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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6. 계씨, 분수를 넘어서는 제사를 지내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6. 계씨, 분수를 넘어서는 제사를 지내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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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계씨, 분수를 넘어서는 제사를 지내다

 

 

3-6. 계씨가 태산에서 여제()를 지내었다. 공자께서 염유(冉有)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너는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느냐?”
3-6. 季氏, 旅於泰山, 子謂冉有曰: “, 不能救與.”
 
염유가 이에 대답하여 말하였다: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對曰: “不能.”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슬프도다! 일찍이 태산의 하느님이 임방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子曰: “嗚呼, 曾謂泰山, 不如林放?”

 

우선 이 장에는 새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염유(冉有)라는 이름의 사나이 다. 우선 공자가어(孔子家語)』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1의 기사를 살펴보자.

 

 

염구의 자()는 자유(子有)이다. 중궁(仲弓, 염옹冉雍)과 같은 집안사람이다. 본시 재주와 예능이 뛰어났다. 그리고 정치를 잘하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冉求, 字子有, 仲弓之族. 有才藝, 以政事著名.

 

 

칠십이제자해의 내용은 지극히 간결하다. 그러나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의 성은 염(), ()은 구(), ()는 자유(子有). 그래서 그는 자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염유(冉有)라고 불리기도 한다. 논어에서 그와 관련된 장이 16장에 이르고 있는데, 그의 호칭으로는 염유(冉有), 염구(冉求), 염자(冉子), ()의 네 종류가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호칭 중에서 염자(冉子)가 정확하게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염옹(중궁)과 염구 두 사람의 가능성이 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상황으로 보아 염구의 제자들이 그를 높여 염자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염구의 활동이 염옹보다는 활발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해의 기록은 염유를 중궁의 가족이라 하여 혈연관계를 밝혀놓고 있는 점이 특이한데, 이것은 가어가 노나라 지방지적인 오리지날한 사료들을 많이 채록했다는 측면을 과시하는 것이다. 염경(冉耕, 백우伯牛), 염옹(冉雍, 중궁仲弓), 염구(冉求, 자유子有)이 세 사람이 한 집안 사람으로 모두 노()나라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염옹(冉雍)과 염구(冉求)는 같은 나이로 공자(孔子)보다 29세 연하이며(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염백우(冉伯牛)는 공자보다 7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세 사람이 모두 사과십철(四科十哲)에 끼었다는 것이다. 염백우(冉伯牛)와 중궁(仲弓)은 덕행(德行)으로 들어갔고, 염유(冉有)는 계로(季路, 자로子路)와 함께 정사(政事)로 들어갔다. 그 출신이 본시 천박했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십철(十哲) 중에 삼인(三人)을 점했다고 한다면 노()나라에 있어서 염유(冉有)의 집안은, 안동(安東) 지역에서의 퇴계(退溪) 가문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염구는 특히 재예(才藝)에 뛰어났고 정사(政事)로서 이름을 날렸다고 제자해는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짧지만 매우 적확한 기록이다. 염구는 육예(六藝)에 달통한 인물이었고 재주가 뛰어났다. 현실감각이 탁월하면서도 매우 조용하고 겸손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계강자(季康子)가 염구의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묻는 말에 공자는 염구는 예()에 달통한 자인데 정치에 종사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구야예(求也藝), 어종정호하유(於從政乎何有)]?”(6-6)라고 자신있게 답하고 있다. 염구는 기예와 재능이 풍부한 인간이었다. 공자는 염구지예(冉求之藝)’(14-13)의 탁월성을 계속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라는 말 속에는 정치적 감각이라는 의미도 어느 정도는 내포되어 있다.

 

