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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태어남 - 3장 일본이 있기까지, 빛은 서방에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태어남 - 3장 일본이 있기까지, 빛은 서방에서

건방진방랑자 2021. 6. 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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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은 서방에서

 

 

조몬 문화처럼 채집과 어업에 의존하는 사회는 인구 이동이 잦기 때문에 온전한 정착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야요이 문화의 도입으로 농경이 지배적인 생활 형태가 되면서 비로소 일본에서는 곳곳에 씨족사회들이 생겨났다. 일본은 가장 큰 섬인 혼슈만 해도 한반도 전체보다 조금 클 정도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인구 밀도는 적지 않았다. 이 인구가 씨족사회로 편제되자 이내 씨족들 간에 격심한 경쟁과 전쟁이 잇달았다. 제법 큰 규모의 씨족사회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중국과 직접 교섭을 시작했다.

 

200~300년에 걸친 전란 끝에 드디어 강력한 씨족국가가 탄생했다. 당시 일본은 문자도 없었고 직접 역사를 기록하지도 못했으므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이 문헌은 한반도의 상고사에 관해서도 귀중한 정보를 주는 역사서다)에 이 국가가 등장한다. 바로 일본 최초의 국가 형태라 할 수 있는 야마토(邪馬臺) 정권이다.

 

야마토 정권은 여러 부족의 족장들이 힘을 합쳐 28개 씨족사회를 복속시켜 이루어진 나라였다. 왕은 있었지만 아직 왕위 세습이 이루어지는 단계가 아니었고 부족장들이 협의해 추대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야마토의 왕은 정치적ㆍ군사적 실력보다도 종교적 권위가 우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보면 왕은 일종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족 사회 특유의 모계적 전통도 강했으므로 여왕이 즉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 천황가의 신적 조상으로 지금도 전통 신앙인 신도(神道)의 주요 신으로 섬겨지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도 태양의 여신이다.

 

야마토 정권은 그 기원도 외부에서 온 사람들일본인들은 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에서 고대의 외부인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른다이 계기가 되었지만, 발달하는 과정에도 외부 문화의 도움이 컸다. 고대 로마인들은 문명이 동쪽(그리스와 오리엔트)에서 왔다는 뜻으로 빛은 동방에서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에는 빛은 서방에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 외부 문화는 중국의 것이었으나 그것을 전달한 사람들은 바로 일본 서쪽의 한반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변한인들이 최초의 도래인이었다면, 야마토 시대에 그 역할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찌감치 고대국가를 확립하고 있던 백제인들이 담당했다. 4세기 중반과 후반에 백제의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논어(論語)천자문을 전한 것을 비롯해 백제인들은 한자와 한문, 각종 과학과 기술 등 선진 문화를 일본에 보급했다.

 

5세기 후반에는 백제의 귀족과 유력가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왔는데, 이것은 백제의 국내 사정에 기인한다. 475년에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침공으로 개로왕(蓋鹵王)이 죽고 수도가 함락되는 비극을 당한다. 이로 인해 백제는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권력자들 사이에 내분까지 일어나게 되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사실상 백제가 망했다가 재건국한 것으로 본다. 그 과정에서 백제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했다. 백제의 실력자들까지 일본행을 택할 정도로 당시 일본과 백제의 관계는 아주 돈독했다고대 일본 천황의 가계에 백제 혈통이 있다는 설은 그 점을 말해준다. 어쨌든 한반도 고대 삼국 가운데 백제가 일본과 관계를 맺고 왕래를 가졌다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8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역사서 니혼쇼기(日本書紀)에도 한반도 삼국 가운데 유독 백제에 관한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또 우리나라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60년 백제가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 멸망당할 때 일본이 군함 400척을 보내 백제를 지원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한반도의 선진 문화는 규슈뿐 아니라 일본 본토에까지 널리 퍼져 5세기경에는 야마토 정권의 세력이 간토(關東) 지방(지금의 도쿄 일대)까지 파급되었다(대개 문명은 그 빛이 처음 전해진 곳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마련인데, 규슈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자체 문명의 토양도 어느 정도 형성 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때부터 비로소 야마토의 왕권은 크게 강화되기 시작했고 왕위 세습도 이루어졌다. 이 무렵의 왕들은 초기 야마토 정권의 왕처럼 종교적 권위만 가진 게 아니라 정치ㆍ군사ㆍ제사의 모든 권한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권력자였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를 통해 계속 선진 문물을 전해 받으면서도 한반도의 고구려ㆍ백제ㆍ신라와 대등한 관계를 자처했으며, 때로는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류는 뭔가 특별한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주로 중국의 인정과 승인을 받음으로써 주변 부족들에 세력을 과시하고 아직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야마토 정권 후기의 왕들(이들은 오키미로 자처했는데, ‘대왕이라는 뜻이다)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본 천황의 기원이 된다. 일본 전 역사를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존경받는 영웅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가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중국의 왜인. 6세기 중국 남조의 한 나라였던 양()의 문헌에 기록된 왜국 사절의 모습이다. 야마토 정권 시절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국호가 없었으므로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일본을 왜국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백제의 사절과 함께 중국에 조공하러 오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야마토 정권은 부족 연맹체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정식 고대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후기에 들어 왕권은 상당히 강화되었으나 아직 다른 부족장들을 경제적ㆍ군사적으로 굴복시킬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다. 왕위 세습 역시 왕이 직접 자기 아들에게 계승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왕가의 가계만 고정되어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왕족 중에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족장들의 발언권이 강했다. 당연히 세력이 큰 씨족들 간에 다툼이 없을 수 없었다.

 

대규모 씨족 집단들은 군사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권력 다툼이 대단히 치열하고 살벌했다(니혼쇼기는 왕위 계승을 둘러 싼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6세기 중엽 불교를 공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립한 끝에 불교 공인에 찬성한 소가(蘇我)씨의 세력이 오토모(大伴), 모노베(物部) 등 권력가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권력을 잡은 소가 우마코(蘇我馬子, ?~626)는 자기 집안의 어린 딸을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정했는데, 그 섭정이 바로 쇼토쿠 태자다.

 

쇼토쿠 태자는 왕을 권력의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건국자는 빈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야 하므로 할 일이 많게 마련이다. 쇼토쿠는 행정 구조를 쇄신해 관료 기구를 창설하고, 17조의 헌법을 제정하고, 덴노기(天皇記)고쿠기(國記)등 일본 최초의 역사서들을 편찬하며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당시 신흥 종교였던 불교를 열심히 보급했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인 씨족의 구분을 극복하고 귀족 세력의 사상적 통일을 꾀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컸다.

 

이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과 국교를 맺으려 했다. 이전까지는 왕권의 강화라는 소극적인 목적에서였다면, 이제부터는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수평적으로 교류하려는 것이었다. ‘천황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인데, 이것 역시 중국의 천자와 대등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쇼토쿠는 607년에 중국의 통일 제국 수에 보내는 국서에서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 이듬해에는 동천황(東天皇)이 서천황(西天皇)에게 아룁니다.”라는 내용의 국서를 보낸다. 물론 수의 황제인 문제는 태자의 의도처럼 일본을 대등한 관계로 여기지 않고 조공국으로만 보았지만, 그래도 당시 일본의 자주적 의식은 이후 일본이 중화 세계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일본의 토대를 닦은 인물. 일본 고대사의 영웅 쇼토쿠 태자의 화상이다. 양 옆에 두 아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당시의 실력 가문인 소가씨와 공동 정권을 구성해 일본 고대국가의 주춧돌을 놓았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

빛은 서방에서

왜에서 일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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