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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포위 속의 생존(위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포위 속의 생존(위례)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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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위 속의 생존

 

 

지금까지 살펴본 고구려 초기사에서도 연대나 사실에서 부정확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나마 고구려의 경우는 한결 나은 편이다. 한반도 중남부로 오면 상고사를 가리고 있는 안개층은 더욱 두터워진다. 왜 그런지는 알기 쉽다. 전등에서 멀어질수록 빛이 흐려지듯이 중국 문명권에서 먼 중남부는 반도 북부보다 문명의 빛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북부의 고구려와 낙랑이 동방으로 오는 문명의 빛을 흡수, 차단하고 있는 탓에 북부의 정세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그 빛이 남부에까지 퍼질 수 없는 형편이다(그래서 백제와 신라의 역사가 선명해지는 시기는 고구려가 반도 북부의 확고한 패자로 떠오르는 4세기부터다).

 

하지만 지금 우리로서는 안개가 있으면 있는 대로 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가 나라 꼴을 갖추는 2세기 말까지 한반도의 중남부에 둥지를 튼 백제와 신라는 어떤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쳤을까?

 

건국신화에서는 신라가 앞서지만, 실제의 역사는 고구려 왕실의 혈통과 문명의 일부를 나눠받은 백제가 역시 한 걸음 앞서나간다. 그런 이유에서, 신라 본기(本紀)를 맨 앞에 배치한 삼국사기와는 달리 백제를 먼저 살펴보는 게 바른 순서라 할 것이다.

 

인천을 선택한 비류는 비록 자신의 위치 선정에서는 삐끗했지만, 온조(溫祚)가 자리잡은 아차산 일대를 위험스럽게 본 판단에서는 옳았다. 온조는 결국 나라를 세운 지 13년 만에 주변의 위협에 못 견디고 한강을 건너 오늘날 서울의 송파구로 터전을 옮겼기 때문이다. 온조는 아차산 이북의 원래 거점을 위례(慰禮)라고 불렀는데, 강을 건너서도 그 이름은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하북위례와 하남위례로 구분한다. 그러나 새 터전에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라를 세웠다고는 하지만 북쪽에 낙랑이 버티고 있는 데다 삼한 중에서도 가장 강성하고 규모가 큰 마한의 세력권에 자리잡은 백제의 입장에서는 우선 영토의 확장이나 문명의 발전보다도 생존이 급선무였다.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한강 하류의 위례로 천도했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사실 천도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이사한 격이었다. 당시 백제는 변변한 강역조차 가지지 못한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형편에서 백제가 취해야 할 가장 좋은 생존 방법은 뭘까? 백제는 서쪽으로 바다에 면하고 북의 낙랑, 동의 말갈, 남의 마한으로 삼면이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세 세력이 연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낙랑은 명색이 한나라의 군이고, 말갈은 만주족의 갈래로서 목문명권에 속한 부족이며말갈이 나온 김에 지금까지 말하지 않 은 한반도 동북부, 즉 오늘날 함경도와 강원도의 사정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삼국시대가 본격화되는 3세기 무렵부터는 한반도 역사 속으로 편입되지만, 당시까지 이 지역은 한반도 문명권이라기보다는 반농반목(半農半牧) 성격의 만주 문명권이었다. 이곳에 있었던 부족국가로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있는데, 옥저는 만주 동남부와 함경도, 동예는 옥저의 남쪽에서부터 경상북도 북부까지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민족적으로 두 나라의 주민들은 대부분 말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2세기 말경에 고구려에게 복속되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고구려가 신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전부터 경상북도까지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쪽 방면에서는 백제가 강성했으므로 고구려의 남하가 쉽지 않았다, 마한은 한반도 남부의 토착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나아갈 노선은 명백하다. 셋 중 한 세력과 결탁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처음부터 기습공격으로 백제와 상견례를 나눈 말갈을 제외하면, 낙랑과 마한은 신생국 백제에 대해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자니 쉽지 않겠고 그렇다고 놔두자니 찜찜하다. 그래서 두 나라는 신생국 백제를 어느 정도 복속시키는 선에서 그 존재를 인정해주고자 한다. 쉽게 말하면 자기 휘하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셋 중 어디에 붙을까? 온조(溫祚)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정답을 찾아낸다. 우선 말갈은 사납고 싸움을 즐기는 데다 문명의 성격이 다르고 특정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지 못하므로 논외다. 그 다음 낙랑은 중국의 한나라 계열인 데다 자신이 떠나온 고구려 쪽으로 향하는 방향에 위치해 있으니 동맹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답은 마한밖에 없다.

