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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중국화의 물결④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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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중국화의 물결④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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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의 물결

 

 

그 덕분에 경덕왕(景德王)은 신라의 달밤에 불국사의 종소리를 고즈넉이 들을 수 있었지만, 가장 신라적인 문화가 만개한 시기가 바로 가장 적극적으로 중국화 노선을 추진한 시기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중국화의 마무리는 788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이 처음으로 시행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장식한다. 이것은 일종의 과거제(科擧制)라 할 수 있지만, 중국의 과거제와는 다르다. 과거제는 수 문제가 처음 만들었고 뒤이은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지명이나 관직명은 중국의 것을 가져다 써도 내용적으로는 크게 달라질 게 없겠지만 과거제(科擧制)는 다르다. 과거제는 관리 임용제도이므로 신라의 여건에 맞지 않는다면 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앞서 말했듯 중국의 과거제는 한나라 때 유학을 공인하고 나서도 수백 년이나 지난 뒤에야 비로소 시행될 수 있었던 제도인데, 유학 자체가 막 도입되기 시작한 신라 사회에서 그런 관리 임용제도가 통할 리 만무하다.

 

신라의 관리들이라면 누군가? 비록 성골이라는 피라미드의 맨꼭대기가 사라지고 없다지만 아직 신라에는 골품제의 입김이 강력하게 남아 있다. 신문왕(神文王)경덕왕(景德王)이 관제를 정비하고 관직을 신설했다 해도 아직 신라에서는 정상적인 관료제가 성립하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에게는 권력이 있다. 따라서 기존의 것이든 새로 생긴 것이든 모든 관직은 당연히 귀족들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다. 독서삼품과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으니, 말하자면 선진적인 과거제와 전통적인 귀족제를 화해시키려는 시도다.

 

성공했다면 독서삼품과는 과거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집권자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의 수준이다. 시험이라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관리를 선발하겠다는 원성왕의 의도는 현실적인 여건 앞에서 좌초한다. (성골, 진골)에 속하는 왕족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원하는 직책을 맡을 수 있었고 품에 속하는 귀족들, 그 중에서도 최상층 세력인 6두품은 독서삼품과에 응시하느니 차라리 중국에 유학을 가는 게 관직 임용에서나, 학문적으로나 더 낫다고 생각한다. 결국 독서삼품과는 이후 우리 역사를 얼룩지게 만드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 시험국가고시가 최우선시되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오명만 남기고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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