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쓸모없어 좋은 날
거목 이야기
남백자기가 상(商)의 언덕에서 노닐다 거대한 나무와 마주쳤는데, 그 나무는 특별한 데가 있었다. 말 네 필이 끄는 수레 천 대를 매어놓아도 그 나무의 그늘은 수레들 모두를 가릴 만했으니까.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나무인가? 이것은 반드시 특별한 재목일 것이다!”
가느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구부러져 있어서 들보나 서까래로 만들 수 없고, 그 거대한 뿌리를 내려다보니 속이 푸석푸석해서 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잎사귀들을 혀로 핥으면 입 안이 헐어 상처가 생기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람들을 사흘 동안이나 미쳐 날뛰게 할 것 같았다.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재목이 아닌 나무여서 이렇게 거대한 나무로 자랐구나. 아! 신인(神人)도 그래서 재목이 아니었던 거구나!” 「인간세」 13
南伯子綦游乎商之丘, 見大木焉, 有異: 結駟千乘, 隱, 將芘其所藾.
子綦曰: “此何木也哉! 此必有異材夫!”
仰而視其細枝, 則拳曲而不可以爲棟梁; 俯而視其大根, 則軸解而不可以爲棺槨; 舐其葉, 則口爛而爲傷; 嗅之, 則使人狂酲三日而不已.
子綦曰 “此果不材之木也, 以至於此其大也. 嗟乎, 神人以此不材.”
‘쓸모’의 위험
장자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거짓일 수 있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실제 추한 것일 수 있고, 좋다고 믿었던 행동이 사실 가장 해로운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장자는 매력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상식과 통념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장자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나는 거죠. 그렇다고 장자를 마냥 외면하기도 힘듭니다. 상식과 통념을 흔들기 위해 장자가 만든 이야기들은 부정하기 힘든 리얼리티와 함께 묘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그것은 장자의 이야기들 대부분이 반례(counter-example)와 같은 성격을 갖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날개는 조류(鳥類)가 하늘을 날도록 해준다는 통념을 생각해볼까요. 이럴 때 장자는 타조나 펭귄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날개에 대한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로서는 짜증 나는 일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장자는 “잘도 그러겠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 삐딱선을 타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장자를 배척하기도 어렵죠. 어쨌든 타조의 날개는 타조가 달릴 때 균형추가 되고, 펭귄의 날개는 수영할 때 방향타가 되니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자가 날개의 진정한 본질은 균형추나 방향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자는 단지 모든 날개의 본질은 나는 데 있다는 통념을 부정할 뿐입니다.
장자가 기러기의 날개는 기러기를 날게 해준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그의 속내입니다. “모든 X의 본질은 Y다”라는 주장과 믿음에 전제되어 있는 ‘모든’이라는 발상과 ‘본질’이라는 개념, 바로 이것이 장자가 의심하는 표적입니다. 무엇 때문에 장자는 우리가 가진 통념을 삐딱하게 보는 것일까요? 모든 날개의 본질은 날게 하는 데 있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이 펭귄을 보고 있다고 가정해볼까요. 분명 그 사람의 눈에는 펭귄이 날개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열등한 새로 보일 겁니다. 한마디로 펭귄을 우스꽝스럽게 본다는 겁니다. 펭귄은 우스꽝스럽거나 열등한 새가 아닙니다. 날아다니는 것이 먹이를 잡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남극 대륙에서 날개로 헤엄치는 펭귄은 가장 멋지게 살아가는 조류니까요. 결국 장자의 삐딱한 사유를 받아들이면 우리의 생각은 획기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조류를 인간의 생각으로 재단하여 그들에게 가치의 우열을 부가하지 않을 테니까요. 기러기나 독수리는 멋진 새이고 타조나 펭귄은 우스꽝스러운 새라고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타조만큼 기러기도, 기러기만큼 타조도, 펭귄만큼 독수리도, 독수리만큼 펭귄도 모두 당당한 삶의 주체니까요.
