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인들의 세상이 열리다
권좌에 오른 무사들
미나모토를 무찌르고 권력의 핵심에 오른 다이라 기요모리는 순수한 무장이었으니 정치와 행정의 경험이 있을 리 없다. 모르면 베껴라. 그는 바로 전까지의 권력 구조였던 칸 정치를 흉내 내기로 한다. 우선 천황의 외척이 되면 부족한 권력의 정통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천황부터 갈아치워야 한다. 그래서 그는 1169년에 자신의 조카, 즉 고시라카와(後白河, 1127~1192) 천황과 자기 처제의 여덟 살짜리 어린 아들을 내세워 다카쿠라(高倉, 1161~1181) 천황으로 삼고 자기 딸을 황후로 들였다【이 천황 부부는 서로 이종사촌인 셈인데, 고대에는 어느 나라 역사에서는 왕실 내에 근친혼이 잦았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는 서로 장인-사위이자 처남 - 매부였고(김유신의 누이동생이 김춘추의 아내였는데 나중에 김춘추가 딸을 김유신에게 주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과 고려 태조 왕건도 그랬다(경순왕은 왕건에게 누이를 시집보냈고 왕건은 그보답으로 자기 딸을 경순왕에게 주었다). 우리 역사에서 근친혼이 사라지는 것은 유교 문화가 꽃피우는 조선시대부터다】. 12년 뒤 다카쿠라의 세 살짜리 아들을 안토쿠(安德, 1178~1185) 천황으로 옹립함으로써, 기요모리는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기요모리가 능한 부분은 권력을 차지할 때까지였다. 그는 권력자로서의 권위는 있었어도 정치가로서는 신통치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셋칸 체제를 거의 바꾸지 않고 답습했다. 결국 정권의 임자만 바뀌었을뿐 정치도 달라지지 않았고 경제적 토대도 변함없이 장원과 지쿄코쿠(知行國)였다.
새로운 정권이라고 부를 만한 점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무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촌놈’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예고했다. 힘으로 권좌에 오를 수 있다면 더 힘센 자가 나타날 경우에는 권좌를 내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다이라 가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할 게 뻔했다.
“다이라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말이 나돌 정도로 다이라 가문은 독재와 폭정으로 일관했다. 자연히 정권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이라는 300명의 소년들을 교토 시내에 풀어놓고 불만분자를 색출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저항세력이 더욱 결집했다. 이윽고 저항 세력에도 핵심이 생겼다. 한때 맞수였던 미나모토 가문이었다.
일찍이 후지와라의 무사 집단으로 출범한 미나모토는 주군인 후지와라 가문이 몰락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 호겐, 헤이지의 난 시절에 다이라와의 2연전을 모두 패한 이후 군소 가문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면 기회는 오게 마련이다. 헤이지의 난에서 체포되었다가 열세 살의 어린 나이 덕분에 처형을 모면하고 유배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가 수장이 되면서 미나모토 가문은 다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다이라와 더불어 양대 무가를 이루었던 미나모토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다이라와 맞붙은 싸움에서 또다시 패했다. 호겐과 헤이지까지 합치면 3연패를 당한 셈이었다. 더 이상 정면대결을 벌여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요리토모는 먼저 자신의 세력부터 튼실하게 구축하는 작전으로 바꾸고, 1180년에 교토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간토 지방의 가마쿠라(鎌倉, 지금의 요코하마 남쪽)에 근거지를 차렸다.
요리토모는 이 일대의 다이묘(大名, 영주)와 무사 들을 고케닌(御家人)이라는 무사 집단으로 결속시키고, 이를 통제하는 기관으로 사무라이도코로(侍所, 사무라이의 처소)를 설치하는 등 다이라와의 일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사촌인 미나모토 요시나카(源義仲)가 북부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일으켰다. 이로써 일본의 세력 판도는 다이라 가문과 두 미나모토 가문이 정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더구나 이들 가문과 무관한 중소 가문들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일본 전역이 서서히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마침내 요리토모에게 기회가 왔다. 중대한 고비를 맞아 1181년 다이라 기요모리가 병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다이라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기요모리는 “요리토모의 목을 내 무덤 앞에 바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으나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리토모와 요시나카가 다툼을 벌이는 동안에는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명맥을 좀 더 연장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 요리토모가 승리하면서 다이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준결승을 KO로 이기고 결승에 오른 요리토모는 다이라를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다이라는 안토쿠 천황과 고시라카와 상황을 데리고 서쪽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판에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졌다. 고시라카와가 가문에 등을 돌리고 몰래 진영을 도망쳐 나와 미나모토 측에 붙은 것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그는 상황이라는 자격을 이용해 다섯 살짜리 손자인 고토바(後鳥羽, 1180~1239)를 천황위에 올렸다. 다이라와 미나모토 두 가문이 별도의 천황을 옹립했으니, 같은 시대에 두 명의 천황이 공존하는 희한한 사태다.
