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네
손약 이야기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준 큰 박 씨를 심었더니 거기서 다섯 섬이나 담을 수 있는 박이 열렸다네. 거기다 물을 채웠더니 너무 무거워 들 수가 없었지. 쪼개서 바가지를 만들었더니, 깊이가 얕고 납작해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네. 박이 놀랄 정도로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무용하다고 생각해 깨뜨려버렸네.”
惠子謂莊子曰: “魏王貽我大瓠之種, 我樹之成而實五石. 以盛水漿, 其堅不能自擧也. 剖之以爲瓢, 則瓠落無所容. 非不呺然大也, 吾爲其無用而掊之.”
장자가 말했다. “여보게, 자네는 큰 것을 쓸 줄 모르는군.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약을 손에 바르고 무명을 빨아서 탈색하는 일을 대대로 해왔다네. 어떤 이방인이 그 말을 듣고, 금 일백 냥을 줄 터이니 약 만드는 비방을 팔라고 했지. 그 사람은 가족을 다 모아놓고 의논하기를 ‘우리가 대대로 무명을 빨아 탈색시키는 일을 했지만 기껏해야 금 몇 냥밖에 만져보지 못했는데, 이제 이 약의 비방을 금일백 냥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팝시다’라고 했다네. 그 이방인은 오나라 임금에게 가서 그 비방을 가지고 유세를 했지.
莊子曰: “夫子固拙於用大矣. 宋人有善爲不龜手之藥者, 世世以洴澼絖爲事. 客聞之, 請買其方百金. 聚族而謀曰: ‘我世世爲洴澼絖, 不過數金. 今一朝而鬻技百金, 請與之.’ 客得之, 以說吳王.
마침 월나라 임금이 싸움을 걸어오자, 오나라 임금은 그 이방인을 수군의 대장으로 삼았다네. 결국 그 이방인은 겨울에 수전을 벌여 월나라 군대를 대패 시켰다네. 오나라 임금은 그 사람에게 땅을 떼어주고 영주로 삼았지,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동일했는데, 한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었고 다른 쪽은 그것으로 무명 빠는 일을 면하지 못한 것은 사용한 바가 달랐기 때문이지. 자네는 어찌하여 다섯 섬을 담을 수 있는 박으로 큰 술통을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놓고 즐길 생각을 못 하고, 깊이가 너무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만 걱정하는가? 자네는 아직도 ‘쑥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 「소요유」
越有難, 吳王使之將. 冬, 與越人水戰, 大敗越人, 裂地而封之. 能不龜手一也, 或以封, 或不免於洴澼絖, 則所用之異也. 今子有五石之瓠, 何不慮以爲大樽而浮乎江湖, 而憂其瓠落無所容? 則夫子猶有蓬之心也夫!”
‘쓸모’에 관한 혜시와 장자의 논쟁
2,500년 전 장자가 살았던 중국 전국시대나 21세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나 쓸모없는 것들, 쓸모없다고 낙인찍힌 것들의 삶은 팍팍하고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아주 높이 솟은 둥그런 원기둥 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죠. 중심부에서 계속 밀려 외곽에 이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천길 낭떠러지로 떠밀린다고 말입니다. 원기둥 가장자리, 생과 사가 갈리는 날카로운 곳에 서서 쓸모없는 것들을 아파하고 보듬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버려졌다고 외로워하는 그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바로 그가 장자 입니다. 그렇다고 장자가 좌절한 사람들이 흘리는 절망의 눈물을 무기력하게 닦아주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의 절망과 함께하지만, 장자는 심각한 그들 앞에서 해맑게 웃으며 말합니다. 당신들은 세계가 둥그런 원기둥이라고, 그래서 밀리면 추락해 죽는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파국을 미리 예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 아니냐고 장자는 미소와 함께 희망을 말합니다. 원기둥 가장자리는 절벽이 아니고, 그 바깥도 낭떠러지가 아니라고, 자신이 서 있는 육지에서 보면 저 먼 바다는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 같지만 직접 가보면 절벽이나 낭떠러지 같은 것은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쓸모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의 가장자리, 나아가 쓸모의 논리가 무력해지는 그 바깥은 억압과 지배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쓸모없기에 이제 더 이상 지배자들로부터 쓰이지 않으니까요. 쓸모없음이 그에게 가장 쓸모 있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입니다. 체제가 우리 삶을 써서 소진시키지 않으니 이제 우리가 우리 삶을 향유하면 됩니다. 거목 이야기에서 장자가 강조했듯, 거목은 쓸모가 없어 잘리지 않았기에 거목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겁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가 설파한 무용의 철학입니다. 무용은 처음에 우리를 절망시킬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나아가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희망이 되니까요. 바로 이 순간 지적 라이벌이었던 혜시는 장자의 생각을 논박합니다. 혜시의 입장은 나무를 비유로 쉽게 설명됩니다. 거목이 쓸모가 없었기에 거목으로 자라기도 하지만 이는 특이한 사례일 뿐이고, 대개의 경우 아무런 쓸모가 없다면 나무는 바로 잘리고 만다는 것이 논박의 핵심입니다. 장자는 혜시의 반박을 무력화해서 무용의 철학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그 전말이 「소요유」 편에 등장하는 하나의 이야기에서 펼쳐집니다. 바로 ‘손약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혜시가 자신의 경험을 장자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위(魏)나라(BC 403 ~ BC 225) 임금이 준 큰 박 씨를 심었더니 거 기서 다섯 섬이나 담을 수 있는 박이 열렸다네. 그런데 거기다 물을 채웠더니 너무 무거워 들 수가 없었지. 쪼개서 바가지를 만들었더니 깊이가 얕고 납작해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네. 박이 놀랄 정도로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무용하다고 생각해 깨뜨려버렸네.” 먼저 혜시는 커다란 박의 쓸모없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어서 그는 아무리 커도 무용하면 부수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거목 이야기의 거목도 이제 무사할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엄청난 크기의 박처럼 거목은 무용하기에 바로 파괴될 수 있으니까요. 손약 이야기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목 이야기마저 부정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만든 이야기니까요. 자신이 만드는 이야기니 혜시의 반박쯤은 그냥 없는 듯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장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모든 비판으로부터 무용의 가치를 옹호하려는 장자의 지적인 정직함과 투철함, 무용하고 좌절한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반드시 불어넣어야 한다는 그의 간절함과 애정이 그만큼 빛나는 대목입니다. 