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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4.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대붕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4.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대붕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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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

대붕 이야기

 

 

북쪽 바다(北冥)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이 붕()이다. 붕의 등도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 바다 방향으로 여행하려고 마음먹는다. ()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于南冥. ()

 

물이 두껍게 쌓이지 않으면, 그 물은 큰 배를 실어나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하게 된다. 한 사발의 물을 바닥의 움푹한 곳에 부으면, 갈대는 그곳에서 배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에 큰 사발을 띄우려 한다면, 그것은 바닥에 붙어버릴 것이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충분히 쌓이지 않으면, 그 바람은 커다란 양 날개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새는 구만리를 날아올라 자신의 밑에 바람을 두었을 때에만 자신의 무게를 바람에 얹을 수 있고, 등에 푸른 하늘을 지고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없게 된 다음에야 남쪽으로 향하는 자신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培風; 背負靑天而莫之夭閼者, 而後乃今將圖南. ()

 

메추라기가 그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는가? 나는 위로 날아오르지만 얼마 오르지 않고 곧 다시 내려오며, 대부분 수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며 지낸다. 이것 또한 완전한 날기[飛之至]’인데, 그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는가?” 소요유1, 2, 5

斥鷃笑之曰: “彼且奚適也? 我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翶翔蓬蒿之間, 此亦飛之至也, 而彼且奚適也?”

 

 

은 어떻게 이 되었나

 

장자라는 방대한 이야기책에도 당연히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 본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장자의 편집자는 고민했을 겁니다. 첫 번째 이야기가 장자의 전체 운명을 결정할 테니까요. 시시하지 않아야 하고, 나아가 독자의 흥미도 자극해야 합니다.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아야 하고요. 또한 앞으로 읽을 모든 이야기의 기본적인 방향을 암시하기도 해야 합니다. 결과론적으로 장자의 편집자는 첫 이야기를 잘 선정했죠. 장자를 본격적으로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장자 하면 누구나 대붕(大鵬)’이나 대붕의 자유를 연상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장자의 첫 번째 편인 소요유를 시작하는 이야기는 바로 대붕 이야기입니다. 대붕 이야기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다른 이야기와 달리 대붕 이야기에는 유사한 내용이 중 복되거나 앞 구절을 부연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대붕 이야기를 최초로 기록한 사람이 그 이야기에 주석을 붙인 것 같은데, 그것이 편집자의 손에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불행히도 장자의 편집자는 원래 이야기에 덧붙여진 주석을 도려내지 않습니다. 아마 그는 장자를 경전처럼 생각한 탓에 자신이 입수한 자료에 메스를 대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붕 이야기를 일종의 소설로 보면,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는 주석 부분은 금방 도려낼 수 있습니다. 방금 읽어본 대붕 이야기에 등장하는 생략기호는 그 결과물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 이제 본격적으로 대붕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죠. 북쪽 바다에 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살고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크기가 수천 리나 된다고 하니 곤은 정말 거대한 물고기죠. 이 곤이 변해서 동일한 크기의 거대한 새가 됩니다. 바로 이 새가 붕()입니다. 문제는 붕은 새가 되었어도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다가 움직일정도의 거대한 바람이 불지 않으면 붕은 남쪽 바다 방향으로 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붕은 그만큼 거대한 새였죠. 마침내 기다리던 거대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붕은 그 바람을 타고 올라 하늘에 걸린 구름 같은양 날개를 움직여 남쪽 바다 방향으로 비행을 시작합니다. 마침내 붕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붕이 된 것입니다. 곤이 붕으로 변하고 진정한 대붕이 되어 창공을 날 때까지 세 단계를 거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로는 거대한 물고기인 곤의 단계, 둘째로는 거대한 새가 되었지만 아직 창공을 날 수 없는 붕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는 창공을 실제로 날게 된 대붕의 단계. 흥미롭게도 대붕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둘째 단계에서 셋째 단계로의 변화, 그러니까 날지 못하던 붕이 바람을 타고 날면서 진정한 대붕이 되는 과정에만 신경 쓰기 쉽습니다. 사실 대붕 이야기 전체도 이 과정을 묘사하는 데 지면을 대부분 할애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붕 이야기의 진정한 매력을 온몸으로 느끼려면, 우리는 곤이 붕으로 변하는 첫 번째 과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 번째 과정을 묘사하는 구절은 그 내용의 엽기성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매우 무미건조하고 짧습니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도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여기서 우리는 변해서 새가 되었다로 번역되는 화이위조(化而爲鳥)”라는 네 글자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곤은 붕이 된 것일까?’ 의문을 갖자마자 다른 의문들이 이어집니다. ‘물고기는 그냥 저절로 새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의지를 가지고 새가 된 것일까?’ 붕이 대붕이 되는 두 번째 과정, 즉 바람을 기다리고 그것을 타려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곤은 새가 되려는 의지를 가졌고 마침내 새가 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독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다른 의문이 저절로 생깁니다. ‘왜 곤은 새가 되려 했던 것일까?’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 Wittgenstein, 1889 ~ 1951)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의 세계는 불행한 사람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불행에서 벗어나려 할 것입니다. 행복해지려고 말입니다. 곤은 불행한 물고기, 정확히는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아는 물고기였던 것입니다. 곤은 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을까요? 아마도 해답의 실마리는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곤은 아주 커다란 물고기여서 자신이 살고 있는 북쪽 바다가 너무 좁았던 겁니다. 북쪽 바다를 중국 북쪽 바이칼호(Lake Baikal)라고 상상해보세요. 실제로 기원 전후 중국 사람들은 이 거대한 호수를 북해(北海)’라고 불렀으니까요.

