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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통일과 분열, 분열과 통일: 하극상의 시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통일과 분열, 분열과 통일: 하극상의 시대

건방진방랑자 2021. 6. 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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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극상의 시대

 

바쿠후의 권력이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전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책봉으로 확보된 외부의 권위도 무사 정권 특유의 불안정성을 말끔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전통의 적인 세력 가문들의 도전은 그럭저럭 물리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지역 사회에서 성장한 슈고들이 바쿠후의 권력을 위협할 만큼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바쿠후는 권력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슈고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슈고를 휘하에 복속시키면 유사시에 군사를 모으기도 쉬울뿐더러, 대개의 반란을 슈고가 일으키므로 위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의미도 있었다. 따라서 바쿠후는 슈고들을 배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슈고들은 전통의 장원 영주들을 잠식하면서 대영주로 성장했다. 슈고 출신이 다이묘가 되었기에 그들을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라고 부른다.

 

처음에 무로마치 바쿠후는 신흥 세력인 슈고 다이묘의 성장을 반기면서 이들을 통해 지역 사회의 무사와 농민 들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예전의 슈고와는 명칭만 비슷할 뿐 질적으로 다른 슈고 다이묘는 바쿠후의 통제마저 달갑게 여기지 않을 만큼 힘이 커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찍이 가마쿠라 바쿠후를 붕괴시키는 데 일조한 무사들의 아쿠토나 백성 묘슈들이 결성한 ()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아졌다. 사회적 계층 분화로 성장하고 신품종 벼와 삼모작 등 농업 기술의 발달로 부유해진 백성 묘슈들은 예전처럼 다이묘의 지배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고 걸핏하면 들고일어났다. 15세기 초까지 그들은 거의 해마다 봉기와 폭동을 일으켰는데, 그 와중에 전국적으로 중세식 장원제도의 잔재가 제거되었다. 심지어 1459~1461년간에는 가뭄과 홍수의 천재지변이 몇 년간 계속되자 각지의 백성들이 교토로 몰려와 바쿠후에게 덕정(德政)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바쿠후는 이에 굴복해 13차례나 덕정령이라는 특별 조치를 발표해야 했다덕정령은 가마쿠라 시대에도 있었지만 무로마치 시대에는 내용이 달라졌다. 가마쿠라 시대의 덕정령은 생활이 어려워진 고케닌의 채무를 파기해주는 것이었는데, 초기에는 고케닌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그들을 더욱 궁지로 몰았다(근본적으로는 화폐경제로 바뀌는 시대적 추세에 고케닌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 컸다). 고케닌이 가마쿠라 바쿠후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와 달리 무로마치 시대의 덕정령은 고케닌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재정난을 해소해주는 내용이었으므로 일종의 빈민 구제책이었다.

 

 

슈고 다이묘의 저택 일부 유력 슈고들은 강화된 권한을 바탕으로 바쿠후에 도전했다. 이 무렵부터 슈고에 지방 유력자라는 뜻의 다이묘가 붙어 슈고 다이묘라는 말이 생겼다. 바쿠후는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토에 거주하도록 강제했다. 그림은 낙중낙외도 병풍에 묘사된 슈고 다이묘 호소카와씨 저택이다.

 

 

이렇게 사회 전반적으로 동요가 심해지자. 마침내 바쿠후 권력 상층부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무사 권력답게 대응책은 역시 싸움이었다. 남북조시대 이래 50여 년간 소규모의 반란 외에는 비교적 평화와 안정을 누린 바쿠후는 1467년에 둘로 편을 갈라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쇼군 직의 계승을 둘러싸고 당시 바쿠후의 세력 가문인 호소카와(細川)와 야마나(山名)가 맞붙은 것이다.

 

이것을 오닌(應仁)의 난이라고 부르는데, 단순한 권력투쟁에서 비롯되었지만 때가 때인 만큼 삽시간에 일파만파로 번졌다. 전국 각지의 슈고 다이묘들이 복잡하게 연루되면서 이 사태는 무려 11년간이나 질질 끌었다. 결국 나중에는 싸움에 참가하는 무사들이 없어 흐지부지되었으나, 이 와중에 그나마 꺼져가는 불씨와 같은 처지였던 천황이나 쇼군 같은 전통적 권위는 완전히 잿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권위의 실체와 상징이 사라지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졌다. 다이묘와 무사 들은 천황만이 아니라 쇼군조차 이빨 빠진 호랑이로 보았다. 백성 묘슈들마저도 지역의 다이묘나 중앙의 바쿠후를 우습게 여겼다. 당시에 생겨난 말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일상용어로 사용되는 하극상이다.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하극상과 전란의 회오리는 다이묘와 무사 들의 영토 전쟁으로 바뀌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한 세기 동안 일본 전역은 전란으로 얼룩진 센고쿠(戰國) 시대로 접어든다.

 

기존의 전통이나 서열, 권위 등이 모조리 몰락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슈고 다이묘든, 고쿠시든, 백성 묘슈든 경제적 부와 대세를 읽는 눈을 가진 자들은 누구나 대영주가 될 수 있었다. 그 반면 그런 실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무로마치 바쿠후와 함께 급격히 몰락했다. 심지어 조정과는 다른 별도의 연호를 만들어 쓰는 지방도 생겨났다(연호는 단일 정부의 상징이다), 1502년에 고카시와바라(後柏原, 1464~1520) 천황은 돈이 없어 즉위식도 치르지 못하게 되자 헌금을 명했으나 담당 관리가 거부하는 굴욕을 당했다. 일본 역사상 센고쿠 시대만큼 천황의 권위가 실추된 적은 없었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 하극상이 지배하는 센고쿠 시대에는 출신도 배경도 알 수 없는 무수한 영웅들이 출현했다. 당시 일본의 야사를 장식하는 사이토 도산(齋藤道三)이나 호조 소운(北條早雲) 등의 센고쿠 다이묘들이 그들이다. 이들의 생활 수칙은 무시무시하면서도 황당했다. “강도질은 무사의 습성이다.” “부부가 한자리에 있을 때에도 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를 거치면서 발달한 일본 특유의 무사도 정신은 하극상의 시대에 도둑 떼의 처세술로 변질되고 말았다1950~1960년대에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는 센고쿠 시대를 주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대하소설을 썼다. 일본에서 얻은 큰 인기를 바탕으로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대망(大望)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1980년대까지도 정치가와 기업가는 물론 사회운동가들도 역사의 지혜를 배운다는 의도에서 이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도대체 그들은 난세를 지배한 일본의 무뢰패들에게서 무엇을 배우려한 걸까? 냉전 시대, ‘대망이라는 허황한 제목, 작가의 극우적 성향이 열렬한 반응을 얻었던 그 시대 우리 사회는 16세기 일본의 센고쿠 시대처럼 황폐했다.

 

 

센고쿠 시대의 출발 오닌의 난의 전투 장면이다. 살얼음 같은 평화가 유지되던 남북조시대가 끝나자마자 150년에 걸친 전란,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림에서와 같은 치열한 전투는 초기에만 있었을 뿐 오닌의 난은 미적지근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질질 끌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천황이나 쇼군의 전통적 권위가 약화되면서 하극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그래도 답은 바쿠후

하극상의 시대

떠오르는 별,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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