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국가
고구려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신라의 경우에도 나라가 있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있었다. 건국신화에서 보았듯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여섯 마을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그 지역의 원주민은 아니다. 『삼국사기』의 맨 첫머리에는 조선(고조선)의 유민들이 내려 와서 여섯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되어 있다. 이 점은 신라라는 국가의 독특한 성격을 암시한다.
우선 앞에서 보았듯이 건국신화도 독특하다. 신화적 성격이 유달리 강할뿐더러 같은 계통에서 출발한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와는, 의도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관련을 두지 않고 있다.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빼고 역사적인 요소만을 추출하면, 신라의 건국은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중국과도 무관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과연 문명의 빛이 강한 대륙에서 가장 동떨어진 한반도 남동부에서 우연히 신라가 생겨나서 초고속으로 성장했다는 게 가능할까?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박혁거세 신화에서 얻을 수 있는 추측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박혁거세가 외부인이라는 추측이다. 앞서 단군신화에서도 보았듯이 신화에서 하늘이란 대개 외부를 가리킨다. 따라서 박혁거세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아마도 신라가 일어난 지역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일 것이다. 여섯 마을의 주민들 자체도 원래는 외부에서 온 이주민들이었으니 외부인에 대한 시선이 그리 배타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박혁거세와 용의 몸에서 태어난 그의 아내를 이성(二聖, 두 명의 성인)이라 부르며 존경했다는 사실은 그 점을 뒷받침한다. 자신들과 같은 지역 출신이라면 당연히 혈통이 확인되므로(누구나 부모가 있으니까!) 십대 청소년에게 굳이 성인이라는 호칭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박혁거세의 경우 신화적인 탄생 과정만 전해질 뿐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13년의 시기에 관해서는 신화적인 기록조차 없다.
그게 아니라면 두 번째 추측은 박혁거세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신라는 나중에 중국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단일 왕조 시대를 연다. 승자의 입장에서 출발기, 즉 초기 역사는 충분히 신화로 포장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박혁거세 신화는 신라가 한반도 역사의 적자가 되는 7세기 이후, 혹은 적어도 삼국 중의 하나로 명함을 내밀게 되는 6세기에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6세기 중엽 신라의 거칠부는 진흥왕의 명을 받아 신라의 역사를 다룬 『국사(國史)』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는데, 이 책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혹시 이 책에서 건국신화를 지어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신화를 그대로 수용하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열세 살 소년 박혁거세가 건국했다. 연도로 보면 고구려보다도 이르지만 당시 신라는 거의 촌락 규모에 불과했을 게 분명하다. 백제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온조(溫祚)만 해도 어느 정도의 신민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열었으므로 처음부터 걱정한 것은 새 나라의 안위였다. 그러나 박혁거세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신라의 문제는 오히려 내부가 부족하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사과 한 알로 출발했다면 신라는 달랑 사과 씨 하나로 출발한 격이다. 따라서 백제는 그나마도 남에게 빼앗길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지만 신라는 오히려 자꾸만 살을 붙여나가야 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신라는 건국하자마자 부지런히 외부로부터 인구를 유입한다. 주변의 촌락들은 당연히 일차 섭외 대상이다. 또한 북부의 옥저와 동예 쪽에서 남하하는 사람들도 신라의 원주민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고 자연스레 뒤섞인다. 심지어 일본 쪽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유민들도 합류해서 신라의 몸집을 불린다(일본이라는 이름은 7세기에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가 들어섰을 때 생겼지만, 편의상 일본이라 부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고구려 호동왕자의 낙랑 공격이 있을 때는 낙랑인 5천 명이 신라로 이주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의 ‘이민사’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기사가 나온다. 기원전 20년 마한에 파견된 신라의 사신이 마한 왕에게 꾸지람을 듣고 용감하게 신라의 입장을 변호한 적이 있었다. 김부식(金富軾)은 그 사신의 용기를 칭찬하기 위해 그 부분을 서술했지만,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그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둘러싼 두 가지 정황이다. 우선 마한 왕이 화난 이유는 옥저와 동예의 유민들이 신라로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 용감한 신라의 사신은 바로 일본에서 건너온 왜인이었다. 사건의 주제나 행위자가 모두 신라의 외부인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북부의 유민들이 마한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남하해서 신라로 흡수되고, 일본 출신의 인물이 신라의 관직에까지 임용될 정도라면 신라는 처음부터 이주민들의 국가로 출발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당시 신라로 온 ‘북쪽 사람들’ 중에는 스키타이 혈통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스키타이라면 오늘날 이란 북부에 살던 고대 유목민족이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다. 이들은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가 일어날 때 그들에게 밀려 고향을 잃고 동서양 방향으로 이동했다. 서쪽으로 간 무리는 러시아까지 진출했고 동쪽으로 온 무리는 무려 1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신라까지 온 것이다. 엄청난 이동이지만 알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보면 한반도의 남동부 신라는 ‘땅끝’에 해당한다. 물론 작정하고 출발한 여행도 아니고(그래서 신라까지 오는 데 수백 년이나 걸린 것이다), 오는 도중에 곳곳에서 눌러앉은 무리도 많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신라까지 올 수밖에 없다. 그들의 이동로에는 내내 강한 문명권들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곳들을 모두 우회하고 나면 결국 한반도 남단에 정착하게 된다. 한 예로, 신라 금관의 사슴뿔 장식은 대표적인 스키타이 문화의 흔적이다】.
물론 이주민들이 오기 이전에도 신라 지역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원주민들, 순수한 토박이들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주민들과 유전적으로 혼혈되고 문명적으로 흡수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는 토박이가 없는 독특한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모두들 고향을 떠나온 처지라는 공감대는 아마 신라인들에게 오히려 주체적인 생존 방식을 형성하게 했을 것이며, 나아가 외래의 것을 배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태도를 길러주었을 것이다. 나중에 신라가 중국 당나라 세력을 저항감 없이 끌어들이는 데는 혹시 그런 전통적인 자세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신라는 애초부터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한반도 외부에서 온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였다는 의식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 신라의 초기 위상 고구려와 백제가 나라꼴을 갖춰갈 무렵에도 신라는 아직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따라서 주몽이나 온조(溫祚)와는 달리 박혁거세는 실존 인물이라 해도 단지 한 마을의 창건자일 뿐이다. 그러나 지도에서 보듯이 신라는 지리적으로 ‘땅끝’에 해당하므로 북방과 일본에서 이주민이 유입되기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라는 그 이주민들을 바탕으로 국가를 성립시키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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