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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작은 천하와 작은 제국: 마지막 내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작은 천하와 작은 제국: 마지막 내전

건방진방랑자 2021. 6. 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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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내전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와 미쓰나리의 싸움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오사카와 에도의 싸움이기도 했다. 여기서 에도 측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일본의 수도는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가 되었을 것이다. 승자가 이에야스였기 때문에, 천황이 있는 교토에서 오사카보다 훨씬 더 먼 쇼군의 텃밭이 일본 전체의 중심이 되었다. 센고쿠 시대 이래 한동안 맥이 끊겼던 쇼군이 부활했으니 바쿠후도 부활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일본 역사에서 마지막 바쿠후가 될 이에야스의 에도 바쿠후다.

 

바쿠후가 부활했다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하극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뜻한다(하극상은 바쿠후 권력을 부인하면서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바쿠후의 지휘자인 쇼군 직도 세습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쇼군에 오른 지 2년 만에 아들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어 새로운 세습의 전통을 확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걸림돌이 하나 남아 있었다.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살아 있었다. 이에야스는 실권을 쥐고 있었지만, 히데요리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과 상징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히데요리가 자라 그 재산과 권위를 이용할 줄 알게 된다면 다이묘들은 다시 동요할 테고, 천신만고 끝에 최후의 승자가 된 도쿠가와 가문은 다시 위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칠십객에 접어든 이에야스는 자신의 생전에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쓰나리를 토벌할 때도 그랬지만, 상징적 권위를 타파할 때는 먼저 도발해서는 안 된다. 용의주도한 그는 일단 히데요리의 경제력을 약화시킨 다음 싸움의 구실을 만들기로 한다. 그래서 그는 히데요리에게 아버지의 공양을 구실로 많은 절을 지원하라고 권했다. 때마침 오랜 전란으로 각지의 절들은 피폐해 있는 상태였다.

 

다음 단계인 싸움의 구실은 억지로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1614년 호코사(方廣寺)를 재건하면서 사찰의 종에 국가안강 군신풍락 자손은창(國家安康 君臣豊樂 子孫殷昌)”이라는 명문이 새겨졌는데, 그게 빌미가 되었다. 그 뜻은 실상 국가가 평안하고 군신이 안락하며 자손이 번성한다.”라는 덕담에 불과했으나 공교롭게도 이에야스(家康)와 도요토미(豊臣)의 성을 이루는 글자들이 섞여 있는 게 문제였다. 이에야스는 그 명문의 숨은 뜻이 가강(家康)을 분단하면 국가가 평안하고 풍신(豊臣)을 임금[]으로 삼으면 자손이 번성한다.”라는 것이라고 우겼다이보다 조금 앞선 16세기 초반 조선에서도 이와 같이 정치적인 목적에서 자구를 악용한 사례가 있다. 조선의 중종 시대에 조광조(趙光祖)가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자 수구 세력은 왕궁 후원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그려놓는다. 벌레가 꿀을 갉아먹자 글자들은 마치 저절로 생겨난 듯한 모습이 된다. 그 나뭇잎을 본 중종은 조광조를 역적으로 몰아 옥에 가둔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은 파자()를 이용한 문구로, ()와 초()를 합치면 조()가 되므로 조씨 성을 가진 자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조광조를 겨냥한 모함이다. 당시 중종은 연산군(燕山君)을 물리친 쿠데타 세력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당연히 그 말에 분노했겠지만, 실은 그런 모함만으로 조광조가 실각한 것은 아니다. 적통이 아닌 왕위 계승에 불안을 느낀 중종은 처음에 자신의 친정 세력을 구축할 목적에서 조광조를 지원했다가 훈구 세력의 반대에 부딪히자 뜻을 포기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에야스 역시 호코사 종의 명문 때문에 히데요리를 공격하려 한 게 아니라 그것을 공격의 구실로 삼았을 뿐이다.

 

명문을 명분으로 삼아 이에야스는 전쟁의 구실을 만들어냈다. 그는 직접 대군을 이끌어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이 워낙 견고해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섬기던 시절에는 신중했고, 미쓰나리를 격파할 때는 용의주도했던 이에야스지만, 마지막 싸움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는 신중과 용의주도를 넘어 더없이 교활해졌다. 예상외로 쉽게 이기지 못하자 그는 재빨리 강화를 제의하고, 오사카 성의 바깥 해자를 메우는 것을 휴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은근슬쩍 안쪽의 해자까지 메우고 두 개의 성루마저 파괴해버렸다. 히데요리 측이 항의했으나 이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이에야스는 오히려 그 항의를 빌미로 전쟁을 재개했다. 결국 오사카 성은 이에야스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수백 년 동안 치열한 내전과 전란이 점철된 일본 역사에서 최후의 대규모 내전이었다.

 

 

최후의 내전 이에야스가 오랜 2인자 생활을 거치면서 얻은 교훈은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라는 것이다. 이미 대세를 손에 쥐었지만 그는 안심하지 못하고 히데요시의 근거지였던 오사카마저 정복하려 했다. 그림은 이에야스가 이끄는 대군이 오사카 성의 바깥 해자를 메우고 진격해 들어가는 장면이다. 이 전투를 끝으로 수백 년을 끌었던 일본의 내전은 종식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최후의 승자가 된 2인자

마지막 내전

바쿠후를 보완한 바쿠한

쇄국을 통한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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