염구는 논어에 총 16장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적지 않은 출연이다. 공자(孔子)의 초기제자로서 공자(孔子)에게 가장 중요했던 제자 4명을 꼽으라고 한다면 자로(子路), 안회(顔回), 염구(冉求), 자공(子貢) 이 네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네 사람이야말로 공자의 14년 유랑길을 지켜주었던 심복 중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자로(子路)9세 연하로 가장 나이가 많고, 나머지 세 사람은 다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었다. 안회는 30세 연하요, 염구는 29세 연하요, 자공은 31세 연하였다. 선진(先進)21에 보면, 염구와 자로, 두 사람의 인격을 비교하여 공자가 이야기하는 구절이 있는데, 염구는 물러나서 소극적으로 사색하는 성품이라서 앞으로 적극 나아가도록 격려해주었고, 자로는 나서서 참견하는 성품이라서 좀 물러나도록 눌러주었다고 평하고 있다. 염구는 주제넘게 나서기를 매우 싫어했고, 인간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긋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월권하는 일은 없었지만,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개혁적 성향이 부족했다. 그래서 공자는 염구가 자신의 능력이 부족[力不足]하다고 겸손하게 고백했을 때, 너는 너 자신의 한계를 너무 일찍 긋고 사는 놈이라고 야단을 치고 있다[今女畫. 옹야10]. 그러나 그것이 바로 염구의 장점이었고 탁월한 현실감각이었다. 염구는 레알 폴리티크(Realpolitik, 현실정책)’의 기수였다.

 

하여튼 염구의 위치는 공자학단 내에서 자로(子路)와 동급에서 비교될 정도로 중후한 자리에 있었다. 염구는 공자학단 밖에 있는 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가장 탐나는 인물이었다. 자로는 너무 우직하고, 직설적이라서 다루기가 힘들고, 판단력이 외골수적이며 의협심이 강했다. 안회는 아예 정치적 관심이 없는 샌님이었다. 자공은 수완이 너무 좋아 부릴 대상이 아니라 부림을 당할 거목이었다. 오직 염구만이 자기 주제파악을 정확하게 하면서 뒤받거나 주제넘게 참견하거나, 월권하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바를 착실하게 해내는 재능이 탁월했다. 그야말로 실무관료로서는 가장 부담이 없는 충직한 최상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염유는 의리가 있었다.

 

공자의 삶에 있어서 염구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바로 염구가 아니었더라면, 공자는 오늘날의 위대한 교육자로서 역사에 남을 수 있는 기회를 유실한 유혼(幽魂)이 되어 오늘도 중원(中原)의 하늘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에 돌아왔기에 위대한 공자가 된 것이다. 공자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 기나긴 생애의 마지막 45년간 노나라에서의 삶이었다.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왔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돌아왔냐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노나라의 군주와 국인()들이 모두 갈망하는 인물로서 영예롭게 귀향했다는데 그 마지막 피날레의 위대성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영예로운 귀로(歸魯)의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염구였다. 사실 공자는 염구에게 큰 신세를 진 셈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공자 자신은 후일까지도 염구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공자는 역시 한 인간일 뿐이었다. 섭섭해할 줄 알고, 또 투덜거릴 줄 아는 그 공자의 성품이야말로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공자라는 캐릭터에서 느끼는 인간적 매력일지도 모른다.

 

공자의 유랑길도 황혼에 접어들고 있던 때였다. 공자를 내쫓았던 계환자(季桓子)가 병이 들어 죽음의 침상에 누웠다. 그는 노나라의 도성을 창밖으로 내다 보면서 다음과 같은 탄식을 했다: “옛날에 이 나라가 거의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를 등용하여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까닭에 흥성하지 못한 것이다[昔此國幾興矣, 以吾獲罪於孔子, 故不興也].” 그러면서 그의 후계자인 계강자(季康子)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노나라의 정권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공자를 초청해 오도록 해라[我卽死, 若必相魯; 相魯, 必召仲尼].” 공자세가(孔子世家)23

 

계환자가 죽고 계강자 시대의 막이 올랐다. 계강자는 공자를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노나라의 대부인 공지어(公之魚)가 간하여 말하였다. 공자는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과거에 공자를 등용한 선군(先君)이 결국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는데, 이제 와서 공자를 불러 그 이상의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면 또 다시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계강자는 공지어(公之魚)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초빙하는 것이 좋겠는가[則誰召而可]?” 이때 공지어(公之魚)의 묘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반드시 염구를 부르십시오[必召冉求].”