 

 

 

 

 

타자의 세계로 이끄는 바람

 

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너무 답답하고 갑갑했습니다. 북쪽 바다가 충분히 넓어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었다면 곤은 불행하지도 않고 다른 세계를 꿈꾸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곤이 붕이 되는 과정을 상상해보도록 하죠. 분명 곤은 얕은 물에 잘못 들어갔다가 물 밖으로 밀려 나오기도 했을 겁니다. 물고기로서는 매우 불쾌한 경험이지요. 처음 경험한 대기의 느낌도, 바람의 움직임도 낯설기만 할 테니까요. 물 바깥의 바람을 우연히 접한 대부분의 작은 물고기들은 두려움을 느끼며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려 할 겁니다. 바람은 낯선 세계,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타자의 세계를 상징하니까요. 당연히 곤도 가급적 물가 근처에서는 헤엄치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럴수록 운신의 폭이 더 좁아지고, 자기 세계의 협소함이 더욱 뼈저리게 다가오겠죠. 불행한 곤은 자신도 모르게 물 바깥을 보는 일이 많아집니다. 바람에 출렁이는 표면은 물 바깥에 북쪽 바다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럴수록 북쪽 바다에서의 삶은 더 갑갑하고 더 답답해지겠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곧은 물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어 드넓은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유혹이었고, 자기가 사는 북쪽 바다가 작다는 것을 알려주는 죽비 같은 것이었죠. 이제 상상해보세요. 물에 반쯤 잠긴 채 별빛이 비처럼 쏟아지는 밤하늘을 응시하는 거대한 물고기를,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는 섬처럼 고독한 곤이라는 물고기를 말입니다.

 

