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가 『효경간오』에 준거로 삼은 텍스트는?
그런데 주희는 뜬금없이 갑자기 어주(御注)의 금문에 의존치 아니하고 고문효경을 텍스트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상투적인 통용본 텍스트를 버리고 무엇인가 더 오리지날한 텍스트에 의거하여 간오(刊誤)작업을 하겠다는 주자의 자세는 높이 살 만하다.
그런데 과연 주자가 고문효경이라는 오리지날 테스트를 두 눈으로 본 것인가? 그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앞에서 주희가 『효경』의 경문(經文)을 만들기 위하여 제1장부터 제7장까지를 하나로 뭉뚱그리면서 각 장의 앞에 원래 있던 ‘자왈(子日)’을 두 개 빼버려야 한다고 했는데, 만약 주희가 고문 텍스트를 기준으로 했다면 그것이 두 개가 아니라 여섯 개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사소한 하나의 실례이다. 자세하게 『효경간오』 텍스트와 고문『효경』 텍스트를 비교해보면 그 외로도 많은 차이가 난다. 금문효경과 고문효경의 가장 큰 차이가, 금문에는 없는 규문장(閨門章)이 고문에 있다는 것인데, 주희는 규문장이 있는 텍스트를 쓰고 있다【주희는 규문장을 전(傳) 12장으로 집어넣었다】. 과연 주희가 본 텍스트는 고문일까, 금문일까?
주희의 『효경간오』가 준거로 삼은 텍스트는 한마디로 족보가 불확실한 엉터리 텍스트이다. 이 엉터리 텍스트는 어디서 왔을까?
주희는 송대의 선배학자 사마광(司馬光, 쓰마 꾸앙, Sima Guang, 1019~1086)【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불린다】을 존경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한 구법당(舊法黨)의 영수였으며, 매우 보수적인 정치성향과 학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사마광은 일찍이 『효경』의 정치사적 중요성을 간파했다. 그리고 『효경』에 대한 주석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미 『어주효경』이 금문에 바탕하고 있었고 그것에 기초한 주석들은 꽤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마광은 고문효경 텍스트에 의거하여 주석작업을 하려 했다.
사마광이 볼 수 있었던 텍스트는 당시 어떤 것이 있었을까? 오대시대(五代時代, 907~960)【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의 혼란을 거치면서 이미 정주금문(鄭注今文)과 공전고문(孔傳古文)이 망일(亡逸)되었다는 것은 이야기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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