장자의 이야기들 대부분은 우리의 통념을 해체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중 우리 뒤통수를 제대로 때리는 것은 ‘쓸모없음’, 즉 ‘무용(無用)’을 찬양하는 이야기들일 겁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쓸모[所用]’나 ‘쓸모 있음[有用]’을 지고한 가치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유용의 형이상학자입니다. 그래서 유용이 우리 삶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장자의 삐딱한 사유가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치열한 경쟁 시대였습니다. 경쟁은 패권을 다투던 국가들의 군주들이 주도했습니다. 군주들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재 등용에 혈안이 되었고, 인재를 찾기 위해 명예와 권력 그리고 부를 약속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인재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인재의 논리가 지배적이자, 무용을 부정하고 유용만을 추구하는 사회적 통념이 만들어집니다. 그러자 장자는 그답게 “잘도 그러겠다”고 딴죽을 겁니다. 경쟁과 인재의 논리는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강력한 이데올로기죠. 아니, 유용의 형이상학은 더 확대되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전국시대 경쟁과 인재의 논리는 주로 지배계급에만 국한되었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니 말입니다. 심지어 배 속의 태아마저 이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을 정도지요.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유용의 형이상학이 과거보다 더 힘을 발휘하니, 장자의 딴죽도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거대하게 자란 나무의 비밀
『장자』 외편과 잡편에도 유용의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지금은 내편 「인간세」 편에 등장하는 원형적인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거목 이야기입니다. 주나라 이전 중국을 지배했다는 상(商)나라(BC 1600 ~ BC 1046)의 유적지에 남백자기라는 사람이 유람차 들렀나 봅니다. 이곳에서 남백자기는 거대한 나무를 보게 됩니다. 얼마나 거대하냐 하면 말 네 필이 끄는 수레 천 대가 그 나무 그늘 안에 다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남백자기는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이 나무는 이렇게 거대하게 자랄 수 있었을까?’ 나무는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더 인간 문명이나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재료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철재나 시멘트가 있지만, 과거에는 나무가 돌과 함께 거의 유일한 건축자재였습니다. 돌은 다루기 힘든 자재이니, 아마 나무는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된 자재였을 겁니다. 그러니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이 나무는 어떻게 잘리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잘리지 않아 이렇게 크게 자랄 수 있었으니 이런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물론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깊은 산속이나 오지에 있다면 나무는 잘리지 않고 크게 자랄 수 있죠. 그러나 남백자기가 본 거대한 나무는 상나라의 중심지 근처에 있었습니다. 도시는 목재를 많이 필요로 하는 법이죠. 그러니 잘리지 않은 이 거대한 나무는 그야말로 미스터리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남백자기는 거대한 나무의 비밀을 알아냅니다. 거목은 인간들이 재목으로 쓸 수 없는 나무였던 것입니다.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재지목(不材之木)이 바로 거목이 거목으로 살아 있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죠. 거목 이야기에는 거목이 재목으로 부적절했던 구체적인 이유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느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구부려져 있어서 들보나 서까래로 만들 수 없고, 그 거대한 뿌리를 내려다보니 속이 푸석푸석해서 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잎사귀들을 혀로 핥으면 입안이 헐어 상처가 생기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람들을 사흘 동안이나 미쳐 날뛰게 할 것 같았다[仰而視其細枝, 則拳曲而不可以爲棟梁; 俯而視其大根, 則軸解而不可以爲棺槨; 舐其葉, 則口爛而爲傷; 嗅之, 則使人狂酲三日而不已].” 가지, 본체, 뿌리, 심지어 잎사귀마저 인간에게 전혀 쓸모가 없었으니, 이 나무는 그야말로 잎 한 장마저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이죠. 남백자기는 이로부터 삶의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도 쓸모가 없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전쟁과 살육이 일상이었던 전국시대를 무사히 건너려면 인간은 쓸모가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남백자기가 말했던 신인(神人)은 바로 이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칼과 창이 난무하는 곳에서 전혀 피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정말 신과 같은 사람, 즉 신인이라 불릴 만한 사람 아닌가요.
거목 이야기에서 쓸모가 있다는 것, 재목이 된다는 것은 바로 죽는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쓸모가 있어야 잘 산다는 통념이 위태로워지는 대목이죠. 살아 있는 나무를 지붕을 받치는 기둥으로 쓴다고 상상해보세요. 나무가 자라면서 집이 무너지고 말 겁니다. 원래 설계대로 집을 유지하려면 목재는 형체를 그대로 유지해야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목재는 일체의 능동성이 사라지고 완전한 수동성의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른 나무를 곧바로 목재로 쓰지 않고 잘 건조시키죠. 건조하지 않으면 목재는 외형의 자발적 변형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나무는 잘린 다음 건조 과정까지 거쳐야 인 간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목재가 됩니다. 인간의 의지와 욕망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완전한 수동성의 상태에 있는 것이 목재라는 이야기죠. 결국 목재가 된다는 것은 나무 입장에서 한 번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죽고 또 죽어, 생명의 힘뿐만 아니라 자발적 변화마저도, 즉 최소한의 능동성마저 완전히 소멸되는 과정이 나무가 목재가 되는 과정이니까요. 거목 이야기가 우리에게 서늘함과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재목이 되면, 그러니까 인재가 되면 우리의 능동성이 증대하여 우리가 더 자유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자신을 쓸모 있게 만드는 노력이 자신의 능동성을 강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살의 길로 이끄니 말입니다.
