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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5장 근대의 완성,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건방진방랑자 2022. 1. 10.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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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근대의 완성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변혁의 세기인 18세기에 프랑스의 추락은 역력했다. 세기 벽두에 에스파냐 왕위를 놓고 겨루었다가 그 왕위만 얻고 다른 모든 것을 잃은 프랑스는 이후 거듭된 전쟁에서도 좀처럼 형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서유럽 국가가 아닌 이교도국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으며 애썼으나 별무신통이었다. 결국 신흥국 프로이센에마저 추월할 지경에 이르렀고, 영국과 한 세기에 걸쳐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맞붙은 결과 모두 패배했다. 이제 프랑스는 이류 국가로 전락했다. 비록 미국의 독립을 지원함으로써 영국에 다소나마 앙갚음을 했지만, 중세 내내, 그리고 근대의 문턱에서도 서유럽의 선두 주자이자 터줏대감이던 프랑스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사실 프랑스가 추락한 원인은 서유럽의 터줏대감이었다는 데 있다. 중세 문명(로마-게르만 문명)의 적통을 이어받은 프랑스는 서유럽 사회가 안정되었을 때는 힘을 썼지만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칠 때는 가장 발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위그노 전쟁에서 신교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톨릭으로 선회한 것만 해도 그랬다. 1689년 낭트 칙령을 폐지한 것은 루이 14세의 개인적인 취향이라기보다는 당시 프랑스 지배층의 수구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그 때문에 프랑스의 상공업을 장악한 신교도들이 대거 국외로 망명함으로써 이미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에 프랑스의 국력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록 에스파냐에 부르봉 왕조의 분점이 하나 생기기는 했으나 그것은 프랑스의 국력에 보탬이 된 게 아니라 유럽의 보수성을 대변하는 가톨릭의 두 나라가 공동으로 추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루이 14세는 다섯 살에 즉위했지만 72년이나 재위하는 바람에 아들과 손자가 모두 먼저 죽었다. 프랑스의 몰락과 더불어 가문의 몰락도 본 셈인데, 아직 부르봉 왕가의 수명은 좀 더 남아 있었다. 그의 증손자로 왕위를 계승한 루이 15(1710~1774, 재위 1715~1774)도 증조부처럼 다섯 살 때 왕위에 올랐고 증조부에 버금갈 만큼 오래 재위했다. 하지만 그의 치세 60년 동안 프랑스는 내내 추락하면서도 오히려 보수화의 추세는 더욱 강해지는 희한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안으로 점점 곪아갔고, 문제는 쌓여갔다.

 

 

학문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발전하게 마련이다. 학문이란 문제를 추구해 답을 알아내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면 학문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문제로 가득한 18세기 프랑스에는 그만큼 답을 찾아내려는 노력도 많았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진 만큼 그 노력은 극히 다양했으나 전부 프랑스가 처한 어둠에 빛을 던지려는 처방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으므로 크게 계몽주의(enlighternment)라고 부른다.

 

이렇게 계몽주의는 사회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여기에는 지성적인 배경도 있었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에는 사회문제도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고 해결도 교회에 맡길 수 없었다. 그래서 계몽사상가들은 신앙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힘과 그 이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인간 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다. 종교의 시대인 중세에도 후기에 접어들면 이성의 존재가 인정되었지만 이성은 올바른 신앙의 길을 닦기 위한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인간 정신의 모든 영역을 신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성 역시 신의 의지에 종속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이성의 독립성을 부각시켰고, 종교개혁은 신의 통제력을 축소시켰다. 이로써 신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지닌 근대 이성이 탄생했다. 그래서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문구를 근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쉽게 말하면 이제 인간은 신의 의지에 종속된 존재에 불과한 게 아니라 스스로 역사를 발전시킬 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도 모든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 되었고, 국가적으로도 교회의 조언이 필요 없어졌다. 그래서 계몽사상은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한창 각개약진 중인 유럽의 군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가 계몽사상에 매료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변방이라면 몰라도 유럽의 중심인 프랑스는 사정이 달랐다. 많은 계몽사상가가 나왔고 그에 따라 많은 계몽책이 제안되었으나 정작 프랑스의 지배층은 요지부동이었다. 볼테르는 철학 콩트 <캉디드(Candide)>에서 인간 정신이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프랑스 사회의 보수적 신분제도를 꼬집었지만, 프랑스의 지배층은 그의 비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그의 저서를 금서로 지정했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에서 법이란 인간 이성의 산물이며 입법·사법·행정의 3권이 분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이 15세는 그에게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의 자격을 주자는 의견마저 묵살했다. 그러니 루소(Jeon-Jacques Rousseau, 1712~1778)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에서 주권이란 사회 내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을 때, 주권은 곧 왕권이고 왕권은 신이 내린 것이라고 믿은 루이 15세의 강력한 제재를 받은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루소는 저서가 금서 처분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체포장이 떨어지는 바람에 국외로 달아나야 했다.

