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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4. 예(禮)의 근본을 묻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4. 예(禮)의 근본을 묻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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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의 근본을 묻다

 

 

3-4. 임방이 예의 근본을 여쭈었다.
3-4. 林放問禮之本.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훌륭하도다, 그 질문이여! 예는 사치스럽기 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하고, ()은 형식적 질서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야 한다.”
子曰: “大哉 問. , 與其奢也, 寧儉. , 與其易也, 寧戚.”

 

여기 등장하는 임방(林放)이라는 인물은 이 편의 4장과 6에 그 이름이 올라있을 뿐, 전혀 어떤 인물인지 알 길이 없다. 고주(古注)에 정현(鄭玄)의 말로서 임방(林放), 노인야(魯人也)’라고 적혀 있는 것이 그 단서의 전부다. 궐리문헌고(闕里文獻考)에는 성이 임()이고 이름이 방()이며 자가 자구(子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속에는 끼어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임방(林放)은 공자의 교단에 속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공자의 대화 가 결코 교단 내의 좁은 울타리에만 머문 것이 아니며, 공자는 당시 노나라의 군주나 일반 교단 외의 사회인으로부터도 자문을 주고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방 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임방(林放)과의 대화도 공자가 거의 노()나라의 국부(國父)대접을 받던 말년의 대화의 기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임방(林放)이 다음 6장에서는 태산(泰山)의 신()과 비교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사회적으로 가벼운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공자의 교단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예()에 관한 달인(達人)으로서 노()나라 국인(國人)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먼저 임방문예지본(林放問禮之本)’이라는 첫 구절의 해석도 그리 만만치 않다. 여기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근본뿌리라고 말하고 있는 ()’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고 있다. 이 본()이라는 개념은 향후(向後) 우리 동아시아 문화권에 있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주는 철학개념으로서 정착되었던 것이다. 특히 불학(佛學)과의 만남에서는 본유(本有), 본각(本覺), 본원(本願), 근본(根本), 본지(本地), 본사(本事), 본시(本時), 본래(本來), 본문(本門), 본생(本生), 본존(本尊) 등의 개념으로, 또 근대화과정에 있어서 서양사상과의 만남에서는 본질(本質), 본체(本體), 본구(本具), 본유(本有) 등의 개념으로 발전되어 인식되었던 것이다. 노자에 불후(不朽)의 주석을 남긴 왕필(王弼)은 여기 바로 임(林放)의 질문을 문제 삼아 자신 특유의 숭본식말(崇本息末)사상과 연결시키고 있다왕필은 노자를 주해했을 뿐 아니라 논어를 주했다. 그러나 왕필의 논어는 주()는 현존하지 않으며 그 파편이 황간의 소속에 산재되어 있다. 왕필은 도가 사상가로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노자보다 공자를 더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 인물로 평가했다. 노자는 유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무()의 철학을 언표(言表)했고, 공자는 무()를 체화(體化)했기 때문에 무()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왕필의 기본적 생각이었다. 이것은 왕필의 기상(奇想)이 아니라 당대의 통념의 한 측면을 나타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위진시대만 해도 유가와 도가라는 분별적 개념이 희박했을 뿐 아니라, 따라서 공자에 대한 인식도 근원적으로 유가지종(儒家之宗)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를 통섭하는 근원적 인물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죽간의 연구성과는 이러한 인식의 정당성의 근거를 밝혀주고 있다.

 

임방(林放)이 공자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을 당시 이미세속인들의 예()에 대한 생각이 그 근본을 버리고 말엽만을 숭상하는 폐단에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 예의 근본을 물었던 임방이 위대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는 것이다[時人棄本崇末, 故大其能尋本禮意也].

 

숭본식말(崇本息末)’이라는 왕필(王弼)의 사상은 항상 본원에 대한 중시가 선행해야한다는 것이다. 왕필(王弼)의 기치는 바로 근본으로 돌아가자!(Return to the Root!)’는 것이다. 이때, ‘식말(息末)’은 말()을 종식(終息)시킨다는 부정적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부정적 맥락으로 생각하면 본식 말(崇本息末)은 본()을 숭상하고 말()은 버리라는 식의 이원론으로 왜곡될 우려가 있다. ()에는 휴식(休息), 종식(終息) 등의 그침의 의미가 있지만 번식(蕃息), 이식(利息) 등의 번창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숭본식말(崇本息末)은 본()을 숭상해야만 말()이 오히려 번창하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서 노자사상은 말()에 빠져있는 인간세(人間世)의 사람들에게 본()을 숭상할 줄 알도록 만드는데, ()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주는데, 그 요체와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노자에 있어서 유()는 말()이요, ()가 본()이다. ()는 제도적 구속력이요, ()는 스스로 그러한 인간의 본연(本然)이다.

