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과 명동학교, 동아시아의 미래
이러한 나의 갈망과 진실을 이해하고 나의 작업에 대하여 문화콘텐츠사업 ― ‘인문학 살리기’의 일환으로 지원을 흔쾌히 허락한 유한킴벌리에 나는 감사할 뿐이다. 이러한 문화콘텐츠사업은 동아시아 문명의 미래에 대한 총체적 비젼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유한킴벌리는 우리나라의 신뢰받는 모범기업으로서 시민들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공적사업을 원대한 안목에서 실천해왔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복지를 실현하는 사원공동체의 다양한 시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 이러한 기업철학의 배면에는 무엇보다도 창업자 유일한(柳一韓, 1895~1971) 박사의 정신이 살아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사료된다.
우리시대에 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학동으로서 유일한 박사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그의 사상일뿐만 아니라, 그의 실천적 삶의 역정이었다. 기업이 정치권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에도 일절 불의와 타협함이 없이 기업을 운영했고, 그를 모함하여 그의 기업을 조사케 한 자들이 오히려 그에게 상을 주어야만 했을 정도로 그는 투명한 삶을 살았다. 76세를 일기로 영면할 때도 그에게 부인과 자식들이 있었지만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유언장을 남기어, 모든 사람들을 숙연케 하였다. 이 모든 사적(事績)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투철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 신념이란 ‘기업의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의 논리적 유지만으로 삶의 실천이 관철되어지기는 어렵다. 그 신념을 관철케 만드는 그 혈관의 뜨거운 피가 없으면 안 된다. 그 뜨거운 피는 어디서 흘러들어 왔을까? 나는 그 뜨거운 핏줄의 한 단면을 그의 부친 유기연(柳基淵)의 삶에서 발견한다.
나는 EBS에서 방영된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 다큐를 찍기 위하여 서간도ㆍ북간도, 시베리아 등지로 수난 받는 동포들의 눈물겨운 삶의 족적을 여기저기 찾아 헤맨 적이 있다. 주권 잃은 민족의 수난사를 그들의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그 땅을 밟아보지 않고서는, 서면(書面)의 묘사만으로 그 실제정황을 공감하기는 어렵다. 나는 북간도의 명동학교를 찾아갔다. 명동학교는 의정부 참관 이상설(李相卨, 1871~1917) 선생이 을사늑약 직후 자정치명(自靖致命)의 울분을 삼키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가 용정으로 가서 설립한 북간도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의 후신이다. 서전서숙은 일제에 의하여 끊임없이 탄압을 받게 되었고, 또 창설자인 이상설이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떠나게 되자 폐교되어 버리고 만다. 이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 북간도의 정신적 지주였던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선생이 개화기의 탁월한 기독교사상가였던 정재면(鄭載冕)을 교사로 모셔다가 학교를 다시 열었는데 그것이 바로 명동학교다.
명동(明東)의 동(東)이란 주권을 잃고 일제의 사슬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캄캄한 나라, 조선을 말하는 것이요, ‘명동’이란 그 조국을 밝게 한다[明]는 뜻이다. 이 명동학교야말로 우리 민족정기의 맥이었고, 민족교육의 산실이었고, 만주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리고 1919년 서전벌 삼일운동의 주체이기도 하였다. 민중의 예술로 민족의 혼을 일깨운 영화 『아리랑』의 각본ㆍ주연ㆍ감독을 도맡아 한 회령의 천재 나운규도 이곳 명동학교에서 배출되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랬던, 샛별과도 같은 순결한 새벽의 정취와 애수를 우리 가슴에 남겨 놓은 시인 윤동주도, 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애를 마감한 그의 친구 송몽규도 명동학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구약학 학자로서 공동번역에 참가했고 최근까지 남북화해를 위하여 힘쓰다 돌아간 문익환도 윤동주와 한반에서 같이 명동학교를 다닌 사람이었다. 진취적인 기독교장로회를 창설하고 그 운동의 기치를 이끌고 간 장공 김재준선생도 규암 김약연선생 밑에서 공부했는데 규암을 평한 다음과 같은 멋들어진 말이 있다.
