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태어남 - 3장 일본이 있기까지, 왜에서 일본으로(쇼토쿠 태자)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태어남 - 3장 일본이 있기까지, 왜에서 일본으로(쇼토쿠 태자)

건방진방랑자 2021. 6. 4. 14:00
728x90
반응형

 왜에서 일본으로

 

 

불교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쇼토쿠 태자는 만년에 들어 현실 정치에 흥미를 잃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622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태자와 더불어 강력한 소가씨의 수장으로 군림한 소가 우마코도 4년 뒤에 사망했다. 이로써 약 30년 간 장기 집권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 고대사의 두 기둥은 사라졌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군림하는 법이다. 최고 세력가인 소가 가문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때마침 대흉작과 대기근이 들어 사회 전체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사회 불안은 사실 단기적인 흉년만이 원인인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왕족과 귀족, 세력가들이 각자 영지를 늘리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하고 재생산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이 마침내 곪아터진 결과이기도 했다. 소가 우마코의 뒤를 이은 소가 에미시(蘇我蝦夷, ?~645)와 그의 아들 이루카(入鹿, ?~645)는 호랑이가 사라진 숲에서 여우의 노릇을 너무 심하게 했다. 그들은 과거 귀족들의 횡포를 답습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스스로 천황을 자처할 정도로 만용을 부렸다.

 

모처럼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국가 체제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몇 마리 때문에 위협을 받을 즈음, 소가씨의 전횡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한데 뭉치지 않으면 함께 몰락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들은 나카노 오에(中大兄, 625~672) 태자와 나카토미 가마코(中臣鎌子, 614~669)를 중심으로 뭉쳤다. 이렇게 해서 개혁의 주체가 형성되었는데, 때마침 개혁의 모델도 있었다. 7세기 초ㆍ중반은 동아시아 전역이 급변하는 정세 속에 휩싸여 있던 시기다. 중국에서는 오랜 분열기가 끝나고 대륙 통일이 이루어진 뒤 신흥국 당()이 안정된 기반을 닦아나가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역시 중국의 지원을 업은 신라가 세력을 떨치며 삼국 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국제 정세에서 일본의 개혁 세력은 율령을 갖추고 법과 관료제에 의한 정치를 다져나가는 당이야말로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여겼다.

 

645년에 그들은 대담한 쿠데타를 거행했다. 조정에서 외국의 국서를 읽는 자리를 틈타 천황 앞에서 이루카를 살해한 것이다. 쿠데타로 실각한 에미시는 자기 집을 불태우고 자결했다. 소가씨의 우두머리가 죽은 다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가로막을 게 없었다. 그들은 다른 황족과 귀족 들이 지지하는 가운데 소가씨의 잔당을 토벌하고, 소가씨가 세운 고교쿠(皇極, 594~661) 천황을 폐위시킨 뒤 그의 동생 고토쿠(孝德, 596~654)를 천황으로 옹립했다. 나카노오에는 다시 그의 태자가 되고 가마코는 행정 수반을 맡아 두 사람이 전권을 장악했다. 한 세대 전의 지배자였던 쇼토쿠 - 소가 우마코 페어의 완벽한 재현이다.

 

그 쿠데타를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라고 부른다. 집권 직후 중국의 연호 제도를 본받아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다이카라는 연호를 정했기 때문이다. 연호와 더불어 온갖 개혁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 모델은 물론 중국이었다. 개혁 세력은 먼저 황족과 귀족, 호족 들의 모든 토지와 농민당시 농민은 부민(部民)이라고 불렸는데, 토지와 함께 귀족들의 소유물처럼 취급되는 노예나 다름없었다을 몰수해, 전 국토와 백성을 천황이 지배하는 공지(公地)와 공민(公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행정 기구를 갖추고 전국을 국(), (), ()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조세제도도 중국을 본떠 조용조(租庸調)(, 토지에 매기는 세금, 즉 농작물), (, 사람에 매기는 세금, 즉 부역), (調, 비단이나 베 같은 옷감 또는 지역 특산물라는 단일한 제도로 묶었으며, 원활한 세수 집행을 위해 호적을 만들었다.

 

속미지정
粟米之征
() 곡식
전조(田租)
력역지정
力役之征
() 노동력
요역(徭役)
포루지정
布縷之征
(調) 특산물
공물(貢物)

 

중앙집권 체제와 행정제도, 조세제도를 갖추었다면 명실상부한 국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이카 개신으로 일본은 비로소 고대 국가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667년 나카노 오에는 수도를 아스카(飛鳥)에서 오쓰(大津)로 옮기고 이듬해에는 천황에 올라 덴지(天智) 천황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나라든 개국 초기에는 정권이 불안정한 법이다. 특히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669년 개혁의 일등공신인 가마코가 사망하고, 2년 뒤 덴지마저 죽자 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두 인물이 사라졌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단행한 것만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과 이후 정세마저도 쇼토쿠 태자-소가 우마코 페어를 재현한 셈이다.

 

덴지가 죽자 계승권자인 아들 오토모(大友)와 덴지의 동생인 오아마(大海)는 조카-삼촌 관계가 무색하게도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 다툼은 삽시간에 일본 전역에 걸친 내전으로 발전했다. 이 내전은 한반도와 연관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당시 한반도에서는 신라에 의해 삼국 통일이 이루어진 직후였다), 일본의 조정에는 백제계 유민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반대 세력인 오아마에게는 신라계 도래인들이 협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와 신라가 일본 땅에서 다시 대결한 셈인데, 결과는 한반도에서처럼 신라계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오아마가 덴무(天武, 631~686) 천황으로 즉위했다. 임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 역사에는 이 사건을 진신(壬申)의 난이라고 부른다(훗날에는 역사적 사건의 명칭에 일본의 연호가 들어가지만, 이 무렵에는 아직 연호가 일반화되지 않은 듯하다).

 

정권을 잡은 덴무는 잠시 내전으로 중단된 개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는 먼저 시급한 관리 임용 제도를 완비하고, 지배 세력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불교를 중흥시켰다. 특히 덴무는 천신만고 끝에 천황 위에 오른 탓인지, 천황의 존엄성을 새삼 과시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천황으로 있는 14년 동안 신하를 두지 않고 만사를 독재로 일관해 신적인 권위를 확립했다.

 

신라계의 도움으로 승리했으므로 당연히 신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덴무는 한반도에 통일 국가를 건설한 신라의 경험을 열심히 배워 새로운 율령도 반포했다. 이 율령을 모델로 삼아 701년에는 다이호 율령(大寶律令)이 제정됨으로써 일본은 명실상부한 고대 국가로 발돋움했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일본이라는 오늘날의 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우리는 지금까지 편의상으로 일본이라는 명칭을 써왔다). 그 이전까지는 야마토라는 국호를 계속 쓰면서 한자 표기로는 ()’, ‘대화(大和)’라고 했는데, 이제는 해가 뜨는 곳일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대화(大和)에서 나온 화()는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에게 친숙한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화식(和食)은 일본의 전통 음식을 가리킨다. 일본이라는 국호를 새로 제정한 이유는 야마토 정권처럼 한 지역에 국한된 국가가 아닌 전국적인 고대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지만(물론 오늘날과 같은 일본 전체를 말하는 건 아니고 간토 지방까지만을 말한다), 당시 중국과 한반도에서 ()’라는 경멸적인 이름을 사용한 데 대한 반발도 작용했을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

빛은 서방에서

왜에서 일본으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