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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동서 문화의 교류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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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동서 문화의 교류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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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문화의 교류

 

 

이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몽골이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동서 교류를 폭발적으로 증진시켰다. 우선 교류의 장애물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무역로 주변에 터를 잡은 작은 왕국들이 무역을 방해하거나 독점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제는 이 지역이 모두 단일한 정치 질서에 편입되었으므로 그런 문제가 없어진 것이다유럽 역사가들은 몽골이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하면서 국제적 정치 질서의 안정을 가져온 13~14세기를 타타르의 평화(Pax Tatarica)’라고 부른다. 고대 로마가 지중해를 통일하면서 구가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염두에 두고 만든 용어다. 그런데 몽골을 타타르라고 부른 것은 좀 문제다. 타타르는 오히려 몽골족을 통일한 칭기즈 칸이 일차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숙적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몽골이 유럽을 침략했을 때도 그들을 타타르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13세기 중반 로마 교황의 명으로 몽골 제국을 방문한 플라노 카르피니(Plano Carpini)는 유럽에 돌아가 우리가 타타르인이라 부르는 몽골인의 역사라는 책을 써서 유럽인의 시각 교정에 일조했다(후일 원 제국이 멸망하고 몽골족이 다시 몽골 초원의 군소 부족으로 되돌아갈 무렵에는 몽골인과 타타르인의 구별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몽골은 애초부터 무역을 염두에 두고 서역 원정을 시작한 것이므로 무역을 적극 장려했다. 무역에 필요한 도로망을 정비했을 뿐 아니라 도로마다 상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용 역사를 설치해 숙박과 역마를 제공했다. 잠치라고 부르는 이 시설은 동서 무역만이 아니라 몽골 제국 내의 물자 이동,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간의 교통 등에 크게 기여했다.

 

초원의 길과 비단길이 새삼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초원의 길은 선사시대부터 유목민들이 이동하던 길로서, 일찍이 고대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와 흉노가 이 길을 통해 동서를 왕래했다. 초원의 길은 북중국에서 시작해 볼가 강에까지 이르는 길이었으므로 북방 민족들이 주로 애용했다. 그 반면 비단길은 남중국과 중원을 서역으로 이어주었으므로 한족 왕조들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비단길은 한 무제의 명으로 장건(張騫)개척했다고 되어 있으나, 원래는 그전부터 유목민들이 자주 이용하던 길이었다. 이 양대 육상로는 몽골 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동서 교류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비단길은 지중해 쪽으로 연결되었으므로 더욱 중요한 무역로였다.

 

예전부터 활발하게 교류한 유럽과 오리엔트, 여기에 양대 육상로를 통해 오리엔트와 중국이 연결되면서 오리엔트를 매개로 유럽과 중국도 간접 교류를 시작했다. 유럽과 오리엔트 측은 천문학과 지리학, 수학, 역학, 그리스도교 등을 중국에 전했고, 중국에서는 중세의 3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인쇄술, 화약이 아라비아 상인들의 손을 거쳐 유럽에 전달되었다중국이 중세 유럽에 전한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은 중국에서보다 유럽 세계의 발전에 더 큰 공헌을 했다. 유럽인들은 나침반을 이용해 대항해시대를 열었으며, 아라비아인은 화약으로 대포를 만들어 그 기술을 오히려 중국에 역수출했다. 그리고 인쇄술은 훗날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으로 이어지면서 성서의 대량 보급에 한몫함으로써 종교개혁을 뒷받침했다.

 

일찍이 당 제국의 수도인 장안은 서역의 색목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국제도시로 이름을 날렸으나 원 제국의 수도인 대도는 색목인만이 아니라 유럽인들도 출입하는 세계적 도시로 성장했다. 로마 교황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파견한 카르피니와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uk), 원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17년간 제국의 관리로 재직한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 등이 당시 육로를 통해 중국에 온 유럽인들이다.

 

 

몽골 복장의 마르코 폴로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의 모습이다. 그는 삼촌을 따라 육로로 중국에 가서 쿠빌라이 칸의 총애를 받으며 17년 동안이나 살다가 고향에 돌아왔다. 24년 만의 귀환인 데다 이렇게 몽골 복장을 했으니 당연하겠지만, 처음에는 친척들까지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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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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