혜시의 반박에 맞서기 위해 장자는 물 닿는 일을 해도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이라는 흥미로운 사례를 가져옵니다. 혜시와 장자의 논쟁을 다룬 이 이야기를 손약 이야기라고 명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텍스트주의 vs 콘텍스트주의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으로 무명을 빨아 탈색하는 일을 대대로 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이 터본 적이 있으세요? 손이 트면 물이 닿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튼 손에 물이 닿으면 엄청 쓰리고 아프니까요. 빨래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겠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의 힘으로 손이 트지 않으니, 추운 겨울에도 그는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이방인이 빨래하는 사람을 찾아와 그 비법을 금일백 냥에 팔라고 제안합니다. 이방인은 손이 트지 않는 약을 보고, 그것을 겨울 전투에서 수군이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송나라 사람은 지금까지 그 비법의 힘으로 빨래를 해서 금 몇 냥만을 벌어 왔을 뿐입니다. 금일백냥을 준다는 말에 마침내 그는 이방인에게 비법을 팝니다. 이방인은 비법을 들고 오(吳)나라(BC? ~ BC 473)로 떠나죠.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그 오나라입니다. 고사처럼 오나라 최고의 라이벌은 월(越)나라(BC? ~ BC 334)였죠. 전쟁이 반복되면서 적개심은 두 나라 군주뿐만 아니라 두 나라 사람들 내면에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두 나라 사람들은 같은 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적대시했습니다. 남중국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두 나라의 전쟁은 주로 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이 가져온 손이 트지 않는 약은 두 나라 사이의 팽팽한 전력에 불균형을 가져옵니다. 오나라 수군 대장이 된 이방인은 그 비법으로 겨울 수전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오나라 수군들이 손이 트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전과였죠. 전승의 공으로 이방인은 오나 라의 영주가 됩니다. 손이 트지 않는 약은 똑같은데, 한 사람은 그것으로 여전히 무명 빠는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으로 영주가 된 셈입니다. 손이 트지 않는 약을 빨래할 때 사용한 것과 수전에 사용한 것의 차이 때문입니다.
손약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장자 사유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문맥주의 혹은 맥락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 콘텍스트주의(contextualism)입니다.
제자백가 대부분이 텍스트(text)에 집중했을 때, 장자만이 콘텍스트(context)에 주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서양은 본격적으로 콘텍스트주의를 숙고하게 되죠. 모두 비트겐슈타인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젊은 시절의 주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의 의미는 세계를 지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강력한 텍스트주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 성숙해지면서 그는 콘텍스트주의자로 변합니다. 이때의 주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라는 책에서 그는 “언어의 의미는 쓰임[use]에 있다”고 말하니까요. 동일한 말이라도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따라, 혹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신혼 시 절에 아내가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사랑해”라고 말할 때, 결혼한 지 10년 된 남편이 출근하며 문 앞에서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때, 너무나 무거운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미소를 지으며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때 등등. 동의어를 생각해보세요. 첫 번째는 “잠시 헤어지는 것도 안타까워”가 될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다녀올게”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동의어는 “먼저 세상을 떠나 미안해요”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은 똑같지만 그 문맥은 매우 상이하죠. 마지막 문맥에서의 “사랑해”라는 말을 첫 번째나 두 번째 문맥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일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쓰임’을 뜻하는 ‘유즈(use)’를 강조할 때 장자가 같은 뜻의 ‘용(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손 트지 않는 약, 즉 손약이 “사랑해”라는 말과 같은 위상에 있다면, 송나라의 문맥과 오나라의 문맥, 혹은 빨래하는 문맥과 수전을 치르는 문맥은 “사랑해”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세 가지 문맥과 위상이 같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처럼 어느 문맥에 놓이느냐에 따라 손약도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손약 이야기에서 장자는 자신의 문맥주의적 입장을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동일했는데 한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었고 다른 쪽은 그것으로 무명 빠는 일을 면하지 못한 것은 사용한 바가 달랐기 때문이지”라고 요약합니다. 여기서 송나라 사람이 텍스트에 집중하는 사유를 상징한다면, 그 송나라 사람에게 비법을 사서 오나라의 영주가 된 이방인, 즉 객(客)은 콘 텍스트주의자를 상징합니다. 텍스트주의자와 콘텍스트주의자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송나라 사람에게 손약은 빨래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밖에 없습니다. 반면 이방인에게 손약은 빨래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전을 할 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죠. 우리는 왜 송나라 사람이 손약 비법을 이방인에게 팔 수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송나라 사람은 확신했을 겁니다. 이방인이 비법을 사서 송나라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처럼 빨래를 해서 돈을 벌 것이라고 말이죠. 만약 이방인이 비법을 사서 송나라 사람 옆에서 빨래하는 일을 한다고 했으면, 그는 결코 비법을 팔지 않았을 겁니다.