▲ 첫 쇼군의 위용 일본 역사상 최초의 쇼군인 요리토모의 초상화다. 파란만장한 전투 끝에 바쿠후를 세우고 무사 계급의 정권을 연 그는 이 그림처럼 위풍당당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 위엄 뒤에는 적의 가문을 몰살하고 자기 동생들마저 죽인 일인자의 냉혹함이 숨어 있다.
이 비정상적인 국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1185년 요리토모의 동생 요시쓰네(義經, 1159~1189)가 지휘하는 군대가 단노우라(壇の浦, 지금의 시모노세키 부근 해협)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다이라와 최후의 해전을 벌여 마침내 적을 궤멸시켰다. 여덟 살의 어린 천황 안토쿠를 비롯해 다이라 측 황족들 대부분이 바다에 투신하는 비극으로 끝난 단노우라 해전은 일본 역사상 가장 비장한 전투로 꼽힌다.
오랜 전란이 끝났다. 후지와라 시대부터 따지면 근 한 세기에 걸친 내전이었다(물론 내전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후의 승자, 즉 새로이 일본의 패자가 된 요리토모는 다이라 기요모리보다 훨씬 치밀하고 냉정한 데다 정치적 수완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내전이 없도록 하겠다는 결심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내전으로 권좌를 내주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을까? 그는 비정하게도 자신의 동생들이자 자신을 권좌에 올려준 일등공신들인 요시쓰네와 노리요리(範賴)를 죽여 권력 다툼의 싹을 없앴다.
이런 각오라면 요리토모가 철저한 개혁의 길로 나아갈 것은 뻔하다. 과연 그랬다. 그는 지방마다 슈고(守護)를 두어 반역자 처단의 임무를 맡기는 한편, 각 지방에서 유사시에 군량미를 징집하던 지토(地頭)라는 직책의 권한을 확대시켜 이들에게 경찰권과 징세권, 토지 관리권까지 부여했다. 요리토모의 친위대인 고케닌, 그리고 지방의 행정을 담당한 슈고와 지토는 모두 무사들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명실상부한 무사 국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앙 권력이었다. 앞서 기요모리는 천황을 등에 업은 ‘전통적’ 체제를 답습했는데, 이것을 바꾸지 않는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도 없고 개혁을 지속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요리토모는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른 무사 계급의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미처 몰랐겠지만 그가 만든 새로운 체제는 이후 1000년 가까이 지속된다. 그것이 바로 바쿠후(幕府) 정치다. ‘막(幕)’은 군막을 가리키므로 이미 명칭에서부터 군대가 정치 일선에 나섰음을 선언하는 체제다.
가마쿠라에 최초의 바쿠후를 연 요리토모는 1192년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올랐다. 이 거창한 직책을 줄이면 쇼군(將軍)이 된다【이때부터 쇼군 직이 반드시 세습된 것은 아니었지만 왕위처럼 대를 이어가게 된다. 이는 셋칸 시대부터 일본적 전통으로 자리 잡은 ‘권력의 대물림’이라 할 수 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의 한 축과 실권자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권력의 축이 병존하는 기묘한 ‘이중권력’은 일본 역사만의 특징이다(하지만 같은 시대에 천황 측과 바쿠후 간에 세력이 엇비슷한 이중권력이 성립된 것은 잠시뿐이고 권력은 결국 바쿠후 측으로 넘어간다). 게다가 상황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면서 천황 측에도 천황과 상황의 이중 권력이 성립되니 이것도 묘한 일이다. 게다가 바쿠후 시대에도 천황은 계속 존재했고 그 상징적 지위는 (쇼군조차 해마다 문안 인사를 드릴 정도로) 굳건히 인정되었으니 이것도 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쇼군조차 한때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권력이 바쿠후 내부에서 과점되었다는 점이다. 이름뿐인 천황, 또 이름뿐인 상황, 또 이름뿐인 쇼군, 그러면서도 계속 유지되고 세습되는 천황과 쇼군, 이점은 일본 역사 특유의 복잡한 ‘상징 권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유명무실해진 천황은 이후의 역사에서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결집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하게 되며, 19세기에 바쿠후가 무너지면서 다시 현실 정치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는 초대 바쿠후의 지배자인 초대 쇼군이었다.
물론 기존의 천황 세력도 아직 만만치 않았다. 당시 일본의 권력은 전통적인 교토의 천황 세력과 신흥 권력인 가마쿠라 바쿠후가 양분하는 형세였다. 완전한 바쿠후의 시대가 되는 것은 그로부터 200년 뒤의 일이지만, 그 문은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바쿠후가 연 것이다.
▲ 고대 일본의 중심지 세력 가문들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던 당시 일본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지명으로 말하면 교토 일대의 간사이 지방이었다. 지금 일본의 수도인 도쿄가 있는 간토 지방은 12세기 이후에 지역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며, 17세기 에도 시대부터 일본 전체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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