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④
일본을 사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것은 러시아의 내부 사정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해진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러일전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실은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청일전쟁으로 숨통을 텄듯이 러시아의 차르 정부도 국내의 정정 불안을 전쟁으로 타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본에 밀리자 혁명운동이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차르 정부의 무능함만 드러났다. 급기야 1905년 1월 22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는 ‘피의 일요일’ 사태가 일어났다. 이로써 러시아 내부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
사태가 급변하자 전쟁을 바라보는 열강의 태도도 변했다. 이제는 군국주의 일본의 성장보다 러시아의 혁명운동이 더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열강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강화를 유도했다. 1905년 9월에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 회담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고, 애써 얻은 사할린마저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아슬아슬했던 일본의 승리는 전 세계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서구 열강은 물론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쑨원 같은 식민지ㆍ종속국의 민족운동가들도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을 자랑하는 러시아에 승리했다는 소식에 충격과 자극을 받았다(이를 계기로 쑨원이 일본을 발전의 모델로 삼게 되었음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은 수십 년 전처럼 피억압 민족의 선두 주자가 아니라 제국주의를 꿈꾸는 신흥 세력일 뿐이었다.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새끼’ 제국주의에서 ‘성숙한’ 제국주의로 탈바꿈했다.
완전한 제국주의 국가의 자격을 획득한 일본은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약에서 양도받은 권리를 행사했다. 러일전쟁의 최대 전리품, 그것은 바로 조선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전통의 종주국을 물리쳤고, 러일전쟁으로 신흥 종주국마저 제압했다. 이제 일본은 한반도의 새 종주국이 된 걸까? 그러나 일본은 종주국의 지위를 누리려 하지 않고 아예 한반도를 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바로 1910년의 한일합병이다.
▲ 피의 일요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군대의 발포로 쓰러진 군중의 모습이다. 러일전쟁 중에 러시아 수도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 덕분에 일본은 가까스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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