이제 곤이 새가 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은 한 걸음이면 족합니다. 바람이 건네는 손을 잡고 비좁지 않은 곳으로 날아가려면 새가 되어야 하니까요.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곧은 마침내 붕이 됩니다. 불행한 세계에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는 각오가 물고기로서의 곤을 죽이고 새로서의 붕을 탄생시킨 겁니다. 이제 온몸이 물 바깥에 있어야 편하고, 오히려 물 안이 불편하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붕은 아직 완전한 대붕은 아닙니다. 마치 날지 못하는 오리처럼 물에 떠 있거나 물가를 거닐 뿐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붕이 마음껏 바람을 맛보며 창공을 응시하게 되었다는 점이죠. 제대로 대붕이 되려면 붕은 대붕의 세계를 얻어야 합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붕은 물속 세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창공의 세계도 아닌 애매한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에서는 나왔지만 북쪽 바다 전후좌우로 높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죠. 물고기가 새가 되었지만, 협소한 세계에 사는 것은 곤이었던 시절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너무나 좁아서 거대한 붕이 날아오르기에 충분한 이륙 거리를 확보하기도 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직으로 비상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수천 리 크기의 날개는 산에 가로막혀 날갯짓 한번 제대로 하기도 힘드니까요. 붕은 곤이었던 시절보다 더 안타까운 갑갑함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새가 되었는데 날지도 못하니까요. 불행의 세계는 아쉽게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곤이 사라지면서 그의 불행은 끝나지만, 붕과 함께 새로운 불행의 세계가 탄생한 겁니다. 이번에도 불행에 대한 자각은 행복에의 의지를 기르게 됩니다. 붕은 마침내 날 수 있는 희망을, 물가를 탈출할 수 있는 희미한 길을 찾아냅니다. 생략된 주석 부분에 등장하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오르는 거리가 구만리다[搏扶搖而上者九萬里]”라는 표현은 붕이 대붕이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번에도 바람입니다. 처음 곤이 붕이 되도록 유혹했던 것이 바람이었듯, 지금도 바람은 행복의 세계로 인도하는 동아줄입니다. 붕은 알게 됩니다. 살랑살랑 깃털만 날리는 바람이 부는 경우가 많지만, 잠시 동안이나마 강한 바람이 몰아치는 때도 있다는 것을요. 거대한 나무들을 풀처럼 흔드는 강한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은 산맥에 부딪혀 찢어지고 다시 합류되며 강한 상승기류를 만들기도 합니다. 바로 이걸 타야 합니다. 그래야 날개 밑에 자신을 띄울 바람을 충분히 모을 수 있습니다. 마치 물이 충분히 쌓여야 큰 배가 뜰 수 있듯 말입니다. 마음껏 날개를 휘저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려 해도 붕은 반드시 상승기류를 타 야 하죠. 얼마나 실패했을까요? 상승기류가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었을 테고, 혹은 충분한데도 상승기류를 제대로 타지 못할 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붕은 대붕이 됩니다. 회오리바람을 제대로 타 구만리 상공에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이죠. 이제 그 무엇도 대붕의 비행을 막을 수 없습니다. 단지 그의 위로는 푸른 하늘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불행한 세계는 끝나고 행복한 세계가 시작됩니다. 이제 수천 리나 되는 자신의 크기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닌 솜털처럼 가벼운 것이 됩니다. 갑갑함과 답답함 대신 시원함과 상쾌함이 대붕의 몸을 감싸죠. 곤이 죽어 붕이 탄생하고 붕이 대붕이 되는 과정은 이렇게 완성됩니다. 이미 그리고 벌써 대붕은 우리 곁을 떠나갔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날갯짓이 만든 바람 소리만이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가 불행하다는 것을 직면할 만큼 용기가 있느냐고.

 

 

 

 

 

바람을 따를 것인가, 피할 것인가

 

