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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5. 오랑캐 나라에 임금 있는 것과 중국에 임금 없는 것에 대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삼 - 5. 오랑캐 나라에 임금 있는 것과 중국에 임금 없는 것에 대해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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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오랑캐 나라에 임금 있는 것과 중국에 임금 없는 것에 대해

 

 

3-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오랑캐에게 군주가 있다 해도 그것은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군주가 없는 것만도 같지 못하다.”
3-5.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우선 텍스트의 배열상, 임방(林放)이 언급되고 있는 46은 하나의 세트로 간주되는 편집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의 테마를 집약적으로 다루고 있는 콘텍스트에서 4장과 6장 사이에 오랑캐(이적)와 중국(제하諸夏)() 나라의 봉건질서 속의 제국(諸國)의 우열을 가리는 어떤 정치적 언급이 끼어든다는 것은 좀 어색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 브룩스는 이 장을 착간으로 간주해 제14헌문18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미관중(微管仲), 오기피발좌임의(吾其被髮左袵矣)]’라고 한 그러한 의미 맥락과 상통하는 파편으로 제14편 속에 편집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이적(夷狄)과 제하(諸夏)의 가치우열적 언급이 논어곳곳에서 비치고 있지만 14-18에서 처음으로 이적(夷狄)을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 3-5장은 14-18장 뒤로 편집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브룩스는 근본적으로 논어의 유기적 연관성을 깊게 이해하지 못한 채, 외 면적 논리에 의해서만 배열을 마구 난도질하고 있지만 과연 그러한 시대적ㆍ논리적 재배열의 목적의식이 무엇인지가 도무지 분명치 않다. 논어의 내면적 깊이를 파악하는 데 하등의 도움을 주지 않는다. 본편에서 4-5-6장이 하나의 세 트를 이룬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4장과 6장은 임방(林放)이라는 캐릭터가 공통되고 있으므로 한 사람의 암송체계에 있어서 세트로 묶여 있었다는 것은 쉽게 전제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왜 이적(夷狄)과 제하(諸夏)의 문제가 갑자기 삽입되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편 집인들의 의식의 바닥을 흐르고 있는 내면적 논리인 것이다. 1-2-3이 하나의 세트이고, 45-6이 하나의 세트라고 본다면 이미 3장에서 예악의 근본적 가치가 인간의 인()함에서만 발현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예의 외면적 현상이 아닌 본질적 정신을 암시하였다. 이를 이어 4장에서는 임방이 바로 예의 근본을 문제삼았던 것이다. 그 대답인즉 예의 외면적이고 과시적인, 화려하기만 한 사이(奢易)가 아닌, 내면적인 소박하고 조촐한 인간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검척(儉戚)이야말로 예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6장의 계씨가 태산(泰山)에서 여제(旅祭)를 지낸 사건이야말로 지탄받아야 할 사이(奢 易)의 대표적 예에 속하는 것이다. 실제로 태산에 여제를 지낸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인원이 동원되며 매우 소모적인 사건이다. 계씨의 참월은 한계를 모르고 있다. 만약 태산이 계씨의 제사를 받아들인다면, 태산의 신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예의 본질을 묻고 있는 임방만도 못하다.

 

이러한 논리적 흐름 사이에 제하(諸夏)의 나라들이 임금도 없이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민중 사이에서 예악의 근원적 정신이 살아있으므로 외면적으로 군주만을 갖추고 강권적 하이어라키(hierarchy, 위계질서)의 정치를 하고 있는 오랑캐의 나라들보다는 더 낫다고 주장하는 제5장이 끼어있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이다. 5장은 인간세가 겉으로 보기에는 카오스적인 상태이지만 그 속에 진정한 예악의 코스모스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예악의 근본정신을 사회적으로 내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의 근본정신의 추구라는 째즈의 테마로서 3-4-5-6은 불가분의 한 유기적 멜로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46 사이에 5가 끼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코드의 텐션이 강화되면서 멋진 흐름이 형성되는 것이다. 브룩스가 바라보는 식으로, 바라보아서는 아니 될 서물이 곧 논어인 것이다.

