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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삼강행실도』 다이제스트 언해본의 등장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5장 조선왕조 행실도의 역사 - 『삼강행실도』 다이제스트 언해본의 등장

건방진방랑자 2023. 3. 3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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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행실도다이제스트 언해본의 등장

 

 

그러나 330설화의 한문본 삼강행실도3() 3()으로 그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대량으로 인출(印出)하여 대중에게 보급하기가 힘들었다.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동국여지승람등 각종의 문화서적을 편찬하여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또 도학이념에 충실하면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새로운 사림세력에 의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성종(成宗)삼강행실도의 민중보급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세종삼강행실도를 만든 것은 훈민정음 반포 이전의 사건이었다. 따라서 성종은 삼강행실도를 간략화시키고 그것에 언해를 첨가하여 포퓰라 다이제스트(popular Digest)판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경기 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구체화된다. 박승질이 임지로 떠나기 전에 하직인사를 하며 말한다(성종 20[1489] 61일 기사).

 

 

신이 근년에 상을 당하여 시골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백성이 자기 부모와 더불어 서로 힐난하며 사는 자도 있고, 또 형제가 서로 불화한 자도 보게 됩니다. 주상께서 이루어놓으신 태평성세에 이와 같은 풍속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마땅치 못한 일입니다.

臣近年遭喪在鄕, 見愚民與父母相詰者有之, 兄弟不和者有之, 不宜盛時有此風俗也.

 

세종조에 이미 삼강행실도를 경향 각지에 반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관부에는 아직 이 책이 구비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 허다하니 하물며 민간은 어떠하겠습니까?

世宗朝以三綱行實頒諸中外, 使人興起善心. 然官府尙未有此書, 況民間乎?

 

제가 생각하건대 삼강행실도라는 책은 앞면에 그림을 그렸고 뒷 면에 그 실제상황을 기술해놓고 있는, 사람 마음을 쉽게 끄는 좋은 책입니다. 이 책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면 풍속이 변할 수가 있으며 사람들의 가치관이 개혁될 수 있습니다.

臣意以爲三綱行實之書, 圖形於前, 記實於後. 若敎之以此, 則風俗可變, 人心可改.

 

단지 이 책은 너무 한만(汗漫: 분량이 많고 정돈된 맛이 없다)하여 어린 백성들이 이 책을 두루 다 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방만한 사례들 중에서 특이하고 절실한 것들만 골라 다이제스트판을 만들어 인쇄하여 시골구석에까지 배포한다면, 여염의 보통 백성들까지도 그 내용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니 조선 풍속의 혁신(風化)에 크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

但此書汗漫, 愚民未易編覽. 其中擇節行特異者, 抄略刊印, 頒諸村野, 使閭閻小氓, 無不周知, 庶有補於風化矣.

 

 

성종은 곧(206월 을사乙巳)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허침(許琛)과 이조정랑(吏曹正郞) 정석견(鄭錫堅) 두 사람에게 삼강행실도의 산정(刪定)을 명한다. 이 두 사람은 삼강행실도에서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35명씩만 추려(105, 그러니까 330명에서 105명으로 줄은 것이다) 3() 1()의 형태로 편찬하였다. 그리고 상단에 언해를 가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또 언해를 읽어가면서 한문공부를 하는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성종 214월 계미조에, “삼강행실도를 경성(京城) 5(五部)8도 군현에 골고루 나누어주어 우부우부(愚夫愚婦)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1490년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90성종조에 완성된 삼강행실도산정언해본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알고있는 조선문명의 가치관을 형성시킨 가장 결정적인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경기관찰사 박승질의 말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1)

성종조 때까지만 해도 조선사회의 풍속이 충분히 효사상에 물들어있지 않은 사회였다는 것이다. 부모자식간에 서로 힐난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한 자유로운 모랄의 사회였다는 것이다.

 

2)

세종조 때에 반포된 삼강행실도가 어떠한 고차원의 성리학 책보다도 민중의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 효율적이었다는 사실이다.

 

3)

판화의 효과가 대단히 우수했다는 사실이다.

 

4)

풍화(風化)’라는 표현이 입증하듯이 삼강행실도는 대중교육에 매스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바람에 쓸리듯 교화된다는 뜻의 풍화(風化)효경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은 본시 바람이면서 노래라는 뜻이다. 효경이 매장마다 ()의 인용으로 끝나는 것은 매장을 하나의 노래로서 인식했다는 뜻이다. 주희효경에서 의 인용을 제거한 것은 가장 큰 실수였다. 효경의 실제적인 한국판은 효경대의가 아니라 삼강행실도였다. 삼강행실도에는 매 일화마다 시()가 붙어 있는 것이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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