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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17. 안다는 것에 대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17. 안다는 것에 대해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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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안다는 것에 대해

 

 

2-1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유야! 내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2-17. 子曰: “!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공자의 말씀 중에서 그 말씀이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발설되었을 때, 우리는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역사적 맥락을 일차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논어중에서, 일평생 공자의 공자다움을 지켜준 애 제자 자로(子路)와의 애증어린 관계에서 발생된 대화의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는 이 말이 자로(子路)라는 인격체를 전제로 하는 맥락에서 일차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한다. 그러한 해석의 지평 위에서 우리 삶과의 보편적 관련을 탐색해야 할 것이다. 주자는 이러한 맥락을 잘 지적하고 있다.

 

 

자로는 본시 용맹스러움을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이런 사나운 자들은 대체로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안다고 우기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공자께서 다소곳이 일러주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의 바른 길을 가르쳐주마 라고.

子路好勇, 蓋有强其所不知以爲知者, 故夫子告之日, 我敎女以知之之道乎!

 

 

자로는 본시 도(), 유협(遊俠)의 도()였다. 참으로 의리있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무지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무지란 무엇인가? 무지란 과연 지식의 범위의 협애함을 의미하는가? 인간에게서 궁극적으로 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에게 참으로 무지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지식이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모른다고 죄가 될까? 무지에서 유지로 나아가는 길이 과연 단순히 개념적 지식의 지평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일까? 무지야말로 역설적으로 최고의 유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저기 저 들판에 나부끼는 한 송이의 풀포기도 어김없이 꽃망울을 터트릴 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조차 과연 무지의 주체라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지식이란 인간의 인식의 지평의 확대범위의 다소만으로 그 기준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개념적 지식의 다소에 의하여 유지와 무지의 가치기준이 판가름 나는 것은 아니다. 통속적으로 무지하다고 규정하는 인간에게서도 우리는 매우 심오한 인간의 지혜나 인간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난해한 질문에 대하여 공자는 앎에 대한 인식론적 논리적 규정을 회피한다. 그리고 매우 우회적으로 앞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태도를 드러내고자 한다. 안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즉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앎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앎 그 자체의 규정이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자세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자의 말에서 아는 것을 안다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우리의 실존의 어떤 한계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의식이 아니다. 그러나 공자의 말에서 진정으로 우리의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는 대목은 바로 둘째번 구절이다. 그것은 즉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식할 수 있음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병폐는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즉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모르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 지를 명료하게 아는 인간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는 법이 없다. 그리고 그 무지의 영역은 무지한 상태로 소중하게 간직되며, 언젠가는 앎의 영역으로 전이되리라는 소망의 대상이 된다. 인간 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느냐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때만이 앎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의 영역은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를 통해서만 반사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바로, 모르는 것을 확실히 모르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에게서만 비로소 진정한 삶에 대한 발돋움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나 도올은 평생, 이 공자의 명언(名言)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세상사람들이 평생 나를 유지(有知)한 자라 이를지 모르지만 내 가슴속에 진정 품고 사는 것은 무지(無知)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무지(無知)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란, 무지(無知) 그 자체에 대한 도가적인 예찬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세계가 항상 존재한다는 인식이 나에게 던져주는 희열일 뿐이다. 무지(無知)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유지(有知)의 세계의 확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不知爲不知],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의 에로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은 공자가 자로의 실명을 부른 것이다. 즉 사랑하는 제자에 대한 매우 사적인 호칭이다. 이런 표현에는 자로에 대한 공자의 인간적 애정이 듬북 담겨 있는 것이다. ‘회여지지호(誨女知之乎)!’ 역시 공자의 온화하고 차분한 가르침의 간곡함이 깃들어 있다. 정녕코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마!

 

공자는 이와 같이 자로를 가르쳤다. 자로야! 알려고 애쓰지 마라! 그래서 애써 모르는 것까지 안다고 우기지 마라! 너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요, 네가 뭘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다. 즉 너의 무지에 대한 자각만이 너를 무지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자로를 가르쳤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르기까지 만인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문에서 우리가 충격을 받는 것은 무당의 자식으로 천하게 태어난 공자라는 인간의 합리적 상식의 구조이다. 누구보다도 더 종교적일 수 있는 그가 이단(異端)’을 배격하고, 누구보다도 앎에 대한 무제약적인 동경에 불타있을 그가 무지(無知)’에 대한 자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상식의 존중이 동양 문명의 합리성의 기저를 구축하였고, 역사의 진보를 저해하였을지는 모르나 인간의 역사가 넘어서는 아니될 어떤 보편성의 중용적 가치를 제시한 것이다. 기독교적, 과학적, 연역적 세계규정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아름다운 지구를 파괴해가고 있는 21세기 지금, 공자의 인품이야말로 참으로 음미해볼 만한 성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라고 읽는다. ()’는 공자의 제자이다. 성이 중()이고, ()가 자로이다. 자로는 본시 용맹스러움을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이런 사나운 자들은 대체로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안다고 우기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부자께서 다소곳이 일러주신 것이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의 바른길을 가르쳐주마 라고 단지 아는 것만을 안다고 생각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생각해라. 이와 같이 하면 비록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자기를 기만하는 일은 없을 것이요, 또한 이는 것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통하여 추구해나가 면 또한 새로운 앎에 도달하는 이치가 있을진저!

, 音汝. , 孔子弟子, 姓仲, 字子路. 子路好勇, 蓋有强其所不知以爲知者, 故夫子告之曰: 我敎女以知之之道乎! 但所知者則以爲知, 所不知者則以爲不知. 如此則雖或不能盡知, 而無自欺之蔽, 亦不害其爲知矣. 況由此而求之, 又有可知之理乎?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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