 

논어속에 언급되고 있는 공자의 오랑캐중원(中原) 이외의 변방국가 관념의 정확한 외연을 우리는 설정하기가 어렵다. 때에 따라서는 초()나라나 월() 나라 정도도 이적(夷狄)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랑캐라는 관념이 공자의 의식세계에 있어서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5-6자로와의 그 유명한 뗏목대화에서는 오랑캐의 나라가 더러운 현실을 초극케 만드는 어떤 동경의 이상향으로 그려지기도 하며, 9-13에서는 실제로 구이(九夷)의 땅에 이민 가서 살고 싶어하는 공자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13-19에는 공자가 번지에게 중원의 나라에서 성립하는 도덕적 잣대를 이적(夷狄)의 나라에 가서도 동일하게 지켜야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즉 인()의 도덕은 제하(諸夏)와 이적(夷狄)을 가릴 바가 없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이 헌문편에 삽입되어야 할 파편이라고 주장하는 브룩스의 설은 전혀 그 당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앞서 충분히 논의했듯이, 공자 언급의 표면적 논리의 배면에는 라고 하는 주제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또 제하(諸夏)와 이적(夷狄)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주와 신주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브룩스의 일면적 논리로써만 그 위치를 조정해야만 할 당위성이 생겨나지 않는다. 나는 이 장의 해석에 관해 고주를 따르는 것이 소박한 풀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산(茶山)은 신주의 입장을 강변한다.

 

포씨(苞氏)의 설을 인용하고 있는 고주 그 자체는 이 구문의 해석에 관해 포편의 여지를 남기는 언급이 전혀 없다. ‘제하(諸夏)는 중원의 나라들을 말한 것이다. ()이란 없다는 뜻이다[제하(諸夏), 중국야(中國也). (), 무야(無也)]’

 

이적(夷狄)과 제하(諸夏)에 관해 강한 포폄을 드러내는 해석은 6세기 전반에 성립한 황간(皇侃)의 소()가 그 대표적 예이다.

 

 

 

이 장은 중국을 중시하고 오랑캐를 천시하고 있다. 제하란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다. 망이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오랑캐에게 비록 군주가 있다 해도, 그것은 중국에 군주가 없는 상태에도 못 미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此章, 重中國, 賤蠻夷也, 諸夏, 中國也. , 無也. 言夷狄雖有君主, 而不及中國無君也.

 

 

이에 대해 송유(宋儒)들의 주석은 매우 다르다. 이적에게조차 군주가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키고 있다. 지금의 중국이 무정부ㆍ무군주의 참란(僭亂)한 상태에 있는 것과 같지 않다. 이적(夷狄)에게도 군주가 있으니 제하(諸夏)에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라고 읽는 것이다. 즉 중원(中原)국가들의 무질서한 참란(僭亂)상태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촉구하는 공자의 언급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장을 공자가 계씨의 난()을 비판하는 언급으로 풀기도 하고, 중원(中原)의 제국(諸國)근친상간, 하극상(下剋上)의 정권다툼으로 군주를 시해하기를 밥먹듯이 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한 개탄으로 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배면에는 주희가 정강지변(靖康之變)으로 나라를 잃은 남송(南宋) 정권의 주전파(主戰派)이데올로기를 구현한 사상가라는 사실 또한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주자의 강력한 모랄 리고리즘(moral rigorism, 도덕적 엄격주의)의 배면에는 이러한 망국(亡國)에 대한 깊은 반성이 숨어있으며, 결코 정당 화될 수만은 없는 문제이지만 구법당계열 사람들의 누적된 원한 같은 것이 깔려 있다. 나는 이러한 송유(宋儒)의 해석에도 일리(一理)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억지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황간(皇侃)의 소()는 중국에서는 유실되어 없어졌으나, 후일 일본에서 발견되어 소라이(荻生徂徠)의 제자, 네모토 손시(根本遜志)가 관연(寬延) 3(1750) 이를 출판하여 중국에 역수입되었던 것이다. 청조의 건륭제(乾隆帝)가 칙명을 내려 궁정판으로 복각시켰는데, 재미있게도, 이 부분에 관한 황간(皇侃)의 소()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주자(朱子)의 설()에 가까운 언어로 대치시켜 놓고 있다. 아무리 이적(夷狄)에게 군주(君主)가 있다 해도 중국(中國)의 무군(無君)상태에도 못 미친다고 하는 황간(皇侃)의 해석은 중국인(中國人)의 반만(反滿) 감정을 자극시키고 한족(漢族)의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을 고취시키는 아주 난처한 상황을 초래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사상통제는 바로 이러한 주해의 문제에서부터 민감하게 얽혀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구문이 반드시 황간이 말하듯이 중국(中國)을 중시하고 만이(蠻夷)를 천시한다[중중국(重中國), 천만이(賤蠻夷)]’를 표방하는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여기서 공자는 중국(中國)의 무군(無君)상태에 대한 비판적 어조를 결코 감추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일관된 생각은 제하(諸夏)에는 군주가 없다 할지라도, 이적(夷狄)의 나라에 군주가 있어 돌아가는 것만큼의 또 다른 질서가 정치질서 배면에 있다는 것이다. 즉 군주의 유무(有無)는 한 국가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일차적이고 원초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군주제(君主制)의 정치질서 배면에 있는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질서, 그것을 공자는 사문(斯文)’이라 부르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예악(禮樂)’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라는 것이다. ()에서 우러나오는 예악(禮樂)만 있어도 무군주(無君主)ㆍ무정부(無政府)의 무질서를 감당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제도의 카오스의 밑바닥에 오히려 민중의 코스모스가 살아있는 사회가 근원적으로 더 건강하고 더 경쟁력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시대의 질서정연한 모습이 인간세의 바람직한 이상향일 수는 없는 것이다. 공자는 제하(諸夏)의 문화에 대한 강렬한 자긍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적(夷狄)에 대한 천시나 혐오감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적(夷狄)은 단지 제하(諸夏)의 비극적 상황을 돋보이게 하는 항목으로서 원용(援用)되었을 뿐이다.

