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로 연장된 하극상
히데요시의 통일로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제국이 되었다. 일찍이 고대의 율령 국가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국가라기보다는 권력 구조에 불과할뿐더러 일본 전역을 지배한 것도 아니었다. 초기 바쿠후 정권 역시 그 점에서 마찬가지다. 따라서 히데요시의 일본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정치 체제를 중심으로 볼 때 동서양의 역사는 대체로 다음 단계들을 거친다. ① 도시국가(그리스의 폴리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 일본의 야마토 정권), ② 고대적 전제 국가(유럽의 로마 제국, 중국의 고대 제국들, 일본의 고대 천황제, ③ 중세적 봉건제 국가(유럽의 중세, 일본의 귀족 지배 체제, 중국의 한 당 제국 시대에 발달한 번진), ④ 근대적 전제 국가(유럽의 절대왕정, 중국의 명ㆍ청 제국, 일본의 바쿠후와 근대 천황제), 어느 나라의 역사는 고대에 한 차례 전제군주의 시대를 거친 다음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전제군주의 시대가 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히데요시의 집권은 근대적 전제 체제의 완성에 해당한다】. 천황이라는 상징적 권위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사실상 히데요시는 일본의 황제나 다를 바 없었다.
치국 후 평천하라 했던가? 국내를 통일한 히데요시의 눈은 밖으로 향했다. 9세기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한 일본이 국제 무대에 복귀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일본도 천하요 중국도 천하다. 중국에 황제가 있다면 일본에는 천황이 있다.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선언했던 7세기 초반의 쇼토쿠 태자 이래 일본은 한 차례도 중국을 사대한 적이 없었다. 일본 천하의 통일로 기고만장해진 히데요시는 ‘또 하나의 천하’인 중국의 명 제국을 넘겨다보았다. 아무리 일본의 국력이 성장했다 하더라도 당시 명은 동북아시아 질서의 중심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히데요시의 야망은 대내적 하극상을 대외적으로 연장시키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하극상 질서의 최종 수혜자였기에 그런 마음을 먹었던 것일까?
하지만 중국 진출을 꿈꾸는 것은 히데요시만이 아니다. 토지를 잃고 몰락한 다이묘와 무사 들은 이제 자신들도 해외의 영토를 가져야 한다고 수군거린다. 상인들도 그렇다.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던 노부나가의 시절부터 일본은 해외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히데요시의 시대에는 더욱 무역이 장려되었다.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외 무역의 단맛을 본 상인들은 중국과의 거래를 꿈꾸었다(앞에서 보았듯이, 당시 명은 주변국들에 감합 무역을 허용했으나 일본은 악명 높은 왜구 때문에 송대부터 중국과의 거래가 끊겨 감합을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오랜 전란이 끝난 직후이므로 아직 군대의 사기가 드높고 군비도 충실하다. 오히려 할 일이 없어진 무사들의 심정을 헤아려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날 판이다. 무사 집단이 주체가 되어 추진한 ‘국제화’의 결론은 대외 전쟁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새벽, 일본은 16만 명의 대군으로 조선 침략을 개시했다. 최종 목표는 중국이니까 조선 정벌은 일본에 있어 예선전에 해당한다.
초기 전황은 실제로 예선전이나 다름없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승승장구하면서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한성을 점령했다. 믿었던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무너졌다는 소식이 도성에 전해진 4월 29일에 조선 국왕 선조(宣祖)는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해버렸다.
▲ 야반도주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
전쟁이 이대로 진행되어 마무리되었더라면 일본은 실제 역사보다 300여 년 앞당겨 한반도를 접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국운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육지에서 연전연승하던 일본군은 바다에 나타난 의외의 강적에게 연전연패하면서 크게 기세가 꺾였다. 바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등장이다. 이순신은 5월 4일 첫 출동에서 일본의 함선 37척을 부수고 아군의 피해는 경상 1명에 그치는 믿지 못할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7월에 전개된 한산대첩에서는 유명한 학익진을 펼치며 적선 60여 척을 바다에 수장시켜버린다. 이후 일본은 해전 자체를 기피하게 될 정도였다.
한편 육지에서는 무력한 조선 관군이 하지 못한 몫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대신했다. 김천일, 곽재우, 고경명(高敬命), 서산대사 등의 병장들이 이끄는 조선 의병들은 절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일본의 정예군을 물리쳐 적의 북상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마땅히 전쟁의 한 당사자가 되어야 할 중국이 참전하는 것은 이렇게 전황을 어느 정도 복구해놓은 다음이다. 7월에 정식 군대도 아닌 국경 수비대 일부를 파견했다가 일본에 대패하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명은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황실에서 5개월이나 논의만 하다가(당시 명은 무능한 신종의 치세에 당쟁이 만연했다) 12월에야 이여송(李如松, ?~1598)에게 4만 명의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강화 교섭이 진행되기 시작한다.