남에게 쓸모 있는 길을 갈 것인가
나무든 사람이든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개체는 재목으로 부적절합니다. 그러나 나무가 목재가 되는 것과 인간이 인재가 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나무가 목재로 쓰일 수 있는 이유는 나무가 동물에 비해 운동성이 적기 때문이지만, 가축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재로 쓰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동물 특유의 운동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운동성이 없다면, 말이 힘이 없다면, 우리는 말을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무거운 것을 끄는 수단으로 쓰지 않을 겁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성과 힘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적용되는 인재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에 등장하는 주인과 노예 개념이 도움이 됩니다. 주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고, 노예는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노예를 제대로 쓰려면 노예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하나는 육체적으로 강건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죽여야 만들어지는 목재와는 달리, 사람을 죽여야 인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이 노예에게서 착취하려는 것은 그의 노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않아도 쓸모가 없는 것이 노예인데, 죽은 사람은 노예를 만들 수조차 없는 법이죠.
목재와 인재의 공통성을 생사 여부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수동성과 부자유에서 찾아야 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만이 그 타인에게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강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는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노예든 현재의 임금노동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나 돈을 주는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물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는 메커니즘은 다릅니다. 강제로 잡혀 와 주인이 원하는 재능을 강제로 익히는 노예화의 과정은 주인 후보자들이 원하는 재능을 자발적으로 익혀 스스로 자신을 파는 과정과는 구별되니까요. 그렇다고 임금노동자가 노예보다 더 낫지 않냐고 속단하지 마세요. 타율적 복종이든 자율적 복종이든 복종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요.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먹고살 길이 있기에 주인의 감시를 피해 탈출하려는 노예가 그나마 나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도망가지 않습니다. 물론 특정 자본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지만, 임금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반드시 제 발로 다른 자본가를 찾아가야 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새로운 자본가에게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어필할 겁니다. 먹이를 얻으려고 “저는 튼튼하고 일을 잘하니 부려 주세요”하며 찾아온 기묘한 말이 바로 임금노동자인 셈입니다. 과거의 노예나 말에게 임금노동자는 미친 노예나 혹은 미친 말로 보일 겁니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특정 회사는 떠날 수 있다고, 그래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책과 교재, 즉 북(book)과 텍스트(text)의 차이를 생각하면 인재의 논리가 우리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내가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이 책이라면, 남이 읽어야 한다고 강요해서 읽는 것이 바로 교재입니다. 책은 하품을 유발하지 않지만 교재는 하품을 넘어 졸음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책은 읽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반면 교재는 읽기 싫어도 봐야 합니다. 시험도 봐야 하고, 그 결과가 진학이나 취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니까요. 교재는 나의 재능을 입증하는 관문인 셈이죠. 그러니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가깝게는 성적과 스펙, 최종적으로는 취업을 위한 수단입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읽는 책과 자신을 통제하는 혹은 통제할 타인을 위해 읽는 교재는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거리만큼 다릅니다. 책이 사라지고 교재만 남았다면, 이제 정말 주인의 삶은 꿈꾸기 어렵게 된 겁니다. 남에게 쓸모 있는 길을 가느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돌볼 여력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과거 중국의 전국시대도 현재 자본주의 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재가 되지 않으면 굶어 죽고, 인재가 되면 살아도 죽은 것과 진 배가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도 죽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해도 죽은 것이라면, 같은 말이지만 쓸모가 없어도 베이고 쓸모가 있어도 베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체제를 떠나서도 살 여지가 있었던 시절, 아니 그럴 용기가 있었던 장자의 시절, 신인(神人)이 아직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한 날입니다. 쓸모없어 좋은 날, 그날은 언제쯤 올까요?
인용
5. 소인의 힘 소인의 권위 / 7. 허영 애달파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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