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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9. 문헌이 부족하여 증명할 수가 없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9. 문헌이 부족하여 증명할 수가 없네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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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문헌이 부족하여 증명할 수가 없네

 

 

3-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하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는 있지만 그 후예인 기나라가 증험을 대주지 못하며, 은나라의 예 또한 내가 말할 수는 있지만 그 후 예인 송나라가 증험을 대주지 못한다. 문헌자료와 구두자료가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료들이 충분하다면, 나는 하은의 예를 증명해낼 수 있을 텐데.”
3-9. 子曰: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나는 여기에 숨은 뜻을 명료하게 드러내어 쉽게 이해되도록 번역을 했지만, 기실 이 장의 문장만으로 그 명료한 뜻을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그 대강은 반드시 위정(爲政)편의 23장과 본편의 14장의 미언대의(大義)와 아울 러 함께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하례오능언지(夏禮吾能言之)’란 무슨 뜻인가? ()나라는 하()나라의 유민들이 봉()하여진 나라로서 하나라의 문물의 적통성을 잇고 있다. 그렇다면 기나라에서 하나라의 문물의 역사적 실체가 입증되어야 할 텐데, 실상 기 나라는 하나라의 문물제도를 보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나라의 현 상태가 하나라의 문물을 증험할 수 없는 부족징(不足徵)’의 상태라고 한다면, 하나라의 예를 내가 능히 말할 수 있다[夏禮吾能言之]’라는 말을 서두에 꺼낸 것일까? 이 장의 의미론상의 전체적 구조로 볼 때, 이 첫 마디부터가 이미 명료 히 해석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례오능언지(夏禮吾能言之)’는 자신에 찬 긍정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소극적인 부정의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다시 말해서 하례(夏禮)를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나라의 실존성(實存性)이 거부될 수는 없는 어떤 실체성의 맥락이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추론은 가능하다는 정도의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58년부터 73년에 이르기까지 하남성(河南省) 낙양평야(洛陽平野) 동부인 언사현(偃師縣)으로부터 서남쪽으로 킬로미터 떨어진 이리두촌(얼리더우촌, 二里頭村) 남부에서 궁궐터를 포함한 대규모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이하(伊河)와 낙하() 사이에 위치한 얼리터우 유적을 하() 왕조의 실존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서 간주하는 것이 오늘날 사계의 지배적 의견이다.

 

공자의 시대에도, BC 2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존재했다고 하는 하()나라의 존재는 하나의 전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신화적 기술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하()나라를 이어 받았다고 하는, 그 유민들이 세운 하남성(河南省) 기현(杞縣)에 있는 기() 나라로 유적탐사여행을 갔을 수도 있다. 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하례오능언지(夏禮吾能言之)’()’를 뒤의 기()와 붙여 읽는다. 그렇게 되면, ‘하례오능언(夏禮吾能言), 지기부족징야(之杞不足徵也)’가 되고, 해석은 하례를 내가 말할 수는 있으나 기나라에까지 가보아도 증험할 길이 없고가 된다. 실제로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이를 밑받침하는 기사가 있다. 자유(子游, 언언言偃)가 예의 필요성의 절박함에 관해 공자에게 문의하는 대목이 있다. 이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하나라의 도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기 나라에 직접 가보았으나 하나라의 도를 증험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하시라는 책을 하나 얻었다. 나는 은나라의 도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송나라에 직접 가보았으나 은나라의 도를 증험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곤건이라는 책을 하나 얻었다. 이로써 나는 곤건의 의미와 하시의 차제를 볼 수가 있었다.

孔子曰: “我欲觀夏道, 是故之杞, 而不足徵也, 吾得夏時焉; 我欲觀殷道, 是故之宋, 而不足徵也, 吾得坤乾焉. 坤乾之義, 夏時之等, 吾以是觀之.”

 

 

예운(禮運)편의 기사가 정확한 역사적 사실 여부를 말하고 있는가는 물론 우리가 추단(推斷)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사는 공자가 얼마나 고례(古禮)의 실상에 관해 실증사학(實證史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인물인가 하는 것을 방증하는 좋은 예이다. 그는 직접 실증적인 자료가 없이는 역사에 대하여 함부로 농단할 수 없다고 하는 매우 혁신적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는 이미 BC 6~5세기에 인류학적 필드웍(fieldwork)에 능숙했던 인물이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겠다(7-20), 귀신(鬼神)경이원지(敬而遠之)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인본주의적 발상(6-20)이 모두 이러한 실증사학적 태도와 일관된 공자의 신념구조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다산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가 갈 ()를 뒤의 기()에 붙여 읽은 사례를 인용하여 반박하고 있는데, 이는 다산이 이토오의 논어고의(論語古義)를 직접 읽고 말한 것은 아니고 다자이 슌다이의 논어고훈외전(論語古訓外傳)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한 것이다. ‘양지자연하위구(兩之字連下爲句)’ 말은 고의의 문장이 아니고 외전의 인용문란 표현이다. 진사이의 해석은 단지 예운에 의거한 것으로 그렇게 끊어 읽어야 할 하등의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그 누구가 진사이를 알았겠는가? 에도 유학자의 설을 인용하여 반박하고 있는 다산의 폭넓은 학문자세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강진 촌구석에 쑤셔박혀 있었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당대의 모든 국제적 문화세계를 유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나라의 유적지인 하남성(河南省) 기현(杞縣)은 실제로 곡부에서 먼 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낙양(洛陽)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공자가 젊은 시절 예()를 물으러 낙양(洛陽)의 노자(老子)이 노자가 오늘의 도덕경(道德經)의 저자인지는 확언할 수 없어도, 오늘 도가계열 사상의 남상을 이루는 어떤 인물과 공자가 만났다는 것은 최근의 죽간연구성과로 미루어 볼 때에도 충분히 가능한 가설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에게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면, 공자는 낙양을 다녀오는 길에 하() 나라의 후예의 나라인 기(), ()나라의 후예의 나라인 송()을 방문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해볼 수가 있다. ()은 기현(杞縣)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하남성의 상구현(商邱縣)에 위치하고 있다. 란 하나라의 세시 풍속을 차례대로 적어놓은 옛 풍속도와도 같은 책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하시지등(夏時之等)’이란 의미일 것이다. 건곤(乾坤)은 은나라의 ()에 해당되는 책이었을 것이다. 은나라가 특별히 종교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점복(占卜)에 관한 어떤 우주론적 생각의 원형을 보존한 책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여행을 통해, 슈타인이나 페리오가 돈황문서를 발견했듯이, 그러한 문서를 발견하고 수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너무도 빈곤한 잔재였을 뿐이다. 다산은 말한다.