 

이에 염구는 발탁되어 공자 곁을 떠나간다. 이때 공자는 외면으로는 염구의 등사(登仕)의 길을 축복해 주었지만, 자신이 소외당하고 말았다는데 대한 섭섭 함의 느낌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노나라 사람들이 염구를 부르는 것을 보니 이것은 작게 쓰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크게 쓰려는 것이로다[魯人召求, 非小用之, 將大用之也].” 여기 소용(小用)과 대용(大用)의 논리의 배면에는, 염구의 등용은 소용(小用)일 뿐이며, 결국은 자신을 대용(大用)하려는 어떤 계획의 일환으로 이러한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대의 감정이 깔려있는 것이다. 즉 이 말에는 염구의 등용을 부럽게 껄떡거리며 쳐다보는 늙은이의 안타까움이 서려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돌아갈까나! 돌아갈까 나! 내 고장에 내가 뿌려 놓은 젊은이들! 패기차고 거칠지만 어언 찬란하게 그 질서있는 모습을 갖추었다. 내가 이젠 돌아가서 지도해주어야 할 텐데, 할 텐데![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공야장(公冶長)21에 기록되어 있는 이 말은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17에 인용됨. 세가인용문에는 부지(不知) 앞에 오()가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여()가 호()로 되어있다 어찌보면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갈 수 없는 자기신세를 한탄하는 애처로운 정조가 서려있다. 이러한 공자의 갈망을 만약 염유가 배반했다면 공자는 유랑의 여로에서 울분의 피를 토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늙은이의 심경을 눈치 빠른 자공(子貢)이 헤아리지 못 할 리가 없다. 자공()은 떠나가는 염구를 은밀히 불렀다.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 너 의리를 지켜라! 등용되어 자리 잡으면 곧 선생님을 모셔가라[子贛知孔子思歸, 送冉求, 因誡曰: “卽用, 以孔子爲招]!

 

몇 년 후 염유는 계씨(季氏)의 명을 받고, 장군이 되어 낭()에서 제나라와 싸워 전승을 거두었다. 계강자(季康子)가 염유의 탁월한 전술전략과 그 용지(勇智)에 감복하여 말하였다: “그대는 군사에 관한 것을 도대체 어디서 배웠는가? 아니면 본래 그 방면에 타고난 재주가 있는 것인가[子之於軍旅, 學之乎? 性之乎]?” 이 기회를 놓칠세라 염유는 명료하게 말하였다: “이것은 모두 공자에게서 배운 것입니다[學之於孔子].” 염유는 의리를 지킨 것이다. 사실 계강자는 남의 말만 들었을 뿐, 직접 공자를 접해본 사람이 아니었기에 공자를 잘 알지를 못했던 것이다. 계강자는 학덕과 군사에 모두 뛰어난 공자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이 염유의 재예(才藝)에서 우리는 공자의 학단의 성격이 문()과 무()가 겸비된 사()의 집단이라는 사실을 재확인케 되는 것이다. 계강자는 물었다: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孔子何如人哉]?” 염유는 말한다: “당신이 그를 등용한다면 이 나라의 명예가 높아질 것입니다. 그의 생각을 백성에게 전파하거나 귀신들에게 물어보아도 한 점의 유감도 없을 것이 외다. 그에게 정치를 구한다면 반드시 최상의 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일천 개의 사당이 있는 봉토를 준다 해도 그는 그곳으로부터 한 푼의 사리도 취 하지 않을 것입니다[用之有名, 播之百姓, 質諸鬼神而無憾. 求之, 至於此道, 雖累千社, 夫子不利也].”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31

 

이러한 염유의 예찬에 계강자는 감복하여 말하였다: “나는 그를 모셔 오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我欲召之, 可乎]?” 염유는 대답한다: “나의 스승을 당신이 진정 모셔 오고 싶어한다면, 소인배들이 그를 괴롭히는 상황만 차단시켜 주시면 가할 것이외다[欲召之, 則毋以小人固之, 則可矣]” 소인들이 그를 괴롭히는 상황만 만들지 말아 달라는 염유의 부탁은 참으로 명언이었다. 염유는 자기의 스승에게 지켜야 할 모든 예의와 의리를 지킨 것이다. 계강자는 소인배들을 축출하고 예물을 갖추어 정중하게 공자를 맞이하였다. 실로 14년만의 그리운 귀향(歸鄕)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명예를 취하였고 관직을 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정치의 무상함을 깨달은 거인(巨人)이요 달인(達人)이요 초인(超人)이었다.