문맥은 오직 하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주의가 모든 문맥과 무관한 텍스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텍스트주의의 핵심은 하나의 문맥만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송나라 사람을 보세요. 그에게는 손약이 빨래하는 데만 사용되는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로 주어집니다. 오나라도 월나라도 그리고 제나라도 심지어 한반도도 그에게는 송나라와 질적으로 같은 세계일 뿐이죠. 그래서 텍스트주의는 ‘문맥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문맥 단수주의라고 해야 합니다. 반면 콘텍스트주의는 ‘문맥이 다양하다’는 것을 긍정합니다. 문맥 단수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콘텍스트주의를 ‘문맥 복수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죠. 이방인은 손약이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최소 두 가지 문맥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다른 문맥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문맥이나 해산물을 채취하는 문맥, 겨울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문맥도 있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손약의 발견 혹은 발명으로 새로운 문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송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손약은 겨울에도 가능한 빨래 산업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혹은 겨울 바다에서 조업을 가능하게 해서 북쪽의 추운 지역 바닷가에 어촌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고층 건물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만들어지지만, 역으로 엘리베이터 때문에 새로운 고층 건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맥 복수주의와 함께 문맥 생산주의는 콘텍스트주의의 두 날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혜시의 반박에 장자가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장자는 손약 이야기로 혜시를 송나라 사람과 같은 텍스트주의자, 즉 문맥 단수주의자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박은 무언가를 담는 데에만 사용되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의 박은 다섯 섬이나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컸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습니다. 물을 담아 나르기에는 두께가 너무 얇아 곧 깨지고 말 것 같았고, 쪼개서 바가지를 만든다 해도 너무 평평해 바가지로 쓸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혜시는 자기 박이 무용하다고 판단했고 파괴해버린 겁니다. 여기서 장자는 박은 물 등 액체를 담을 수도 있지만 물 위에 띄울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박은 그릇이 될 수도 “큰 술통으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놓고 즐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장자는 혜시의 마음을 “쑥의 마음”, 즉 ‘봉지심(蓬之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쑥은 땅바닥에 딱 붙어 있는 풀입니다. 송나라 사람에게 손약과 빨래가 문맥상 뗄 수 없이 밀착되어 있듯, 혜시에게 박은 물 등을 담는 것이라는 문맥에 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땅에 붙어 있는 쑥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이렇게 무용하다면 파괴될 수 있다는 혜시의 반론은 해체되고 맙니다. 무용하 다는 큰 박은 사실 무용하지 않았으니까요. ‘무용하다면 파괴된다’는 혜시의 말이 옳다고 전제하고, 장자는 지금 무용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파괴해도 좋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죠.
간혹 체제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쓸모의 형이상학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폐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신을 쓸모없게 만드는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절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의 문맥주의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복수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이죠. 문맥에 따라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는 법”입니다. 자신이 쓸모 있어지는 다른 문맥을 찾을 수 없다면, 자신이 쓸모 있어지는 문맥을 만들어도 됩니다. 그만큼 장자의 문맥주의는 강력합니다. 일리(一理)가 있다는 말! 이것은 문맥주의자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죠. 거목이 쓸모가 없어서 거목으로 자랄 수 있었다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커다란 박이 강이나 호수에 띄운 큰 술통으로 쓰이면 파괴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일리가 있죠. 그렇지만 장자의 일리가 개체들의 삶을 긍정하는, 혹은 개체들이 자기 삶을 향유해야 한다는 그의 이념을 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혜시가 큰 박을 무용하다고 여겨 부수거나 세상 사람들이 재목이라고 나무를 자르는 것에도 장자가 일리 있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무용과 유용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더 근사한 문맥을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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