 

공자는 예의 전문가로서 노나라에서 명성을 얻었다. 예의 새로운 정립을 통해 사회변혁을 꾀하고자 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신념과 능력 때문에 그는 대사 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실각했고 유랑의 쓰라린 세월을 14년이 나 보내야만 했다. 그가 다시 노나라에 복귀했을 때, 그의 주장이 이미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허나 일반인들에게 통념화되어 있는 예악(禮樂)사상은 본()이 아닌 말()이었던 것이다. 째즈가 아닌 고정멜로디의 노래 였던 것이다. 이렇게 기본숭말(棄本崇末, 본을 버리고 말만을 숭상하는)의 통폐를 통 감하고 있었던 공자에게 임방(林放)의 질문은 하나의 복음과도 같은 반가움이었다. 사실 여기 임방문예지본(林放問禮之本)’의 내용은 보다 복잡한 구조나 사연으로 얽혀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의 기자는 그것을 그냥 ()의 본()을 물었다라는 식으로 압축해놓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 본()을 물었다는 그 물음의 내용과 맥락을 잘 알 수가 없다. 보다 구체적인 어떤 질문들이 오갔을 것이다.

 

대재문(大哉問)!’이라는 탄성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다.

1. 첫째는 그 질문에 대한 찬미의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오 참으로 위대하도다. 그 질문이여!(Great indeed is this question!)”라는가, “그것은 정말 좋은 질문이구나!(That is a really good question!)”라는 식의 찬미의 말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둘째는 문자 그대로 그 질문이 너무 거창하다, 다시 말해서 그 질문이 너무 큰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답변하기가 곤란하다는 탄식의 소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 너무 크도다! 그 질문이여!(A very big question. 웨일리 번역).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는 그 다음에 따라붙는 공자의 대답은 그러한 큰 질문에 대하여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매우 구체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는 어떤 회전의 사잇말들이 생략되어 있다고 사료된다.

 

다음의 여기(與其) A () B’라는 관용구는 오늘날 백화(白話)에서까지 상용되는 어법인데, 그것은 이러한 백화적 용법이 이미 공자의 시대에까지도 소급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중국언어의 지속성은 참으로 경탄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라기 보다는(than)’의 비교를 나타내는 뜻이며, ‘()’차라리의 뜻이다. 오늘날 백화에서는 여기(與其) A 녕가(寧可) B’로 쓴다. A라기 보다는 차라리 B, 그러니까 A는 부정적인 맥락에 놓여지며 B는 긍정적인 맥락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와 상()의 관계는 이미 서막에서 소인유(小人儒)의 이야기를 하면서 충분히 설명했던 것이다. 여기서 공자의 대답은 예()와 상()을 이원적인 두 항목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다. ()에 대한 일반론을 먼저 펴고, 그 예()의 핵심인 상()을 다시 부연설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의 외연 속에 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  
     

 

()에 대한 공자의 설명인사와 검(), 사치와 검약이라는 오늘날 우리의 말로 쉽게 이해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예식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숭말(崇末: 말초를 숭상함)의 행위라는 것이다. ()는 간단하고 검소하고 간략할수록 더 좋은 것이다. ()는 검()이 곧 본()이다.

 

왕필 () ()
공자 () ()
() ()
주자 () ()

 

()에 대한 공자의 설명인 이()와 척()은 얼른 쉽사리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를 고주()화이(和易)’로 풀었다. 온화하고 화평한 모습으로 푼 것이다. 즉 상례는 슬픈 것이 본의(本意)이지 온화하게, 태연하게 잘 치르는 것이 본의(本意)가 아니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신주(新注)는 이()치야(治也)’라 했다. 여기서 치()라는 것은 형식적인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즉 형식적으로 잘 치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어떤 상례의 규칙에 의하여 깔끔하게 진행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나는 신주의 뜻을 취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의 근본은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상실되었다는 슬픔에 있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상례(喪禮)를 과시하기 위한 무대가 아닌 것이다. 상이란 질서정연하게 형식적으로 잘 치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슬픔이 생생하게 표출되는 것이 그 본질이다! 역시 째즈 아티스트다운 공자의 탄성이다. 주자는 이러한 공자의 말씀을 문()과 질()의 관계로 풀었다. 사이(奢易)는 너무 문()한 것이요, 검척(儉戚)은 질()한 것이다. 둘 다 완벽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대저 모든 사물의 이치는 먼저 질()이 있고 나서야 문()이 있게 되는 것이니, 양자를 비교해서 말한다면 질()이 오히려 예()의 본()이라는 것이다[奢易則過於文, 儉戚則不及而質. 二者皆未合禮. 然凡物之理, 必先有質而後有文, 則質乃禮之本也].

 

예의 본질은 사이(奢易)한 데 있지 아니하고, 검척(儉戚)한 데 있다. 예의 본질은 형식이 아닌 상황이다. 사회적 과시가 아닌 인성 내면의 표출이다. 외면적 허례가 아닌 내면적 슬픔이다. 우리는 여기서 대악(大樂)은 필이(必易)하고 대례(大禮)는 필간(必簡)이라고 한 악기의 말을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장에 대하여 최근의 문헌비평은 다음과 같은 참신한 시각을 제공 하기도 한다. 만약 이 장이 맹자(孟子)시대 즈음에나 편집된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의 공자의 말은 오히려 묵자(墨子)가 공자의 후장구상(厚葬久喪)을 통박하고 절장단상(節葬短喪)을 주장한 공리주의적 입장에 대한 완곡한 아폴로지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는 것이다. 학인들의 일고(一考)를 촉구한다.

