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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논어해석사강 - 주자학의 근대성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논어해석사강 - 주자학의 근대성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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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학의 근대성

 

 

나는 주자학을 전근대적(pre-Modem) 사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나는 근원적으로 근대라는 개념을 사용키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 상식적 맥락에 즉하여 이야기해도, 주자학이야말로 인류의 근대사조라고 단언한다. 주자는 데카르트코기토나 루소의 에밀과 같은 정신과는 또 다른 하나의 인류의 근대정신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21세기에는 주자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하는 문제상황을 떠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산은 그의 학우 김덕수(金德叟)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가 다소곳이 생각하여 보건대, 한유(漢儒)들은 옛 것을 높이고, 그 훈고가 서로 계승되어, 실제로 취할 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논리들이 엉켜 착오를 일으키는 상황이 진실로 적지 않습니다.

竊嘗以爲漢儒高古, 其訓詁相承, 固多可取, 而其紕繆錯誤, 誠亦不少.

 

그러므로 주자가 많은 곳을 고치고 바로 잡았는데 그것은 실로 완벽한 옥에 흠집을 내는 짓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故朱子多所更改, 非求瑕於白璧也.

 

그런데 요즈음 세상에서는 고주만을 숭상하고 전심하는 일종의 풍조가 휩쓸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주가 말하는 논의에도 진실치 못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면 그런 사람을 지목하여 멍청한 놈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제가 수십 년 동안을 쑤셔 박혀 오랫동안 다양한 경전의 장구에 침잠하여 사색하고, 경험을 축적하여 보니, 고주라 해서 다 옳을 수가 없는 것이고, 후유(後儒)의 신주라 해서 다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近世一種習尙, 乃欲專心古注. 凡古注所言, 有議其不允者, 指之爲妄人. 然窮居數十年, 沈漸章句, 積久稽驗, 知古注未必盡是, 後儒新論未必盡非.

 

이러한 문제에 관한 유일한 해결책은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공평한 마음으로 바라보아, 그 시비의 진상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연도의 전후나 무엇이 더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그 학설을 따를까 말까 하는 것을 단정지우는 것은 학인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唯當虛心公觀, 以察是非之眞, 不宜按世次考年紀, 以斷其從違也. 詩文集20, 30b.

 

 

우리 민족은, 통일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국학을 설치했는데 이미 그곳 커리큐럼에 논어가 필수라 했고, 그 이전에 이미 백제의 왕인(王仁)논어를 일본에 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옛부터 논어를 접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우리가 논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신주논어요 주자논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하자면 과거 초장시험에 논어가 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영락제 때 편찬된 사서대전(四書大全)의 집주본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누구든지 주자의 논어집주를 달달 외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문으로서의 논어가 아니라, 벼슬 수단으로서의 논어였고, 그 시각에서 일차적으로 주자는 조명되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토록 많은 조선의 유자들이 어려서부터 논어를 달달 외웠건만 논어객관적 대상으로서 객화시켜 연구하고 그에 대한 주석을 가하는 사례는 극히 희소하다는 것이다.

 

다산논어고금주는 그 희례(希例)에 속하는 것이다. 조선의 유자들에게 던져진 논어는 그냥 논어가 아니라 주자집주논어였다. 따라서 그들의 의식세계 속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 주가 곧 논어라는 개념의 유기적 일체를 이루고 있는 마당에, 또다시 주석을 가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불가한 일이며, 불경한 일이었다.

 

중국의 송ㆍ명ㆍ청대에 걸쳐 내려오는 찬란한 주석사나 일본 에도시대 유자들의 고집스럽고도 독창적인 주들을 바라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오늘날 이 땅에 인문학의 빈곤을 운운케 되는 것도 이러한 전통의 연장이라는 힐난을 모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계가 일체의 다양한 논의를 거부하고 성령지상주의에 매달려 세계 신학계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는 진보된 학문정보에 어두운 현실 또한 동일한 빈곤과 타락한 종교문화를 후세에 물려주게 되리라는 우려가 우리의 가슴을 애처롭게 만든다.

 

나 스스로의 불민(不敏)을 책()하면서, 요번 나의 논어주석에는 주자의 집주부분은 상론(上論)에 한하여 별도로 충실히 번역하기로 하였다. 하론(下論)에서는 정보가 집약되면서 논어의 총체적 윤곽을 잡아야 하는 마당에 번쇄한 집주는 독서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상론의 집주는 독자들에게 송유의 입장이 과연 무엇인지에 관해 명료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송명유학사를 읽는 것보다 논어에 즉하여 집주를 읽는 것이 철학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첩경일 수도 있다. 집주의 정확한 해독에 필요한 출전은 옥안(沃案)을 통해 상세히 다 밝혔다. 다음은 주자의 서설(序說)이다.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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