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량흘의 무용담
숙량흘에 관해서도 많은 무용담이 전하고 있다. 우리가 공자라는 한 인간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그의 덩치다. 지금도 산동 사람들이 체구가 크기로 유명하다. 일메타 팔구십 되는 대한(大漢)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산똥따한(山東大漢, Shan-dong da-han)이라는 말이 있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 3절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공자는 키가 아홉척하고도 여섯촌이나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모두 ‘키다리’라고 불렀다. 정말 그를 볼 때마다 기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孔子長九尺有六寸, 人皆謂之長人而異之.
9척 6촌을 정확히 주제(周制)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주제의 1척은 약 22.5cm이다. 그렇다면 9척만 해도 공자의 신장은 2m 2cm가 된다. 그러니까 공자의 신장은 정확하게 2m 10cm가 넘는다.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라고 불렀는데 그를 볼 때마다 기이하게 생각했다[人皆謂之長人而異之]’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러한 치수가 결코 과장되었거나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자를 생각할 때 우리는 농구선수 ‘서장훈’과 같은 덩치를 정확히 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염달린 사막의 목동, 아담한 덩치의 예수 이미지와는 전혀 느낌이 다른 거한(巨漢)을 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러한 사실은 공자라는 인간의 인간됨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이 공자의 덩치는 공자의 행적의 모든 사실에 깊게 스미어 있다. 공자의 엄청난 정열, 기나긴 방황, 세간에서의 결단과 초세간적 승화의 모든 사실이 바로 이 체구, 이 체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자의 체구는 바로 그의 부친 숙량흘에서 유전되어 받은 것이다. 노양공 10년(BC 563) 봄의 일이다. 진국(晉國)이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노(魯)ㆍ조(曹)ㆍ주(邾) 삼국과 연합하여 지금의 산동성 조장시(棗莊市, 짜오주앙스, Zao-zhuang Shi)에 자리잡고 있었던 핍양(偪陽, 삐양, Bi-yang)이라는 작은 나라를 침공하였다. 이때 숙량흘은 맹헌자(孟獻子, 멍 시엔쯔, Meng-Xian-zi) 막하의 진근보(秦堇父, 친 진후우, Qin Jin-fu, 혹은 진동보秦董父), 적사미(狄虒彌, 띠 쓰미, Di Si-mi) 두 장수와 함께 출전하여, 핍양성의 북문을 공타(攻打)한다. 핍양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핍양군(偪陽軍)은 술책을 쓴다. 성의 북문이 위로 들어올리는 갑문(閘門)이었는데, 이 문을 들어올려 적장과 부하들을 성내로 유인시킨 후에 성내에서 몰살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갑문이 서서히 들어올려지고, 진(秦)ㆍ적(狄) 휘하의 부대는 성내로 돌격한다. 이들이 성내로 진입했을 때 갑문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술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 때였다. 이것이 계책이라는 것을 깨달은 숙량흘은 성문 아래 정 가운데 우뚝 서서 두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아틀라스처럼, 내려오는 갑문을 치켜올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퇴각을 호령하는 것이다. 이 덕분에 노군(魯軍)은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공자가 태어나기 12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 7년 후, 노양공 17년(BC 556), 이웃 강대국인 제국(齊國)은 노나라의 북부변경을 침략한다. 제국의 장수 고후(高厚, 까오 허우, Gao Hou)는 막강한 세력으로 노국의 대장인 장흘(臧紇, 짱 허, Zang He, 장무중臧武仲)과 숙량흘을 방읍(防邑)에서 포위한다. 보급이 차단되고 위기에 몰린 노군은 원군을 요청했다. 원군은 양관(陽關, 양꾸안, Yang-quan: 태안泰安의 동쪽)으로부터 진공을 시도했지만 제군(齊軍)의 엄중한 포진을 뚫을 수 없었다. 이때, 숙량흘은 대장 장흘의 두 형제인 장주(臧疇, 짱 츠어우, Zang Chou)와 장고(臧賈, 짱 꾸, Zang Gu)와 더불어 300여 명의 용사를 데리고 제국의 포위망을 뚫는 작업을 감행한다. 숙량흘의 무용 앞에 막강하던 제군의 포위망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얘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숙량흘이 힘이 막강하고 용맹스러운 거대한 체구의 무인(武人)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어떠한 족보와 혈통의 사람이든지 간에 매우 명백한 사실은 숙량흘은 거대한 체구의 무인이었고, 그 체격을 공자가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공자의 탄생에 관하여 아주 단순한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다.
‘야합(野合)’이란 아주 단순하게 새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들판에서 한다’는 뜻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술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아주 단순하고 최종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무명의 늙은 무사 한 사람과 무명의 젊은 무녀 한 사람이 들판에서 합하여 남자아기 하나 얻었다. 그것이 모든 역사의 시작이었다.
예수가 왜 하필 그 더러운 말 구유깐에서 태어나야만 했는지, 마리아가 요셉과 동침한 사실이 없었다면, 인간 예수의 탄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AD178년경 이방인 철학자 켈수스(Celsus)는 예수가 마리아와 식민지 주둔의 로마 보병(a Roman legionary)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당시의 초대교회에 퍼져있던 소문을 들추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경 『야고보서』는 예수의 엄마 마리아를 헬레니즘시대의 ‘성전의 한 창녀’로서 기술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초대교회역사에 있어서는 다반사(茶飯事)였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초월적 권위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예수에 관하여 풍문으로서 떠도는 항담(巷談)은 끝이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진위나 불경을 논하기 전에 인류역사에 실존한 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탄생에는 이미 그 탄생부터 불운이나 고난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예수의 탄생이나 공자의 탄생이나 모두 순탄한 시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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