규암 선생의 생애는 공자가 도를 행하였던 모습과도 같다.
圭巖先生之生涯, 近於孔子之道.
담박한 인품을 지니며 남을 가르치는 데 싫증냄이 없었고, 간소한 삶을 살면서도 문채가 풍겼고, 온후한 성격을 지녔으되 사리가 분명했다.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먼 것이 가까운 줄을 알았고, 바람이 소종래가 있음을 알았고, 은미한 것일수록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다.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이 규암선생에게 학교 자금을 댄 사람이 바로 유일한의 부친 유기연이었다. 유기연은 평생 민족의식이 투철하였고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한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자식이 조금이라도 그러한 민족의식에서 벗어날 때는 채찍질하는 것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유일한이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후에도 꼿꼿이 독자적으로 살았고, 1934년 73세를 일기로 아들 일한이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 평양에서 영면하였다. 유일한은 일제말기에는 유한양행이 일제의 탄압을 받자 미국에서 체류했는데, 1945년 1월에는 자진해서 OSS훈련을 받고 비밀침투작전인 냅코(Napko) 작전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유일한은 아버지로부터 투철한 민족정기와 독립정신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그의 기업행위는 시작부터 끝까지 독립운동이었다. 따라서 기업의 부의 증대는 민족의 건강과 복지를 증대시키는 행위와 일치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는 그러한 철학에 따라 기업의 도덕성을 선구적으로 확립하였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우리나라가 독립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립(獨立)이란 홀로[獨] 섬[立]인데 분단의 현실로는 홀로 설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민족은 아직도 독립운동중이다. 나는 나의 13경한글역주 작업이 유일한 박사가 꿈꾸었던 조선의 완전한 독립의 그 날을 실현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한다. 유교의 21세기적 탐구는 남ㆍ북이 서구적 정치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새롭게 본래적 모습으로 회귀하고 하나 되는데 반드시 기여하리라고 본다. 나는 유교의 새로운 해석이 우리민족의 통일헌법의 기초가 되리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데 기여하리라고 확신한다. 유럽공동체(EU)의 문화적 공통분모 내지 사상적 기반은 역시 기독교다. 그러나 앞으로 생겨날 아시아공동체의 기반은 무엇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지렁이에게는 손톱이라든가 이빨과 같은 날카로운 도구도 없고,
단단한 힘살과 강력한 뼈도 없지만 언제나 땅속에서 위로는 진흙을 먹고
아래로는 황천의 맛있는 물을 먹고 산다.
그것은 오직 마음을 한 군데 쏟기 때문이다. …
두 길을 동시에 걸어가려고 하는 자는
결국 어느 한 길도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蚯螾無爪牙之利ㆍ筋骨之强, 上食埃土, 下飮黃泉, 用心一也. … 行衢道者不至.
학문의 길을 땅속에 사는 지렁이의 삶에 비유한 이 섬세한 말이 나에게는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다. 수만 권의 서향에 갇혀 그 문자 사이를 지렁이처럼 파고 다니는 자족한 나의 모습에서 이 민족역사의 한 새로운 장이 열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008년 6월 29일
무정재(毋井齋)에서
도올 쓰다
인용
'고전 > 논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곡부로 가서 느낀 것 (0) | 2021.05.25 |
---|---|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논어』를 접근하는 인식론적 과제상황 (0) | 2021.05.25 |
논어한글역주, 통서 인류문명전관 - 조선문명과 한문 (0) | 2021.05.25 |
논어한글역주, 통서 인류문명전관 - 불교와 심리학, 그리고 공자 (0) | 2021.05.25 |
논어한글역주, 통서 인류문명전관 - 신크레티즘(syncretism) (0) | 2021.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