 

 

임방은 노나라 사람이다. 그는 세상에서 예를 행하는 자들이 오로지 번거로운 수식만을 일삼는 것을 보고 예의 근본은 그런 데 있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공자는 당시의 사람들이 말엽만을 쫓고 있는데 임방만이 유독 근본에 뜻을 두었기에 그 임방의 질문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대저 예의 근본을 파악하게 되면, 예의 전체효용이 모두 그 속에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林放, 魯人, 見世之爲禮者, 專事繁文, 而疑其本之不在是也. , 以爲問. 孔子, 以時方逐末, 而放獨有志於本. 故大其問. 蓋得其本, 則禮之全體, 無不在其中矣.

 

()’는 거성이다. ()’는 다스린다는 뜻이니, 맹자그 밭두둑을 잘 다스리며[易其田疇]’(진심23)라 한 용법과 상통한다. 상례(喪禮)에 있어서 라는 것은 그 절문(節文: 굽이마다의 문식)만 익혀 익숙하고 애통ㆍ참담한 실()이 없는 것을 일컫는다. 그에 반하여 ()’이라는 것은 너무 슬픔에만 전일하여 문식이 부족한 것이다. 예라고 하는 것은 중()을 얻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치스럽고 형식적으로 매끄러운 것은 문()이 과()한 것이요, 검소하고 슬프기만 한 것은 모든 것이 불급(不及)하니 질()한 것이다. 이 양자가 모두 예에 합당치는 아니 하다. 그러나 대저 사물의 이치는 먼저 질()이 있고 나중에 문()이 있게 되는 것이니, 그런즉, 질이 예의 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治也. 孟子曰: “易其田疇在喪禮, 則節文習熟, 而無哀痛慘怛之實者也. , 則一於哀, 而文不足耳. 禮貴得中, 奢易則過於文, 儉戚則不及而質, 二者, 皆未合禮. , 凡物之理, 必先有質而後有文, 則質乃禮之本也.

 

범순부가 말하였다: “대저 제사라는 것은 경()이 부족하고 예()가 유여(有餘)한 것보다는, 차라리 예가 부족하고 경이 유여한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또 한 상()이라는 것은 애()가 부족하고 예()가 유여한 것보다는, 차라리 예가 부족하고 애가 유여한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예가 사치스러운 데로 빠지는 것과, 상이 매끄러운 데로 빠지는 것은 모두 그 근본으로 돌아갈 줄을 모르고 그 말엽만을 쫓아가기 때문이라. 예가 사치스러워 완벽한 느낌을 주는 것보다는 검소하면서 덜 갖추어진 느낌을 주는 것이 낫고, ()이 형식미가 갖추어져 질서정연한 것보다는 좀 덜 매끄럽더라도 슬픔이 우러나오는 것이 더 낫다. 검소한 것은 사물의 바탕이요, 슬퍼함은 마음의 정성[]이다. 그러므로 검소함 과 슬퍼함이 예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范氏曰: “夫祭, 與其敬不足而禮有餘也, 不若禮不足而敬有餘也, , 與其哀不足而禮有餘也, 不若禮不足而哀有餘也. 禮失之奢, 喪失之易, 皆不能反本而隨其末故也. 禮奢而備, 不若儉而不備之愈也, 喪易而文, 不若戚而不文之愈也. 儉者, 物之質, 戚者, 心之誠. 故爲禮之本.”

 

양중립(귀산)이 말하였다: “예는 본래 음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웅덩이를 항아리로 삼고, 손으로 움켜 마시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보궤(제사 제물 그릇)ㆍ변두(반찬 그릇)ㆍ뇌작(술잔 종류들)의 아름다운 기물을 만들어 꾸미게 되었으니 그 근본인즉슨 검소한 것이다. ()이라는 것도 감정을 직접 표출하여 곧바로 행하기는 곤란했기 때문에 최마(거친 상복)를 입고 곡을 하고 발구르기의 수(, 질서)를 정하여 절도를 만든 것이니 그 근본인즉슨 슬픔일 뿐이로다. 주나라의 문명이 쇠미해져 감에 세상사람들이 문()으로써 질()을 멸()하려 하는 판에, 임방이 홀로 예의 근본을 물었다. 그러므로 부자께서는 그 질문을 훌륭하게 여기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楊氏曰: “, 始諸飮食, 故汙尊而抔飮, 爲之簠簋籩豆罍爵之飾, 所以文之也, 則其本儉而已, 喪不可以徑情而直行, 爲之衰麻哭踊之數, 所以節之也, 則其本戚而已. 周衰, 世方以文滅質, 而林放, 獨能問禮之本, 故夫子, 大之而告之以此.”

 

 

매우 좋은 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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