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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공자의 출생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공자의 출생

건방진방랑자 2021. 5. 2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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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의 출생

 

 

앞서 누누이 말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공자의 삶의 역사적 사건의 나열이나 그 사실성의 여부에 대한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한 사실(史實)들을 거점으로 해서 펼쳐지는 인간 공자의 가능한 심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공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선 그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그 이해의 실마리를 추적해보자!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공자는 숙량흘(叔梁紇, 수리앙 허, Shu-liang He)’을 아비로, ‘안씨녀(顔氏女, 옌스뉘, Yan-shi-ni)’를 어미로 태어났다. 이 두 개의 표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아비는 성()이 없고 그 어미는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숙량(叔梁)은 자(), ()은 명()이다. 그런데 그 아비를 부를 때 공흘(孔紇, 콩 허, Kong He)이라 아니 부르고, 숙량흘(叔梁紇)이라 부르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 ‘중니구(仲尼丘)’자로유(子路由)’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춘추이전(春秋以前)에 이렇게 자()와 명()을 합쳐 부르거나, ()직명과 명()을 합쳐 부르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컨대 그 숙량흘의 족보를 따져 올라가는 모든 논의가 후대의 날조라는 인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공자의 증조부가 노나라 장손씨(臧孫氏, 짱쑨스, Zang-sun Shi)의 채읍(采邑)인 방읍(防邑, 황이, Fang-yi)의 읍재(邑宰)를 함으로써, ()나라에서 몰락한 귀족이지만 노()나라에 망명하여 와서 평민화(平民化)된 지위를 떨쳐버리고 귀족신분을 회복했다. 그래서 그를 사람들이 방숙(防叔)’이라 부르고, 그 앞에 공()이라는 애칭을 덧붙였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으로써 성()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공이라는 성은 실제로 공자가 유명해짐으로써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아버지대에까지도 성이 없었던 어떤 평민족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아버지 이름이 성이 없는 숙량흘이 된 것이다. 이것은 곧 공자가 유명해져서 성이 생겨나기 이전의 어떤 진실을 전하는 이름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내가 여기서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숙량흘이 추읍(鄹邑, 쩌우이, Zou-yi)의 대부(大夫)였다는 등등의 논의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의 족보를 귀족화시키기 위한 이러한 설화적 이야기를 일체 기록하지 않았다.

 

안씨녀(顔氏女)’의 정체는 무엇인가? 전승되어 내려오는 여러 설화에 의하면, 곡부성 내에 글 쓸 줄을 알고 예에 통달한 안양(顔襄, 옌 시앙, Yan Xiang)이라는 훌륭한 노인이 있었다. 그에게 세 딸이 있었는데, 그 막내의 이름이 안징재(顔徵在)였다. 이 현숙한 셋째 딸이 바로 안씨녀다. 숙량흘은 원래 부인 시씨(施氏, 스스, Shi-shi)가 있었는데, 이 첫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아홉이나 낳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들 모두가 딸이었다. 팔공주가 아닌 구공주였던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려면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은 어김없는 당시의 통념이었다.

 

그래서 부인을 하나 더 얻었다. 그래서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아뿔사, 불행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맹피(孟皮, 멍피, Meng-pi)라 했는데 선천성 기형의 절름발이가자(瘸子), 공자가어(孔子家語)』 「본성해(本姓解)에는 병족(病足)’이라 표현였다. 공야장(公冶長)1에 보면 공자가 자기의 제자 남용(南容, 난 르옹, Nan Rong)온전한 이름은 남궁자용(南宮子容)에게 형의 딸을 시집보낸 이야기가 나오는데, 공자에게 이 있었다는 것은 논어의 문맥상 입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공자의 자()중니(仲尼)’인데 중()이란 둘째 아들의 뜻이다. 중니란 곧 니구산(尼丘山)에서 빌어 얻은 둘째 아들이란 뜻이다. ()은 맏맹 자이고, 맏아들의 뜻이다. ‘(: 가죽의 뜻)’라는 이름은 간접적으로 불구자의 뜻을 시사한다. 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맏가죽(孟皮)’이란 이름을 붙여주었겠는가?

 

그래서 숙량흘은 셋째부인을 얻으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곡부의 안양(顔襄) 노인에게 가서 딸 하나를 달라고 간구한다. 그때 이미 숙량흘은 70세에 가까웠다. 첫째 딸은 청혼을 거절한다. 둘째 딸도 거절한다. 우선 나이가 많아 골골하게 보이는 숙량흘에게 시집갈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셋째 딸은 육감이 달랐다. 무엇인가 신의 뜻을 감지했다는 것이다. 안징재는 기꺼이 숙량흘에게 시집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從父命爲婚]. 그때 안징재의 나이는 꽃다운 이팔(二八), 16세의 청춘이었다. 복사꽃 만발하는 봄날의 향기가 흐드러지는 니구산(尼丘山)에서 70노인과 16세의 새악씨가 아들 낳아 달라고 빌러가는 뒷모습을 연상하는 우리의 가슴속엔 태고의 낭만이 서린다.

 

사마천은 공자세가(孔子世家)1에서 이 두 사람의 결합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숙량흘과 안씨녀는 들에서 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니구에서 빌어 공자를 얻은 것이다.

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禱於尼丘得孔子.

 

 

이 표현에서 역대 주석가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야합(野合)’이라는 한 마디였다. 색은(索隱)야합이라 함은 숙량흘이 늙었고, 안징재가 어려서, 머리 얹고 비녀 꽂는 예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야합이라 했다고 했다. 곧 정식의 예의에 합당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正義)는 보다 관념적인 해석을 내렸다. 소문(素問)』 「상고천진론(上古天眞論)의 의학적 상식을 인용하여 남자는 팔팔(八八) 64세면 양도(陽道)가 절()하는 법인데 숙량흘의 나이 64세를 넘어 정식 혼인(婚姻)이 성립할 수 없으므로 야합(野合: 억지 결합)’이라 한 것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결국 우리는 야합이라는 말이 통례적인 예의에 합당치 않은 결혼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적나라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의 해석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사실을 단순한 사실 그대로, 단순한 표현을 단순한 표현 그대로 읽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들에서 합한다는 뜻이다. ()에는 이라는 뜻 이외로도, ()이 문()을 승()하면 야()하다 했고[옹야], 자로의 인간됨을 야()하다 했고[자로], 선진(先進)의 예악이 야()하다 했으니[선진] 대체적으로 문아(文雅)하지 못한 행동을 일컫는 것이다.

 

공자의 전기를 연구하는 사계의 대부분의 석학들이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안씨녀는 무녀(巫女)였다. 안씨 집안은 무속과 관계된 집안이었다. 안씨녀의 부친도 아마 큰 만신이었을 것이다. 안씨녀가 죽었을 때 그녀를 빈()오보지구(五父之衢, 우후우즈취, Wu-fu-zhi-qu)라는 곳이 바로 노성내(魯城內)에 상례(喪禮)를 전담하는 당골네 님들의 집성촌락이었다.

 

 

 니산치도(尼山致禱)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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