 

이러한 염구의 성실한 자세로 공자는 영예로운 귀로(歸魯)의 꿈을 달성했지만, 공자는 염구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늦추지 않았다. 내가 너를 계씨(季氏)의 재()로 보낸 것은 계씨(季氏)의 전횡(專橫)을 막고 도덕적인 인()의 정치를 구현케 하기 위함이었다. 어찌하여 너는 계씨(季氏)에게 협력키만 하고 결과적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편에 서 있기만 하는가? 네 이놈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非吾徒也]. 나의 제자들아! 북을 울려 염구의 죄를 성토함이 옳다[小子! 鳴鼓而攻之可也]. 선진(先進)16에 기록되어 있는 공자의 준엄한 꾸짖음이다. 염구는 현실정치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도덕적 동기가 배제된 현실정 치의 승리는 결코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정치를 한단 말인가?

 

이 장의 어조도 선진16과 크게 차이가 없다. 여기의 계씨(季氏)는 물론 계강자(季康子)를 가리킨다. 이때 염유는 계씨(季氏)의 총재였다. 태산(泰山)은 중국인들의 상상력 속에서는 천하제일산(天下第一山)’이라고 불리우는 오악(五岳) 중의 으뜸가는 산이었다. 실제로 태산(泰山)1,545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그토록 크게 볼품이 있는 산이 아니다. 물론 산이라는 것은 밟아보면 그 영험스러운 맛의 깊이를 느낄 수 있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의 심상 속에서 태산이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신화적 상상력 속에서 태산지역이 그들의 모든 시조신(始祖神)들의 시원지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나는 이러한 관념의 사실적 근거를 확인할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중국인들에게는 그들의 문명이 바로 이 태산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어떤 막연한 로맨스가 있다. 중국인들에게 태산이 의미를 갖는 것은 마치 조선인들에게 백두산이 차지하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태산은 공자에게 이미 성스러운 산이었다. 사실 태산은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영험한 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습관으로 제후는 자기 영내에 있는 산()을 제사지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諸侯祭名山大川之在其地者. 예기』 「왕제]. 당시 태산은 노나라 영토 내에 있었다. 태산 주변에는 일절 산이 없다. 산동성(山東省)의 광활한 평원만이 전개된다. 이 광활한 평원 위에 갑자기 우뚝 솟은 태산의 장관은 대 지의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공자는 어려서부터 태산을 바라보고 자랐다. 날씨가 쾌청한 날이면 공자의 성장지로부터도 태산의 신비로운 자태는 더욱 신비스럽게 그 위용을 자랑하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태산의 신령에게 계씨가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공자로서는 참을 수 없는 참월(僭越)이었다. 일개 대부인 계씨가 태산에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본시 여()란 회의자(會意字)로 한 사람이 깃발을 들고 가면 그 뒤로 많은 사람이 줄지어 가는 행렬의 모습이다요즈음의 관광단체여행객처럼. 지금 우리가 여행(旅行)’이란 의미로 이 ()’의 글자를 쓰고 있지만, 옛날에는 산천(山川)에 제사 지내러 가는 행렬의 모습을 여()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러한 행렬이 나중에는 군대조직으로 전이되어 군행(軍行)의 집단(集團), 즉 여단(旅團)의 의미로 되었다주례(周禮)』 「대사도(大司徒)에 의하면 군오백인(軍五百人)이 한 려()가 된다. 계강자(季康子)는 태산으로 가서 여제(旅祭)를 지내고 말았던 것이다. 공자의 분노는 들끓었다. 염유에게 꾸짖어 말하였다: “그래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단 말이냐?” 염유의 대답은 단호하다: “,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염유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한 마디다. 자기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는 주제넘게 참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공자의 꾸지람의 불능(弗能)’이 염유의 대답 속의 불능(不能)’보다는 더 강한 어조이다. ()이 불()보다 발음적으로 더 강한 느낌을 주는 부정사였을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곧 탄식을 발한다: “오호(嗚呼)! 통재로다!” 그런데 사실 그 다음에 오는 말은 나로서는 정확한 해석이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임방(林放)을 갑자기 끌어들인 것도 그렇고, 전체적 의미맥락이 확연하게 와닿질 않는다. 착간이 있든지, 무엇인가 생략이 너무 심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증위태산불여임방호(曾謂泰山不如林放乎)?’의 통상적 해석은 이러하다. 여기서 태산(泰山)이란 제()를 받는 태산의 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로부터 제()를 지내지 않아야 할 곳에 지내든가, ()를 지내지 않아야 할 사람이 지내든가 하는 것을 음사(淫祀)’라 불렀다. 음사는 무복(無福)한 것이며 오히려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다[淫祀無福. 예기』 「곡례]. 태산의 신이 그런 음사를 구 분할 줄 모를 줄 아는가? 그렇다면 태산의 신이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林放)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혹자는 오호(嗚呼)! 증위태산(曾謂泰山)”에서 끊고 다음에 오는 구절을 독립시켜 해석한다. 그러면 다음의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오호라! 나는 일찍이 태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 나는 임방만도 못하구나!” 공자 자신의 자책감으로 푼다.

