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군자다운 경쟁
3-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다투는 법이 없다. 그러나 굳이 다투는 것을 말하자면 활쏘기 정도일 것이다. 상대방에게 읍하고 사양하면서 당에 오르고, 또 당에서 내려와서는 벌주를 마신다. 이러한 다툼이야말로 군자스럽지 아니한가!” 3-7.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
노자는 ‘부쟁(不爭)’을 말하였다. 쟁(爭)의 덕성에 의한 사회적 질서는 결국 인간을 유위(有爲)의 파탄으로 몰아갈 뿐이라고 질타한다. 공자 역시 군자(君子)의 덕성으로서 쟁(爭, competition)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자는 노자처럼 쟁(爭)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그러한 무위(無爲)의 철학을 구가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쟁을 근원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쟁(爭)을 근원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면 어떠한 쟁이 군자다운 쟁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같은 운동경기라도 복싱과 골프를 우리는 비교해볼 수가 있다. 둘 다 분명 쟁(爭)은 쟁(爭)이다. 그러나 복싱과 골프는 크게 차이가 있다. 복싱은 반드시 상 대방을 때려 눕혀야만 나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골프는 상대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나의 실력으로 칠 뿐이며 상대방의 행위에 의하여 내가 영향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골프는 그냥 내 길을 내가 가면 그만이다. 상대방은 단순히 비교의 대상으로, 같이 걸어가는 친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군자의 쟁(爭)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나의 행위가 타인의 부정 위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골프에 해당되는 우리 전통놀이가 바로 ‘활쏘기’였다. 그 활쏘기의 예의작법은 『의례(儀禮)』의 「향사례(鄕射禮)」와 「대사(大射)」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옛날에 선비들이 향촌에서 모이면 으레 동네 정자에서 향사례(鄕射禮)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예경(禮經)에 의하면 활쏘기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대사(大射), 빈사(賓射), 연사(燕射), 향사(鄕射)가 있다. 앞의 세 경우는 모두 천자가 주체가 된다. 향사는 향대부(鄕大夫)가 주체가 되는 향촌사람들의 잔치이며, 천자나 제후는 참여치 않는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사례는 천자가 베푸는 대사(大射)를 모델로 하여 논한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결코 적합한 해석이 아니다. 공자가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천자ㆍ제후ㆍ경ㆍ대부를 지칭했다기보다는 보다 일반적인 사계급을 심중에 두었을 것이다. 굳이 꼬집어 말한다면 대사보다는 향사가 더 적합한 상황이겠지만 그러한 번문욕례의 규정이 공자의 언급에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다. 공자시대에 지금 「의례』에 규정되어 있는 그토록 섬세하고 복잡한 사례의 과정이 준수된 상황인가 하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군자무소쟁(君子無所爭)’ 군자는 다투는 법이 없다. 군자는 다투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 않는다. ‘필야사호(必也射乎)!’ 그러나 다투는 상황을 굳이 말하라면 아마도 활쏘기 정도일 것이다. 활을 쏘러 당에 오를 때도 서로 읍(揖)하는 예를 한다. 읍례(揖禮)는 두 손을 모아 위로 들어 절하는 것이다. 팀[耦]을 짜서 당 위에 올라가는데 팀끼리 서로 공경하는 자세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활쏘기 가 끝나면 당에서 내려와서, 과녁에 적중시키지 못한 쪽이 벌주를 마시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다툼이야말로 군자의 다툼이 아니겠는가[其爭也君子]!【「대사」에 의하면 벌주를 마시는 것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 당 위에서 벌어지는 예식이다. 따라서 신주의 해독방식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고주는 ‘읍양이승하(揖讓而升下), 이음(而飮)’으로 끊어 읽고 신주는 ‘읍양이승(揖讓而升), 하이음(下而飮)’으로 끊어 읽었다. 고주대로 하면 읍양(揖讓)의 예(禮)는 승당(升堂), 하당(下堂)의 과정에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는 작법이 된다. 『의례』에 묘사된 과정은 고주의 방식에 보다 가깝다. 왕숙이 말하기를, ‘당(堂)에서 활쏘기를 행할 때 오르고 내리는 과정에 모두 읍양하고 서로 술을 마신다[射於堂升及下, 皆揖讓而相飮也].’고 했는데 아마도 왕숙의 주석이 짧지만 고례에 합당할 것이다. 향사례를 거행할 때도 반드시 향음주례가 선행하게 되어 있으며 읍양과 상음(相飮)은 끊임없이 반복되도록 짜여져 있다. 단순한 벌주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신주의 해석을 따랐다. 신주에도 ‘이기지 못한 자가 다시 당 위로 올라가 벌주를 마신다’는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의 사례(射禮)가 반드시 『의례』의 준칙을 그대로 따랐다고만 볼 수는 없다. 주자의 해석은 다음의 주를 보라.
‘음(飮)’은 거성이다. ‘읍양이승(揖讓而升)’이라고 하는 것은 대사(大射: 천자가 주관하는 활쏘기)의 예에서 짝[耦]을 지어 나아가 짝 진 사람들끼리 세 번 읍한 후에 당에 오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이음(下而飮)’이라고 하는 것은 활쏘기가 끝난 후에 읍하고 내려와 모든 짝들이 다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이긴 자가 하면, 이기지 못한 자가 당으로 다시 올라가 당 위에 설치된 치(觶) 잔을 취하여 서서 마시는 것을 말한다. 이 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군자는 공손하여 남과 다툴 일이 없지만 오직 활쏘기에 있어서만은 다툼이 있다, 그러나 그 다투는 모습도 온화하고 겸손함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그 다툼은 군자다운 것이어서 소인의 다툼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飮, 去聲. ○ 揖讓而升者, 大射之禮, 耦進三揖而後升堂也. 下而飮, 謂射畢揖降, 以俟衆耦皆降, 勝者乃揖不勝者升, 取觶立飮也. 言君子恭遜不與人爭, 惟於射而後有爭. 然其爭也, 雍容揖遜乃如此, 則其爭也君子, 而非若小人之爭矣.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다: “군자는 다투지 않는다. 그러나 다투려면 신사적으로 다투어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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