목차 / 1. 철학을 위한 찬가 / 3. 소유하라 당신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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