2) “오호라! 나는 일찍이 태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놈, 염유야! 그래 너는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만도 못하단 말이냐?”

3) “오호라! 염유야! 너는 일찍이 태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건만, 그래,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만도 못하단 말이냐?” ‘증위태산의 주어를 염유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보통의 발상 같으면, 제사 지내는 주체를 들어 꾸짖었을 것이다. 그 계씨(季氏)놈은 그래 임방(林放)만도 못한 놈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문장의 묘미와 강력함은 바로 제사 지내는 대상인 태산(泰山)을 주체로 부각시켰다는 데 있다. 그래 여제를 받고 계시는 태산의 하느님이 임방만도 못할 것 같으냐? 태산(하느님으로 의인화 된다)이야말로 계씨의 제사의 참란(僭亂)한 성격을 처음부터 꿰뚫고 있었을 것이라고 외치는 공자의 탄성은 계씨와 그것을 막지 못한 제자 염유에 대한 강렬한 저주의 일갈이었던 것이다.

 

 

는 음이 ()’. ‘()’는 평성이다. ()’는 제사의 이름이다. ‘태산(泰山)’은 산의 이름이다. 노나라 땅에 있다. 예로써 말하자면, 제후(諸侯)라면 봉토 내에 있는 산천에 제사를 지낼 수는 있다. 그러나 계씨의 신분으로 태산에 제사지낸 것은 참()이다. 염유는 공자의 제자이며 이름이 구()이다. 그 당시 계씨의 가신이었다. ‘()’라는 것은 참람되이 제사를 훔치는 죄를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오호(嗚呼)’는 탄식의 말[歎辭]이다. 이 장의 말씀은, 태산의 하느님은 예가 아닌 것은 흠향치 아니 하니, 계씨로 하여금 그 무익함을 깨달아 스스로 멈추기를 바라고, 또 임방을 추켜세워 염유를 면려케 하려 하심이다.

, 音汝. , 平聲. , 祭名. 泰山, 山名, 在魯地. , 諸侯, 祭封內山川, 季氏, 祭之, 僭也. 冉有, 孔子弟子, , , 時爲季氏宰. , 謂救其陷於僭竊之罪. 嗚呼, 歎辭. 言神不享非禮, 欲季氏, 知其無益而自止, 又進林放, 以勵冉有也.

 

범순부가 말하였다: “염유는 계씨에게 복종키만 하는 가신이었으니 어찌 부자께서 염유가 여제에 관하여 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모르셨겠는가? 그러나 성인은 사람을 가볍게 내치지 않으시고 자기의 마음을 다하신다. 어찌 염유가 사태를 구할 수 없다는 것과 계씨가 간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을 따지 시겠는가? 이미 바로잡을 수 없는 사태라고 한다면, 임방을 찬미하여 태산의 하느님이 모독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셨으니, 이 또한 사람을 간곡히 가르치고 타이르는 도()이다.”

范氏曰: “冉有, 從季氏. 夫子, 豈不知其不可告也, 然而聖人, 不輕絶人, 盡己之心, 安知冉有之不能救, 季氏之不可諫也, 旣不能正, 則美林放, 以明泰山之不可誣, 是亦敎誨之道也.”