 

그래서 온조는 일단 말갈만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한편, 겉으로는 낙랑과 마한에 사신을 보내 두루 친교를 맺으면서도 속으로는 낙랑과 마한을 분명하게 차별적으로 대한다.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기원전 11년에 온조는 도성 북쪽에 방어용 울타리를 쳤다. 낙랑 태수가 사신을 보내 우리를 경계하는 게 아니냐고 따지자 온조는 내 집에 내가 담을 세우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단호하게 대한다. 반면 그로부터 16년 뒤에는 남쪽(오늘날의 안성)에 울타리를 친 것에 대해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항의하자 그의 태도는 사뭇 달라진다. 군말없이 울타리를 헐어 버린 것이다.

 

정세를 읽는 온조의 감각은 무척 뛰어났다. 낙랑과 마한은 아직 백제에게 버거운 상대였으나 실은 지는 해였다. 어차피 두 나라는 몰락할 터, 따라서 백제는 해가 지고 나면 어느 쪽 방향으로 진출할지를 미리 계획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가 선택할 방향은 남쪽밖에 없다. 온조가 낙랑을 뿌리치고 마한과 우호를 유지한 것은 그런 판단에서였던 것이다. 미래의 적에게 오히려 우호를 보이는 그의 방침은 장기적인 전략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왕릉 대신 사당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묘가 있지만 그의 아들로 백제를 창건한 온조는 묘가 없다(실은 평양에서 발굴된 동명왕릉도 정말 주몽의 시대에 쌓은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 대신 온조는 사당을 얻었다. 사진은 고려시대에 온조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온조가 하남위례로 천도한 데 유념해서 남한산성 내에 지었다.

 

 

과연 온조는 마한의 약화가 가시화되자 곧바로 마한의 변방을 공략해서 영토를 확장한다. 마한은 반격할 힘이 없다. 마한이 최종적으로 병합되는 것은 4세기 중반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일이지만 이미 온조 때부터 마한과 백제의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온조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전환해서 치세 말기에는 이미 북쪽으로 임진강, 동쪽으로 오늘날 춘천에 이르는 강역을 이루게 된다. 기원후 20, 최초로 그는 전국 순시에 나섰는데 무려 50일이나 걸릴 정도였다. 이제 백제는 신생국의 딱지를 떼고 왕국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건, 즉 일정한 강역과 백성을 얻은 것이다.

 

조상을 잘 둔 덕분에 온조 이후의 왕들은 바깥에 대해 어느 정도 안심하고, 주로 내치에 주력할 수 있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신생국이 법과 제도를 갖추는 지름길은 선진국의 것을 모방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백제는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관제와 행정제도를 모방했을 것이다. 백제 초기의 세부적인 제도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구려처럼 좌보와 우보를 중심으로 편성된 관제나 죄인을 석방하고 사면해주는 제도 등은 확인되고 있다.

 

백제가 안정을 찾으면서 그 주변 정세도 조금씩 달라진다. 낙랑이나 마한과는 여전히 별다른 마찰이 없다. 말갈은 여전히 잊을 만하면 침략해와서 골칫거리지만 그것도 늘상 있던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동쪽이다. 기원후 60년 무렵이 되자 백제의 강역은 오늘날 청주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거기서 백제는 처음 듣는 나라와 접촉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신라라는 나라였다.

 

이 무렵부터 2세기 말까지 100여 년 동안 백제의 대외 관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라는 신라다. 물론 아직까지 두 나라의 관계는 분명한 색깔이 없다. 백제는 신라와 몇 차례 소규모 전쟁을 벌이는가 하면, 말갈이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의 SOS를 받아들여 원군을 파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두 나라는 파트너라기보다는 라이벌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이 점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흥미로운 논평이 하나 있다(김부식은 연도별로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하면서도 가끔씩 구미가 당기는 대목이 나오면 論曰, 논하여 가로되로 시작하는 개인적 논평을 달고 있다). 백제의 4대 왕인 개루왕 시절, 그러니까 155년에 신라의 반역자가 백제로 망명해 왔다. 신라 왕(아달라왕)이 반역자를 압송해 달라고 요청하자 백제가 단호히 거부하면서 양국 관계가 전쟁일보 직전에 이르기까지 악화된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관계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은 춘추시대의 중국 사례까지 들먹이면서 (이건 김부식의 특기다) 백제 왕의 악덕과 무지를 탓하고 있다. 이런 김부식의 왜곡된 백제관은 백제 본기 다른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그렇게 보면 영호남 지역 감정의 뿌리는 무척 역사가 오랜 것인지도 모른다. 건국신화 하나 남겨놓은 것 이외에는 아직 역사에 자취도 보이지 않아야 할 신라가 어떻게 해서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놓고 백제와 다툼을 벌일 만큼 성장했을까?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마이너 역사

새 역사의 출발점

중국의 위기 = 고구려의 기회

고구려의 성장통

물보다 흐린 피

포위 속의 생존

이주민 국가

세 편의 건국신화

미스터리의 세기

마지막 건국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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