대붕 이야기는 자유를 말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붕의 자유에는 묘한 데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날지 못하고 바람을 기다리는 대붕의 모습에 무언가 한계와 제약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떠받치는 바람이 옅어지면 대붕은 언제고 추락할 수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물론 이 경우 대붕은 비행고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대붕은 이전보다 더 힘차게 날갯짓을 해야 할 겁니다. 바람이 금방 두꺼워지지 않으면 대붕은 언제고 다시 추락할 수 있습니다. 대붕이 날갯짓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대붕의 이미지는 뭐든 할 수 있고 거침이 없어야 자유로운 것이라는 통념과는 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대붕 이야기가 메추라기를 등장인물로 캐스팅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메추라기는 말합니다. “나는 위로 날아오르지만 얼마 오르지 않고 곧 다시 내려오며, 대부분 수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퍼덕거린다고 말이죠. 메추라기는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날갯깃에 의지하여 납니다. 세속적 통념에 따르면 메추라기야말로 자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날고 싶으면 날고 날기 싫으면 날지 않기 때문이고, 올라가고 싶으면 날아오르고 내려가고 싶으면 하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추라기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당당히 선포합니다. 자신의 비행도 완전한 날기[飛之至]’, 즉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말입니다. 대붕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메추라기가 자유로운 것일까요? 대붕과 메추라기의 자유를 구별할 때, 곤이나 붕이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는 표현이 그 실마리가 됩니다. 여기서 수천 리의 크기는 상징적으로 독해해야 합니다. 내가 크다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협소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협소한 세계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작게 만들어 협소한 세계에 적응할 것인가. 전자가 곤이나 붕이 꿈꾸던 자유였다면, 후자는 메추라기가 선택한 자유였죠. 자신이 수천리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했다면 곤은 그냥 작은 물고기처럼 살았을 겁니다. 당연히 붕이 될 필요도 없죠. 이 경우 곤은 메추라기처럼 됩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온다네! 유유자적 한가로이 헤엄치는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주어진 세계가 삶을 더 옥죈다면, 그럴 수록 자신을 작게 만들면 됩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자유를 느꼈던 사람들도 그렇게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래도 나는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방귀를 뀌고 싶을 때 시원하게 뀐다. 이 또한 자유 아닌가!” 그래서 바람이 중요한 겁니다. 바람은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상징, 협소한 세계 밖에는 타자가 있다는 상징이니까요. 곤은 바람을 통해 더 큰 세계를 꿈꾸었고, 붕은 바람을 타고 더 큰 세계로 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큼에 어울리는 세계를 선택하려는 겁니다. 반면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면 메추라기는 자기 둥지로 돌아갈 겁니다. 물론 자기를 더 작게 만들면 둥지도 그리 작게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메추라기의 자유가 정신승리의 자유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메추라기는 바람을 타고 올라 자신이 어디까지 날 수 있는지 확인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바람을 타려는 대붕과 바람을 피하려는 메추라기! 대붕 이야기는 바로 이 두 캐릭터를 충돌시키면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바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바람을 피할 것인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협소한 세계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협소한 세계보다 더 작게 만들 것인가?

 

이제야 우리는 대붕 이야기의 진정한 신스틸러(scene stealer)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람입니다. 철학적으로 바람은 내 세계의 협소함을 폭로하는 타자를 상징합니다. 타자와 함께하면 나의 세계는 커지고 그만큼 나도 커질 겁니다. 사랑이 아니어도 타자나 타자적 사건과 마주친 사람이 얼마나 커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 과거의 나나 협소했던 세계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죠. 아니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겁니다. 곤으로 있던 그 갑갑한 곳으로 대붕이 어떻게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바람을 느꼈고 바람을 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대붕 이야기가 사실 바람 이야기이고, 장자가 바람의 철학자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자는 바람의 이미지로 사유했던 거의 유일한 철학자입니다. 그래서 아마 장자편집자는 장자를 여는 첫 번째 이야기로 대붕 이야기를 선정했을 겁니다. 반면 기존 체제와 기존 질서를 옹호했던 철학자들은 바람 이미지보다는 다른 안정적인 이미지를 선호합니다. 대표적으로 논어옹야(雍也)편에서 공자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고 이야기합니다. 산만큼 바람에 동요되지 않는 것도 없으니까요. 심지어 동양 의서(醫書) 황제내경(黃帝內經)마저도 (), 즉 바람을 모든 병의 시작이라고 저주합니다. 그래서 찬바람을 맞아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죠. 한마디로, 풍을 맞지 않으려면 집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학이란 항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장자라면 다르게 이야기하겠지요. 겨울에 따뜻한 방에만 머물면 몸은 약해질 거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긍정하며 뛰어놀라는 거죠. 그럼 우리 몸은 더 강건해지리라는 겁니다. 물론 한두 번의 감기나 몸살은 각오해야만 하죠.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3. 소유하라 당신의 삶을 / 5. 소인의 힘 소인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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