 

왜 중국(中國)을 제하(諸夏)라고 부르는가? 사실 왜 중원(中原)의 나라를 하()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정설(定說)이 없다. 그러나 최근의 문자학의 성과로 비추어 볼 때, ()라는 글자의 원의는 역시 예()와 관련된 것으로, ‘여름이라는 뜻은 하()라는 상형자의 가차(假借)로 여겨진다. ()는 상형자(象形字)로서 의()ㆍ용()을 갖추고 춤을 추는 사람의 모습이다. 설문(說文)에 이르기를, ‘중국(中國)의 사람모습이다. ()에 따르고, (𦣻)에 따르고, ()에 따른다. ()는 양수(兩手), ()는 양족(兩足)이다.’라고 했는데, ()는 성대히 차려입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것이 곧 개명한 사람, 문명인의 모습이다. ()는 문아(文雅)ㆍ문명(文明)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인 것이다. 하왕조(夏王朝)는 원래 서북지구의 채도문화권(彩陶文化圈)의 고왕조로서 전승되어온 나라이며 나중에 그 자리에 주()ㆍ진()이 흥하였던 것이다. 이 하()의 이름도 여름의 뜻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무용(舞容)’성장(盛粧)을 갖추고 춤추는 모습의 문명인들의 나라라는 뜻과 관련된 것이다. ()가 여름의 뜻으로 쓰이는 것은 춘추기의 금문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인데 이때의 하는 가차자(假借字)이다. 따라서 공자가 여기서 쓰고 있는 제하(諸夏)라는 표현도 이미 그러한 무용(舞容)의 제식과 문화에 대한 어떤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제하(諸夏)라는 말 자체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민족국가적 의미맥락에서의 중국이라는 협의의 개념이 아니라, ‘문명화된 나라들(civilized countries)’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국가의 근간은 군주의 유무(有無)가 아니다. 군주는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예악(禮樂)만 바로 서있으면 흔들림이 없다. 허나 이적(夷狄)의 나라는 좋은 군주가 있을 때는 흥()하고 좋은 군주가 없을 때는 망()하고 마는 것이다. 즉 군주만 있고 문화가 없는 것이다.

 

  군주(君主), 정치질서 문화(文化), 문명질서
이적(夷狄)
오랑캐
() ()
제하(諸夏)
문명국가들
() ()

 

 

오역(재로才老)은 말하였다: “‘()’은 옛날에는 ()’자와 통용되었다.”

吳氏曰: “, 古無字通用.”

 

정이 천이 말하였다: “이적(夷狄)조차 일찍이 훌륭한 군장(君長)이 있다. 제하(諸夏)가 참람하고 어지러워 도리어 상ㆍ하의 구분조차 없어진 꼬락서니와 같지 않다.”

程子曰: “夷狄, 且有君長, 不如諸夏之僭亂, 反無上下之分也.”

 

윤언명은 말하였다: “공자께서 당시의 어지러운 세태에 상심하시어 개탄하신 것이다. 제하에 군주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실제로 없다는 것이 아니요, 비록 있다 할지라도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개탄하신 것이다.”

尹氏曰: “孔子, 傷時之亂而歎之也, , 非實無也, 雖有之, 不能盡其道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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