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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16. 이단을 공격하면 해가 된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16. 이단을 공격하면 해가 된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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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이단을 공격하면 해가 된다

 

 

2-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이단을 공부하는 것은 해가 될 뿐이다.”
2-16.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여기서 말하는 이단(異端), 지금 현재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쓰이는 맥락에서 규정되고 있는 의미로 해석될 수는 없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이단(異端)이란 ‘unorthodoxy’‘heterodoxy’의 의미로 해석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자시대에는 ‘orthodoxy(정통)’의 개념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양묵(楊墨)이니 노불(老佛)이니 하는 따위가 모두 공자 후대에 형성된 대비된 개념들이요, 공자 시대에 공자를 괴롭혔던 어떤 이단학파의 개념이 아니다. 공자는 창조적 시대(creative age)를 살았지 호교적 시대(apologetic age)를 산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불씨(佛氏)’, ‘양묵(楊墨)’ 운운하는 신주()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 것은 다산(茶山)고금주에서 역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공자의 시대에는 노자장자(莊子)ㆍ양주ㆍ묵적이 제각기 한 문호를 세우고 있지를 않았다. 그리고 후세에 삼교가 정립하여 자기 종파에 들어오면 주인처럼 생각하고 나가면 노비처럼 생각하는 시대와는 달랐으니, 여기서 공자가 말한 바는 이 따위 식의 이야기들이 아니다.

孔子之時, 老莊楊墨未立門戶, 非如後世三敎鼎立, 出奴入主, 則孔子所 指, 非謂是也.

 

 

양 뿨쥔(楊伯峻)도 공자의 시대는 제자백가가 정립되어 있지 않던 시대였으므로 이단이 공문의 사상과는 다른 학설[不同的學說]’을 의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부정확한 논의[不正確的論議]’를 의미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양씨의 논의는 이단을 부정하면서 결국 이단의 의미를 살리면서 표현만 바꾸었을 뿐이다. ‘부정확한 논의가 곧 이단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기의 사상을 실체화 해놓고 그것과의 관련 속에서 타인의 이해의 부정확성을 논구할 그러한 인물이 아니다. 양씨의 공자 이해는 때로 너무 경솔하다.

 

양씨가 이단을 부정확한 논의로 해석한 가장 큰 이유는 그 다음 구절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사해야이(斯害也已)’에서 ()’그러면 곧과 같은 연접사로 보고, 마지막 )’그친다’, ‘소멸한다의 뜻을 갖는 본동사로 보는 것이다. 단순한 접미사로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의미는 이와 같이 된다: “부정확한 논의를 공격하라! 그리하면 곧 그 폐해가 소멸케 될 것이다.” 참 기발한 해석 같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는 ()’공독(攻讀)’이나 전공(專攻)’으로 해석하지 않고 공격의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부정확한 논의를 공격하기만 하면 그 폐해가 소멸된단 말인가? 전제군주의 관료사회에서나, 혹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프롤레타리아독재 국가의 당조직 내에서나 통할 수 있는 가치관을 어찌 논어에 적용하고 공자의 말씀에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부정확한 논의란 말 자체가 나의 주관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그 인식론적 객관성이 보장될 수가 없다. 무엇이 과연 부정확한 논의인가? 나는 정확하고 타인은 부정확한가? 그래서 부정확하다고 판단되는 논의는 공격하기만 하면 그 폐해가 사라진단 말인가? 공격하기만 하면 사라질 수 있는 이단이 과연 존재한다 해도, 아마도 그러한 이단은 이단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부정확하다 해도 인간의 판단은 인간의 비판에 의하여 쉽사리 포기되지 않는 다. 양씨의 해석은 한마디로 너무 나이브하다.

 

청대의 신기풍을 수립한 고증학자 대진(戴震, 1723~1777)이단이 본래 베틀의 용어인데 직물(織物)의 서로 다른 양쪽 단()을 의미한다고 했다. 직조할 때 한 방향에서 짜들어가야 하는데 서로 다른 양 방향에서 짜들어가면 직물에 폐해가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슨 일이든지 한 방향에서 전념해야 성과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다른 이단에서 겸공해 들어가면 잡다해져서 폐해가 생긴다 는 것이다[, 頭也. 凡事有兩頭謂之異端. 言業精於專, 兼攻兩頭, 則爲害耳]. 대진의 해석은 양씨의 해석에 비하면 별 무리가 없는 좋은 해석이다.

 

그러나 이단(異端)’의 용례를 예기춘추의 제주석(諸注釋)에서 찾아보면 대체로 타기(他技)’의 의미가 있다. ‘타기(他技)’기이하고 교묘한[奇巧] 소도(小道)’를 의미한다. 무엇인가 기발하고 색다른[] 생각의 단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살다보면 한의학도들 중에 기발한 학설이나 묘방을 추구하는 자가 많고, 우리나라에서는 주역(周易)을 운운하는 자들 중 기이한 단서()에 미쳐있는 자들이 많다. 하여튼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고등수학이 아닌 민간수학이라는 흐름이 있는데, 수리를 가지고 우주를 운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체로 이단을 공독하는 자들이다.