▲ 동래성을 공격하는 일본군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하루 만에 동래성을 함락했다. 일본군은 조총으로 무장했고, 병력의 규모에서도 우세했다. 육전에서 조선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애초에 히데요시의 전략은 일이 아주 잘 풀리면 중국 정복, 덜 풀리면 조선 정복, 안 풀리면 강화를 체결하고 대외 무역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손쉽게 한성을 점령한 것에 고무된 그는 중국만이 아니라 멀리 인도까지 정복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이후에 전개된 전황으로는 셋째 단계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의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일본과 명은 지금의 창원 부근에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강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을 보면 도무지 강화하자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첫째, 명의 황녀를 일본의 천황비로 달라.
둘째, 감합 무역을 허용하라.
셋째,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하라.
넷째, 조선 왕족 12명을 인질로 달라.
당시에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가운데 두 번째 외에는 수락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전쟁이 재개될 것을 겁낸 중국 측 협상자 심유경(沈惟敬)의 대응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임진왜란(壬辰倭亂)은 여러모로 350여 년 뒤의 한국전쟁과 닮은 데가 많다(외세의 공격과 같은 민족 간의 ‘내전’이라는 차이는 있다). 우선 전쟁의 책임자가 아니면서도 한반도가 전장이 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그렇고, 개전 직후 공격 측의 일방적인 공세가 이어졌다가 반격과 소강상태에 이어 제3국이 참전하는 게 비슷하다. 특히 휴전 협상 과정은 더욱 그렇다. 한국전쟁에서 국제연합과 북한이 휴전 협상의 주체였듯이, 임진왜란에서도 막상 전쟁의 피해자이자 당사자인 조선은 협상 테이블에 끼지 못했다. 협상 주체는 이여송의 부하인 심유경과 히데요시였다. 히데요시의 요구 가운데에는 조선의 국토와 왕족까지 포함되어 있는데도 조선은 협상 주체가 아니니까 발언권이 없었다. 더구나 명이 내세운 강화 조건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고 히데요시가 사과하는 것 정도였을 뿐, 조선이 입은 막대한 피해에 대한 배상금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 명이 서로의 힘을 가늠해본 전쟁터만 제공해주고 만 셈이다. 마치 한국전쟁을 통해 서방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가 서로의 힘을 시험했듯이】. 그는 본국에 거짓으로 보고할 계략을 꾸민 것이다.
협상을 마치고 돌아간 그는 명 조정에 히데요시가 자신을 일본 왕으로 책봉해줄 것과 중국에 조공을 바칠 테니 허락해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보고한다. 책봉은 이미 하는 것이고 조공을 바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다. 겨우 그 정도를 얻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단 말인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보고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중화사상(中華思想)에다 어지러운 당쟁으로 제 코가 석 자인 명 황실은 사리를 분간할 능력이 없었다.
▲ 이순신의 학익진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학익진의 진용이다. 이순신은 육전에서의 연패를 해전에서의 기적 같은 연승으로 설욕했다. 일본은 섬이지만 수군이 없었고 함선도 거의 다 병력 수송용이었다. 그 점을 간파한 이순신은 적선과 맞붙어 육박전을 벌이기보다 적선을 들이받아 부수는 해전으로 이끌었다. 거북선도 적병이 아군의 배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제작한 배였다.
정작으로 놀란 것은 히데요시다. 1596년 명의 사신이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칙서를 전하자 그는 격노했다. 사실 자신의 요구도 터무니없었지만 그 요구와 전혀 무관한 칙서를 보내는 건 또 뭔가? 모욕을 느낀 그는 다시 전쟁을 결심한다. 명은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그게 오히려 전쟁을 불렀다.
이듬해 1월 히데요시는 재차 원정군을 보냈다. 명의 일개 무관에 불과한 심유경의 어처구니없는 농간 때문에 조선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정유재란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달리 처음부터 히데요시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우선 일본군의 사기가 전만 못했고, 개전 초부터 명의 지원군이 출동했다. 또 1차전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조선의 관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적극 대처해 충청도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순신이 건재했다. 결국 1598년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일본군은 철수했다.
이로써 7년간에 걸친 일본의 침략 전쟁이 끝났다. 7세기에 백제가 멸망할 때 일본이 지원군을 보낸 것을 제외하면, 동북아시아 세 나라가 모두 얽힌 전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을 일본과 중국에서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일본 역사에서는 임진왜란이 ‘분로쿠(文祿)의 에키(役, 전쟁)’이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은 ‘게이초(慶長)의 에키’다. 여기서 분로쿠와 게이초는 모두 당시 천황의 연호다. 중국 역사에서도 황제인 신종의 연호를 써서 ‘만력(萬曆)의 역’이라고 부른다. 조선은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못했으므로 후대의 역사가들도 연호를 붙여 전쟁의 명칭을 지을 수 없었다】. 이 전쟁으로 일본이 패망한 것은 아니지만, 먼저 도발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므로 일본이 진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도발로 시작한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외 진출은 실패로 돌아갔다.
▲ 명 제국으로 가는 무역선 명 제국으로 가는 일본의 ‘공식’ 무역선이다. 하지만 감합이 제안되어 있어 대개의 무역은 사무역(밀무역)으로 이루어졌다. 감합이 적은 것도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한 원인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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