 

 

근세의 유교논쟁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논의 자체가 항상 왜곡된 가설 위에 서있다. 종교를 초월적 유일신론을 전제로 해서 생각하거나, 마치 고등한 추상적 하느님(God)’의 개념과 그것에 수반되는 논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중심으로 대전제를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기독교라는 매우 특수한 종교형태와 그것에 자극을 받아 그 유일성을 보다 순화시킨 이슬람을 제외하면, 지구상에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삶과 더불어 편재하는 것으로 근원적으로 유일신관적 기준에 의한 신학적 논란의 대상이 될 여지가 없다. 자연의 힘을 숭화(崇化) 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관으로서 인간세에 모종의 질서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다원적 신성의 편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감과 함께 경외감을 수반하며 그것은 예ㆍ악의 요소로서 다양한 기능을 한다.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중국인 자신들이 서양의 초월적이고 위압적인 유일신관의 압박 아래 자신의 문화전통을 반종교적인 인문주의정신으로 규정하는 경 향이 있었다. 54운동 시기의 계몽사상가들의 대체적 흐름이었다. 중국은 본래 인문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이며 그 토대 위에 합리적인 과학을 수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풍요로운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흐름은 맑스ㆍ레닌주의를 수용한 마오쩌똥의 중국을 거쳐 오늘의 자본주의적 공산중국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고대문명을 허심하게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인문전통이라는 단일한 색조로써 문명지도를 다 색칠해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유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한 허버트 핑가레트(Herbert Fingarette, 芬格雷特, 1921~)는 이러한 막연한 인문주의적 전통에서 바라보는 유교의 상식을 깨고 공자에게 깊은 종교정신이 있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 그 자체를 성()으로 파악한 사상가며 그가 말하는 모든 도덕적 가치의 저변에는 종교적 느낌이 배어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예()라는 것도 근대적 의미에서 인간을 인문화시키는 방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존재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신성함의 표현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카토오 죠오켄(加藤常賢, 1894~1978), 아카쯔카 키요시(赤塚忠, 1913~1983),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1910~2006) 등등의 일본학자들은 고대중국 문명의 제의(祭儀)적 성격들을 인류학적ㆍ종교학적ㆍ언어학적 측면에서 매우 치밀한 언어로 치열하게 연구하였다. 이들의 학문세계에 있어서는 중국문명이 타문명에 비해 어떤 인문주의적 우월성을 갖는다기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종교 문화의 일반특성 속에서 중국고대문명도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고대중국을 바라볼 때 이러한 반종교적 인문성과 반인문적 종교성의 갈등은, 종교적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 다시 말해서 신성함(Divinity)과 그 신성함을 담지하는 언어적 개념들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근원적으로 해소되어야 할 문제일 뿐이다.

 

본 장에서 말하는 공자의 태산의 신에 대한 태도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종교문제로 고민하는 하등의 갈등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갈등의 본질은 모두가 유일신관의 폐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이 있으면 그 산에는 신이 있다. 산은 신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산의 하느님은 계씨의 참월을 알아차릴 정도로 현명하다. 뭇사람의 고혈을 빨아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행렬을 만들어 자기를 기쁘게 해준다고 제사를 지내는 인간의 우행을 가소롭게 바라볼 만큼 태산의 하느님은 상식적이다. 하느님이라도 예의 도덕성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공자의 하느님은 인간화되어 있는가? 하느님이 완벽하게 인간화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신과 인간의 거리는 필요하다.

 

그러나 공자에게 하느님과 인간의 거리는 하느님을 초월적 절대자로 만드는 거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인간화시키는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화 시키는 거리인 것이다. 정당치 못한 인간의 제사를 흠향하지 않는 하느님의 판단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화 되어간다. 그러한 믿음을 통해 인간은 정의로움의 궁극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의 인격성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유일신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만을 인간의 정당성의 기준으로 삼고, 질투와 강요와 폭력을 일삼는 헤브라이즘적 신성의 장에서는 진정한 도덕성이 성립할 수 없다. 모든 도덕은 변증법적 과정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헬레니즘의 다신론의 세계에 있어서도 역시 신들은 과도하게 인격화되어 있으며, 인격화되어 있는 만큼 과도하게 임의적이다. 이러한 임의성 속에서는 인간은 참으로 인간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과도한 인격성과 임의성, 상식적 인과를 거부하는 죽음과 부활의 임의성, 그러한 요소들과 헤브라이즘의 과도한 초월성이 결합한 그리스도론(Christology)의 세계를 암암리 종교성(religiosity)의 기준으로 삼는 한, 인류는 영원히 터무니없는 신화의 구속적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다. 그 굴레를 니체는 노예도덕(Slave Morality)이라고 절규했다. 그리고 초인을 말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초인의 가치를 은은하고 조용한 공자의 상식 속에서 완성시켜야 할 자 유로운 21세기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아니 한가?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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