 

앞서 말했듯이 공호이단(攻乎異端)’의 공()은 두 가지 뜻이 있을 수 있는데, 첫째는 공격한다. 비판한다는 뜻이고, 둘째는 전공한다. 공독한다. 연구한다는 뜻이다. 이단을 이교설로 풀이한다면 자연스럽게 첫째의 뜻이 더 맞을 것이지만, ‘색다른 생각이나 단서로 풀이하면 둘째의 뜻이 더 적합할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공자는 본시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단이란 괴이하고 신묘한 것이다.

 

혹자는 이단을 연구하는 것은 해가 될 뿐이라고 하는 공자의 말이 시대적 변혁이나 새로운 생각의 과감한 수용을 거부하는 보수주의자의 노파심을 나타낸 말로서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공자의 말은 명료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상식의 존중(respect for common sense)’이다. 상식적인 것을 버리고 색다른 것만 추구하는 사람들, 구체적인 것을 무시하고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진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 일상적인 것을 외면하고 허황된 도통이나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병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삶의 목적이 지나치게 일반적이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기발하고 이단적인 것이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삶의 목적은 나의 삶의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가설적이며 가변적이며 동적인 나의 느낌(Feeling)과 병행(竝行)되는 것이다. 어떤 이단(異端)이 삶의 외부로부터 주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도올서원의 재생들에게 늘상 이렇게 타이른다: “저 풀 한포기가 그대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하나님보다는 훨씬 더 성스러운 것이다.”

 

 

범순부가 말하였다: “‘()’은 전문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 , , 옥을 다스리는 공예를 ()’이라고 말한다. ‘이단(異端)’이란 성인의 도가 아닌 별도로 하나의 단()이 된 것이니, 양주와 묵자(墨子)의 경우가 이러하다. 천하를 거느리고 무부(無父), 무군(無君)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공하여 다스리고, 정밀하게 알고자 하면 그 해됨이 더욱 심한 것이다.”

范氏曰: “, 專治也, 故治木石金玉之工曰攻. 異端, 非聖人之道, 而別爲一端, 如楊墨是也. 其率天下至於無父無君, 專治而欲精之, 爲害甚矣!”

 

정자가 말하였다: “불씨의 말은 양주 목적에 비하면 더욱 이치에 가깝게 느껴지는 바가 있으니, 그러므로 그 해가 오히려 더욱 심한 것이다.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불씨의 말을 음란한 음악이나 요염한 여색을 멀리하듯이 멀리해야 한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말 타고 달려들어가듯 그 속으로 빨려 들어 가게 되고 말 것이다.”

程子曰: “佛氏之言, 比之楊, 尤爲近理, 所以其害爲尤甚. 學者當如淫聲美色以遠之, 不爾, 則駸駸然入於其中矣.”

 

 

여기 범씨의 말이나 정자의 말이 공자의 말을 시대착오적으로 해석하였고, 이단에 대한 해석이 양ㆍ묵까지는 몰라도 후대의 불교에까지 적용되고 있으므로, 이들의 논의가 계한(界限)이 불분명하고 용동(儱侗)하게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한다 하여 비판의 화살을 퍼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이들이 공자의 역사적 정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말하기에 앞서, 이들의 학문의 소이연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이다. 정문(程門)은 지금 논어에 대한 정밀한 주석을 가하는 것이 학문의 제1의적 목표가 아니다. 그들은 신유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도학을 수립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정자가 불씨지언을 이야기한 것도 그러한 시대정신에서 파악해야 한다. 더구나 이 말은 정명도(程明道)의 말로서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13권 첫머리(1a)에 실려 있는데 특별히 논어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이단의 폐해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주자가 옮겨놓은 것이다. 문장도 약간의 변형이 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佛老, 其言近理, 又非楊墨之非, 此所以害尤甚.”

 

그리고 이 말에 뒤이어지는 음성미색(淫聲美色)’ 운운한 것은 유서2 9b에 나오는 말로서 별도의 문장을 짜깁기한 것이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學者於釋氏之說, 直須如淫聲美色以遠之. 不爾, 則駸駸然入於其中矣.”

 

학자들은 주자주의 성격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논어에 대한 정확한 주석을 집()한 것만은 아니다. 객관적인 언설을 자기의 생각을 타당화시키기 위하여 짜집기 식으로 인용한 사례도 많고 그 과정에서 원래 맥락의 변형이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본장의 해석으로서의 주자의 집주는 잘못된 것이라는 데는 의론의 여지가 없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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