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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1. 철학을 위한 찬가, 내가 밟은 땅만 남기고 모조리 파낸다면 본문

책/철학(哲學)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1. 철학을 위한 찬가, 내가 밟은 땅만 남기고 모조리 파낸다면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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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밟은 땅만 남기고 모조리 파낸다면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이루어진 것이 사회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 혹은 상명하복을 당연시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장자의 사유는 불온하기 이를 데 없죠. 그렇다고 해서 장자가 현실 지배체제를 전복시켜야 한다고 선동하지 않으니 그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기도 곤란합니다. 탄압을 받으면 장자는 말 타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면 그뿐입니다. 부국강병에 혈안이 된 국가들이 일심동체로 장자를 공격해도 장자는 국가와 국가 사이로 숨어 들어가면 그만입니다. 영토국가가 완성되기 전이었기에 국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이 있었으니까요. 흔히 ()’라고 불리는 곳들입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야만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상명하복 체제가 작동하지 않는 인간적인 사회, 군주와 같은 지배자가 없는 사회였습니다. 결국 당시는 장자의 입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던 겁니다. 그래서 선택된 전략이 장자의 사유는 우리 삶에 필요가 없다는 쓸모없는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흑색선전입니다. 장자는 이런 이념 공세에 맞설 필요가 있었습니다. 황천 이야기가 들어 있는 외물편의 일화는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혜시(惠施, BC 370? ~ BC 309?)라는 철학자의 무례한 도발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보다 나이가 약간 많다고 추정되는 혜시는 논리학으로 무장한 형이상학적 사유와 함께 탁월한 현실적 정치 감각으로도 유명했던 동시대 최고 지성이었죠. 장자를 보면 혜시와 논쟁하는 일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장자의 사유가 혜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예리해진 게 아닌가 하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어쨌든 장자는 혜시의 도발에 재기발랄하게 대응합니다. 일단 자신의 철학이 쓸모가 없다는 혜시의 말을 주저 없이 수용해버립니다. 혜시로서는 기대하지 않은 반응이었을 겁니다. 이어서 장자는 쓸모없음이 곧 인문학적 사유, 혹은 좁혀서 철학적 사유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라고 이야기하죠. 쓸모 있는 사유란 결국 국가나 자본 등이 요구하는 사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해주는 사유야말로 쌀이 나오고 밥이 나오는사유, 즉 쓸모 있는 사유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인간의 사유는, 국가나 자본을 위한 사유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인간이 스스로 수행하는 사유여야만 합니다. 당연히 국가나 자본은 어용사유(御用思惟)가 아닌 인간의 사유에 무용하다는 딱지를 붙일 겁니다. 그러니 장자는 자신의 사유가 무용하다는 비난을 긍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용지식, 어용사유, 다시 말해 쓸모 있는 사유라고 해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사유를 포괄할 수는 없습니다. 억압체제에서 벗어나 살아갈 방도가 없다 보니 불가피하게 배우고 수행하는 것이 쓸모있는 지식이자 쓸모 있는 사유일 테니까요.

 

어용지식과 어용사유는 생계만을 위한 것이죠.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는 인간적 가치들에 대해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경제학만으로, 법학만으로, 통계학만으로, 전자공학만으로 그리고 의학만으로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사유하고 사랑을 근사하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할 겁니다. 쓸모없는 사유는 쓸모 있는 사유보다 더 포괄적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쓸모 있는 사유가 쓸모없는 사유를 아무리 폄하하고 은폐하려 해도 쓸모없는 사유는 결코 은폐되거나 폄하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설득하기 위해 장자는 근사한 이야기를 하나 만듭니다. 혜시에게 들려준 황천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선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발 디딜 만큼의 땅입니다. 지금 밟고 있지 않은 땅은 그가 서 있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요. 여기서 장자는 사유 실험을 하나 제안합니다. 쓸모 있는 땅, 즉 밟고 있는 땅을 제외하고 지금 밟고 있지 않은 땅을 저 지하 가장 깊은 곳 황천까지 파내보자는 겁니다.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으니 없애도 지장이 없는 것 아니 나는 말이죠. 자신이 발 디디고 있던 쓸모 있는 땅을 제외하고 쓸모없는 모든 땅을 없애버린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수천, 수만 킬로미터 높이의 대나무 꼭대기에 서 있는 형국이 되겠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람은 현기증을 느끼고 저 깊은 황천까지 추락하고 말 겁니다. 그가 밟고 있던 작은 땅, 그 쓸모 있다던 땅 마저 휑하게 비어 쓸모가 없어지는 아이러니는 이렇게 발생합니다. 마침내 장자는 역설합니다. 이렇게 쓸모없음은 알량한 쓸모 있음이나마 가능하게 하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어쩌면 쓸모없음이 쓸모 있음보다 더 쓸모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인용

목차 / 프롤로그 / 2. 사랑의 비극을 막는 방법

장자 / 타자와의 소통

장자, 무용의 철학자

내가 밟은 땅만 남기고 모조리 파낸다면

쌀도 밥도 안 나오는 일들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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