 

 

동료인 루소의 처지를 목격한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와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nbert, 1717~1783)합법적인테두리 내에서 계몽 활동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사업은 백과전서(Encyclopédie)를 간행하는 것이었다. 모든 지식을 집대성해 계몽사상의 올바름을 증명하자!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지식인 160명이 집필진으로 참여한 백과전서1751년부터 21년간 편찬되어 1772년에 총 33권으로 완간되었다. 그러나 이미 첫 두 권이 출간될 때부터 당국의 금서 처분을 받았다우연의 일치일까? 마침 비슷한 시기에 중국 청 제국에서도 대규모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사업이 있었다. 청 황제 강희제의 명령으로 학자들이 동원되어 1725년에는 1만 권짜리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완성되었으며, 건륭제(乾隆帝) 시절인 1782년에는 당대의 모든 서적을 집대성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간행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조선의 정조(正祖)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서적 출간에 큰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보면 18세기 후반은 가히 세계적으로 지 식 운동이 활성화된 시기였다고 할까?. 이제 프랑스에서는 합법적인 활동이란 없었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자유마저 탄압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프랑스 체제의 위기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오로지 지배층만은 그 점을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갈수록 자유로워지는 데 반해 체제는 여전히 자유를 옥죄려 했다. 그것은 분명한 구체제, 즉 앙시앵 레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상의 측면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사상을 낳은 사회 자체에 있었다. 계몽사상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한 문제는 무엇보다 사회적 불평등과 특권층의 존재였다. 당시 프랑스의 총인구는 약 2700만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퍼센트도 되지 않는 성직자와 귀족들은 면세의 특권을 누렸고 전국 토지의 10분의 1을 소유했다. 이런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프랑스가 한창 대외적으로 팽창하던 루이 14세의 전성기에는 큰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 15세의 시대에 프랑스의 대외 정책이 연달아 실패하면서 왕실 재정마저 달리는 상황이 되자 숨어 있던 문제는 곧장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부는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국채를 무모하게 발행했는데, 그런 미봉책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그래도 루이 15세는 수를 다하고 죽었으니 개인적으로는 불운하지 않았다. 1774년 그의 손자로 왕위를 계승한 루이 16(1754~1793, 재위 1774~1792)5대조 할아버지(루이 14)부터 누적되어 온 프랑스의 모든 문제를 혼자 걸머져야 했다. 그는 무능하고 타락했던 할아버지에 비해 선량하고 신앙심이 두터워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수줍고 심약한 성격에 사냥이나 즐기는 인물이었으니 난세의 군주로서는 빵점짜리였다.

 

 

살롱의 사상가들 17세기부터 프랑스에서는 귀부인들이 여는 살롱이 크게 유행했다. 물론 사교에만 치중하는 살롱은 오늘날의 싸롱처럼 천박한 문화의 공간이 되기도 했지만, 제도권 내로 흡수되지 않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이는 고급 살롱은 학문과 예술, 나아가 정치 토론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그림은 18세기 중반의 유명한 조프랑 부인(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의 살롱인데,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 등 프랑스의 계몽주의 3총사가 모두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중심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평민들의 세상

혁명은 전쟁을 부르고

국제전으로 번진 혁명전쟁

죽 쒸서 개 준 혁명

유럽의 황제를 향해

유럽 민족주의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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