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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논어』를 접근하는 인식론적 과제상황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논어』를 접근하는 인식론적 과제상황

건방진방랑자 2021. 5. 2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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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막: 공자의 생애와 사상

 

 

논어를 접근하는 인식론적 과제상황

 

 

과거는 알 수가 없다. 바로 어제로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도 기실 나의 의식 속의 기억(Memory)’이라고 하는 특수한 작용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과거의 총체가 될 수가 없다. 기억은 과거의 체험적 사건의 선택이며, 그 선택을 기억해내는 과정에는 이미 상상력이라든가 주관적 판단이라든가 감성적 왜곡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잡스러운 사태들이 개입한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닌, 과거체험의 해석(Interpretation)이다. 기억은 저등동물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기억은 의식작용이 고도화된 동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기억은 언어와 결부된 상징작용(Symbolism)의 소산이다. 과거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는 선택이며, 해석이며, 상징이다. 더구나 과거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간접체험의 소산일 때 이러한 문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논어를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명백한 인식론적 반성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논어에 대한 언설들이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을 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처로운 것이다. 논어를 달통했다 하는 박학지사(博學之士)들의 고론이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을 결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천루(淺陋)한 것이다.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읽을 때 우리는 노자(老子, 라오쯔, Lao Zi)라는 한 역사적 인간을 반드시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므로 그 사유의 주체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없이 추상적 사유의 체계 자체만으로도 적확하고 충분한 이해가 성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자속에는 노자 그 개인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어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언급이 있다.

 

 

논어라는 것은 공자(孔子, 콩쯔, Kong Zi)Confucius라고 하는 서양의 표현은 공부자(孔夫子, Kong Fuzi)를 라틴어로 표기한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가 제자나 당시의 사람들의 물음에 응하여 답한 것과, 제자들이 서로 더불어 토론하고 그것을 공부자에게 직접 물어 들은 말들이다. 그 당시 제자들이 각기 그것을 필기하여 두었다. 공부자가 세상을 뜨자 문인들이 서로 모여 그것을 모으고 논찬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일러 논어라 한 것이다.

論語者, 孔子應答弟子時人及弟子相與言而接聞於夫子之語也. 當時弟子各有所記. 夫子旣卒, 門人相與輯而論纂, 故謂之論語.

 

 

논어라는 서물의 성격과 제목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밝혀준 문장이라 할 것이다. ‘논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이나 당시의 사람들과 대화한 말, 그리고 제자들끼리 토론한 말, 그리고 공자에게 접문(接聞)한 말이다. ‘()’집이논찬(輯而論纂)’의 뜻으로, 그 말들을 편찬했다는 뜻이다. 논어는 편찬된 것이다.

 

논어에는 역사적으로 살아있는 한 인간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논어는 반드시 그 논어의 주체자인 한 인간의 모습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읽히는 논어인 것이다. 노자속에는 노자가 없다. 그러나 논어속에는 어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시공의 맥락에 따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는 사람들간의 논어다. 그 사람들간의 사이라는 것은 반드시 상황성(Situationality)을 가지고 있다. 그 역사적 상황 상황에서 그려진 그림들의 파편인 것이다. 노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지만, 논어는 시공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만 일차적으로 의미를 갖는다.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의미는 반드시 이러한 시공 속의 맥락을 전제로 할 때만이 발현하는 것이다. 논어는 분명히 어느 한 사람이 일상적으로 먹고 자고 울고 웃고 성내고 기뻐하고 있다.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논어는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을 우리는 공자(孔子)’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공자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어느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와 공통의 기반을 가진 생물학적 을 소유한 일상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매우 명백한 사실(crude fact)예수의 경우에도, 싯달타의 경우에도,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전혀 예외일 수가 없다. 이 사실을 초월하는 모든 주장도 반드시 이러한 명백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에 대한 기술이 우리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공자는 과연 존재했는가? 공자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상징작용의 착각에 의하여 날조된 픽션의 인물은 아닐까? 사이버공간의 인조인간이 너무도 유명해져서 역사 속에서 실존성을 획득한 것은 아닐까? 맹자(孟子, 멍쯔, Meng Zi)가 공자를 직접 만나지 못한 이상맹자는 공자가 죽은 후, 공자의 이웃동네에서 100여 년 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맹자가 직접 경험으로 공자의 실존성을 확인하지 못한 이상, 맹자의 공자에 대한 생각도 이미 이러한 소문에 의한 픽션이었다고 하는 가능성이 배제될 수는 없다. 과연 공자는 실존했는가? 실존했다면 지금의 우리와 같이 고민하는 동시대의 어느 한 인간의 유형이었을까? 공자는 과연 있었는가?

 

이러한 인식론적 질문에 대하여, 이 책의 첫머리에서 과거는 상징체계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이상, 어떤 확답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과연 실존했는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떠한 대답을 내려야 할 것인가? 공자는 과연 실존한 어떤 사람이었을까? 실존했다고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으며 어떠한 삶을 영위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어떠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살았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최선의 방도는 공자의 그림자가 드리운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섭렵하여 그 가운데서 살아있는 공자를 정직하게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이때 정직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그 정직(intellectual integrity)은 살아있는 공자의 역사적 실상(historical reality)에 접근하는 것이다.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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