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학교가 사라지면 생길 일들
솔직히 ‘마을이 학교다’는 이야긴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고 ‘좋은 교육 모델’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 다양한 예를 들며 인성교육에 대해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마을이 학교다’라는 부정적인 뜻
그 말을 풀면 학교만이 교육을 독점하는 것이 아닌, 마을로, 또는 그 이상으로 확대되어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학교의 교육만이 아닌, 마을 전체에서 시시때때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교육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마을 자체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마을이 학교다’라는 슬로건으로 마을을 만들려는 움직임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선생님도 이 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권재원쌤은 그 말의 긍정적인 의미는 충분히 인정하지만, 애초 미국에서 등장할 때는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 공교육의 특성과 마을의 특성을 대비하여 설명을 하니 반공주의자들이 왜 그런 구호를 외쳤는지 알 수 있었다.
공교육 |
마을 |
종교적 중립 |
신앙심 |
도덕적 상대주의 |
미국 전통 가치 중시 |
회의주의 / 비판정신 |
충효를 바탕으로 한 인성 중시 |
마을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코뮤니티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근본적으로 신앙을 밑바탕에 깔고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를 중시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이니 당연히 충효를 바탕으로 한 인성을 중시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시골 마을도 이런 예와 매우 비슷하다. 지금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사드배치’의 찬반을 여론 조사할 경우,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상황이 이를 대변한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 또는 왜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다면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안보라는 미명으로 휩쓸려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공교육은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군중심리와는 다른 구석이 있다고 한다. 자유롭게 토론을 할 수 있고 비판적인 안목으로 학문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비판정신을 키우는 데에 중점을 둔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권재원쌤은 “마을의 성향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그 순간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을을 먼저 만든 이후에 ‘마을로 돌려보내자’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 여론조사는 충분히 조작이 가능하다지만,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출처- 소비자 불만닷컴)
교육개혁은 고장 난 자동차를 운전하며 수리하는 일
이 말을 들으니, 저번 모임에서 민천홍 쌤이 “예전엔 『학교 없는 사회』와 같은 ‘탈학교론’을 옹호하기도 했는데, 이젠 다르게 생각해요. 학교가 일순간에 사라진다 해도, 그 자리에 다른 교육의 장이 펼쳐지기보다 자본이 치고 들어와 더 획일화되고 더 경쟁적인 교육이 펼쳐질 수도 있으니까요.”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성적을 통한 경쟁만을 강요하고, 상급학교 진학이 모든 교육적 이슈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경제적인 마인드가 교육을 잠식한 이때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일이다. 교육 때문에 학생-학부모-교사 누구 할 것 없이 엄청난 짐을 지고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판을 완전히 허물어버린다고 교육이 정상화되거나 이상적인 교육의 장이 마련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민천홍 쌤의 진단처럼, 그 빈틈엔 힘 있는 것들이 파고들어 교육의 공공적인 기능을 완전히 붕괴시켜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대학을 대기업들이 쥐고 흔들며 학문을 위한 공간이, 장사를 위한 공간으로 바꾼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논의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육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좋은 게 좋은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비판을 가한다고 금방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치다쌤의 “교육제도를 개혁한다는 것은 ‘고장 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 상태에서 수리한다’는, 일종의 고난이도 곡예에 비유할 수 있는 어려운 일입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pp20”라는 말을 했는데, 그 비유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하나를 바꾸면, 어떤 부조리한 하나만 없애버리면 정상화되는 게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하면 그와는 전혀 다른 문제가 돌출되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그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돌출되는 식으로 지루하면서도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강의는 어느덧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인성교육’이라는 게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역사적 맥락을 꿰뚫다 보니 황당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비교육적이며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얘기만 들어도 ‘교육이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환상으로 너무 자신들의 이속만을 차리려 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하긴 애초에 공교육이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국민형성’을 목표로 등장했기에, 한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교컴 연수에 온 대부분의 선생님들도 이런 얘기를 들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화가 온도를 높인 것인지, 난방기가 너무 빵빵하게 돌아가서 온도를 높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의실 온도는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 밖은 아직 서늘하긴 해도, 강의실 안은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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