 

 

공자가 이 장에서 능언(能言)’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이 세상에는 하나라 은 나라의 예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공자는 워낙 넓게 배운 사람이래서 비로소 그것을 능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말할 수 있다 해도 구체적 증거가 없으면 그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다. 만약 기나라와 송나라에 문헌자료와 구두자료가 충분히 있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공자의 말씀과 상합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것을 중험해 낼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오능징지(吾能徵之)’라고 한 것은 곧 스스로 직접 신험한다는 뜻이다.

能言, 明世無能言之者, 孔子博學故能言之. 然無徵不信. 若使杞宋有文有獻, 則必與夫子所言相合, 故曰吾能徵之. 吾能徵之者, 自信之辭也.

 

 

지금 우리는 문헌(文獻)’이라는 것을 합쳐서 단지 문서적 기록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그러나 정현(鄭玄)은 문()과 헌()을 독립시켜, ()은 문서로 보고, ()은 현인으로 보았다[, 猶賢也]. 신주도 대강 이러한 정현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典籍也; , 賢也]. 나는 이에 따라 문()을 문서를 통한 문헌자료로 헌()을 사람을 통한 구두자료로 해석하였다. 아예 자료수집의 두 측면으로 명료하게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정현이 헌()을 현()으로 해석한 것은 원래 다른 목적이 있다. 정현은 ()’()’으로 해석하여 오능징지(吾能徵之)’내가 능히 그 나라들을 보필하여 일으켜 세울 수 있을 텐데 ……라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즉 기()나라와 송()나라에 가서 본 즉 문물제도도 형편이 없고, 현명한 군주나 재상 같은 인물도 빈곤하여, 그들과 더 불어서는 하나라나 은나라의 옛 모습을 복원할 길이 없다는 식으로 푼 것이다[我能不以其禮成之者, 以此二國之君, 文章賢才不足故也]. 나는 이러한 고주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결국 이 장의 대의(大義)는 본편 14주나라는 하나라 은나라 두 나라를 귀감삼아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나는 주를 따르리로다![주감어이대(周監於二代), 욱욱호문재(郁郁乎文哉)! 오종주(吾從周)]’라고 한 공자의 역사에 대한 태도의 구체적 이유와 근거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위정(爲政)23그러나 어떤 자가 주나라를 계승한다면 백세대의 일일지라도 미리 알 수가 있을 것이다[기혹계주자(其或繼周者), 수백세(雖百世), 가지야(可知也)]”라고 언명한 그의 신념의 실증적 근거를 밝힌 것이다.

 

인간의 신념에는 항상 과거의 모델이 있게 마련이다. 때로 그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투영한 현재의 관념일 수도 있다. 공자에게 있어서 주나라와 주공은 하나의 이상이었으며 그것은 자신의 현존재를 규정하는 영원한 힘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한 이상을 관념적 우토포스(U-tops)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 무어의 이상향이나, 칼 맑스의 공산사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증될 수 있었던 구체적 현실이었다. 바로 이러한 공자의 실증사학적 정신 때문에 유교는 관념성에 치우치지 않고 동아시아의 현실 역사 속으로 스며드는 가치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는 하나라의 후예이며, ‘()’은 은나라의 후예이다. ‘()’은 증명한다는 뜻이다. ‘()’은 전적(典籍)이고, ‘()’은 고대전승을 많이 보지하고 있는 현명한 인재이다. 내가 능히 하ㆍ은 두 시대의 예를 말할 수는 있으나 기ㆍ송 두 나라에서 취하여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별로 없으니 이는 문헌자료와 구두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문헌자료와 구두자료가 충분하다면 나는 그것을 취하여 내 말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라고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 夏之後. , 殷之後. , 證也. , 典籍也. , 賢也. 言二代之禮, 我能言之, 而二國不足取以爲證, 以其文獻不足故也. 文獻若足, 則我能取之, 以證君言矣.

 

 

예수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관하여 실증사학적인 연구를 하거나 탐사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키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예수와 공자는 관심소재와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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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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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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