곪아가는 바쿠후 체제
비록 태풍의 덕이었으나, 일본 역사 전체를 통틀어 최대의 위기라 할 몽골 침략마저 물리친 바쿠후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일본 역사를 굴절시킨 것은 바깥의 적이 아니라 안에서 곪는 상처가 아니었던가? 바쿠후 체제도 안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무사 계급은 전쟁을 기본 기능으로 한다. 전쟁이 없는 평화기에는 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새로 생겨난 바쿠후 체제가 안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진통과 후유증, 그리고 몽골이라는 대적의 침략 등으로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바쿠후 권력이 안정을 찾으면서 무사 계급 자체에 내재된 문제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찍이 반전제가 무너지면서 탄생한 소규모 자영, 즉 ‘백성 묘슈’들은 수백 년 동안 정치 상황이 격동하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해왔다. 14세기에 이르러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소(惣)’라는 결합체를 이루고 다이묘와 지토를 상대로 저항과 교섭을 벌일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이제 농민들은 과거와 같은 무지렁이가 아니며, 지역 사회도 예전처럼 무력만으로 쉽사리 제압할 수 있는 만만한 환경이 아니다. 장원의 다이묘들도 예전처럼 촌민들을 자기 수족 부리듯 대하지 못하고 그들과 적절히 타협해야만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판에 싸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순진한’ 무사들이 지역에서 자리 잡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쿠후의 물리적 토대인 고케닌들은 전쟁이 끊기면서 본업이 사라지자 지역에서 각자 알아서 활로를 찾아야 했다. 물론 바쿠후는 친위대인 그들을 최대한 지원했으나 이제 고케닌 개인의 성공 여부는 그 자신의 능력에 달렸다. 사회의 변화에 잘 적응한 일부 고케닌은 다이묘로 성장해 지역에 터전을 잡기도 했으나 물정에 어둡고 씀씀이만 사치스럽고 헤픈 대부분의 고케닌은 몰락했다.
게다가 무사들 특유의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는 조짐도 현저해졌다. 원래 무사 집안의 상속 제도는 가문을 잇는 적자(嫡子), 즉 소료(總領)가 다른 아들들(대개는 서자들)과 일족을 통제하도록 되어 있었다. 소료는 형제들에게 가문 소유지의 점유권만을 할당해주었는데, 막상 권리를 양도 받은 형제들은 사실상 그 토지를 자기 소유물로 여기게 되었다【일찍이 반전제가 무너진 과정도 그와 비슷했는데, 더 크게 보면 이것은 왕토 사상이 흔들리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에서도 초기에 관리 급료 제도로 시행된 과전법(科田法)이 그런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모든 토지는 왕, 즉 국가의 소유였으므로 완전한 사유화는 불가능했고 수조권(收租權)만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양반 가문에서 급료로 받은 과전을 가문의 소유지로 사유화하게 되자 과전이 부족해졌다. 원칙적으로는 토지 사유가 불가능하고 현실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 이런 이중성은 동양식 토지제도의 고질적인 현상이었다】. 가부장적 질서가 튼튼하던 바쿠후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그 문제점은 돌출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소료는 자신의 끗발이 서지 않게 되자 모든 재산을 단독으로 상속받으려 했고, 이는 당연히 형제들의 불만을 사 집안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끝나면서 할 일도 없어진 데다 이래저래 궁핍해지고 피폐해진 무사들은 점차 집단을 이루어 일종의 깡패 조직으로 변해갔다. 다이묘들은 이러한 무사들의 집단과 농민들이 조직한 저항체인 소를 악당(惡黨), 즉 아쿠토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했다.
바쿠후는 이런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곳곳에서 제기되는 무사 집안의 상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권위가 실추되었고, 호조 일족의 독재가 오래 지속되면서 내분이 점차 심화되었다. 몽골을 물리치고 나서 10여 년 동안에만도 바쿠후 내에서 대규모 반란 사건이 세 차례나 잇달았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세력은 해묵은 이념을 되살리고 상징을 중심으로 뭉치게 마련이다. 그 이념이자 상징은 바로 천황이었다.
때마침 당시의 천황인 고다이고(後醍醐, 1288~1339)는 바쿠후를 타도하겠다는 뜻을 품고 남몰래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게는 바쿠후에 반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수십 년 전인 1259년 고사가(後嵯峨, 1220~1271) 천황이 둘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준 데서 싹텄다. 당연히 맏아들과 둘째 사이에 대립이 생겨났다(당시 천황은 황실령이라는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과거와 같은 권력 다툼만이 아니라 밥그릇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자 바쿠후가 중재에 나서 두 천황이 번갈아 제위를 잇도록 했는데, 그렇다면 적법하게 제위를 물려받은 둘째로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고다이고는 바로 이 둘째 계열의 천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과거 천황제를 복원하려는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다이고는 꿈을 드러내기도 전에 내부의 배신으로 바쿠후에게 발각되어 유배되고 말았다. 고다이고가 발뺌하면서 사건은 얼추 무마되었으나 이것을 신호탄으로 각지에서 바쿠후를 타도하려는 공공연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방 호족과 다이묘의 봉기, 게다가 농민들의 소와 몰락한 무사들의 아쿠토 등도 여기저기서 들고일어나면서 전국은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었다.
이에 힘입어 고다이고는 유배지에서 도망쳐 나와 바쿠후 타도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바쿠후로서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결국 150년간 일본을 지배하던 가마쿠라 바쿠후는 1333년 아시카가(足利) 가문과 닛타(新田) 가문에 의해 멸망했다. 둘 다 미나모토의 일족들이었으니 결국 가마쿠라 바쿠후는 미나모토 가문이 시작과 끝을 장식한 셈이다.
▲ 풍운아 고다이고 고다이고는 천황이 신적인 존재이자 절대 권력자였던 ‘좋았던 옛날’을 되살리려 노력했으나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지는 데는 그의 노력이 일조했다. 바쿠후 타도를 위해 비밀공작을 벌이고 남북조시대라는 희한한 이중권력 체제까지 일궈낸 그의 개인적 능력과 파란만장한 생애는 흥미진진한 역사소설 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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