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의 개막
마이너 역사
신화로 시작해서 역사를 남긴 고조선과 함께 한반도 역사의 가장 초기 시대도 끝났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단군기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고조선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를 뭉뚱그려 고조선 시대라고 부르는 데, 어떤 면에서는 달리 이름을 지어 붙일 만한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조선이 우리 역사에 남긴 흔적은 상당히 뚜렷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은 언제 있었다 사라졌나 싶을 만큼 자취가 묘연하다. 더구나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은 고조선을 계승하지도 않았고 문명적 연속성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은 어떤 의미일까? 그저 단군이라는 상징적인 시조를 배출한 것뿐일까?
구름에 휩싸인 듯 불분명했던 고조선 시대와는 달리 바로 이어 전개되는 우리 역사는 고조선에 비하면 햇빛처럼 환하다. 이른바 삼국시대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건국 시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는 모두 고조선(위만조선)이 멸망하고 불과 수십 년 뒤에 생겨난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고조선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없었으며, 심지어 고조선의 존재와 역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왜 그랬을까??
앞서 보았듯이 고조선은 처음부터 중국에서 온 외래 문명이었으며, 두 차례 명패를 바꿔 달면서 계속 중국 문명과의 친화력을 높여갔다. 비록 중국 문명과 일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뿌리의 동질성은 내내 유지했으며, 적어도 중국 문명권의 변방으로 역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한나라가 팽창하면서 중국의 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것으로 고조선 문명은 중국 문명의 분명한 일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후 한반도 역사에서 고조선의 위상이 낮았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고조선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중국의 선진 문명을 수입하는 창구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고조선의 멸망은 곧 그 역할이 효용을 다했음을 의미한다. 즉 고조선은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는 곧 이 무렵에 동아시아 세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 문명권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구축된 동아시아의 기본 질서와 구도는 20세기 초반 청나라가 멸망하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2천 년 동안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메이저 문명권 내에서도 몇 개의 마이너 문명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한반도 문명이다【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중국에 대한 역대 한반도 왕조들의 사대주의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문명적 관점에서 중국 문명은 동아시아 세계의 가장 밝은 빛이다. 따라서 이 빛을 중심으로 사방의 작은 문명들이 명멸하는 것은 사실 지극히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천자와 중화세계를 북극성에 비유하고 사방의 제후들과 소문명권들을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二十八宿)에 비유한 사마천(司馬遷)의 유학적 세계관은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올바르게 반영한 사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역사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은 아니다. 고조선 정복을 끝으로 중국은 두 번 다시 한반도를 영토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영원한 변방으로만 묶어두게 된다.
또한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도 중국과의 그런 모호한 관계를 변함없이 유지하며, 중국 문명의 한 마이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앞으로 살펴볼 한반도 역사의 어느 국면에서나 그런 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 문명은 한반도의 것도, 중국의 것도 아닌 어정쩡한 성격의 문명이었다(고대 삼국이 고조선을 계승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런 점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 역사는 한반도의 정식 역사라기보다는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4군이 설치되는 것을 계기로 한반도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과 동시에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제부터는 나름대로 고유한 역사를 전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실상의 한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새 역사의 출발점
시대가 달라졌으니 새 출발점이 필요하다. 단군신화가 고조선 시대를 열었듯이 이제 한반도 역사의 새 시작을 맞아 새로운 건국신화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고구려의 주몽(朱蒙)【중국 측 사서,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삼국사기』에 ‘주몽(朱蒙)’으로 표기되어 있어 주몽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이 발음과 같았는지는 의문이다. 주몽의 이름은 그 밖에도 추모(鄒牟)ㆍ상해(象解)ㆍ추몽(鄒蒙)ㆍ중모(中牟)ㆍ중모(仲牟)ㆍ도모(都牟) 등으로 다양한데, 고구려 시대에는 한자의 음만 따서 발음을 표기하는 이두문을 썼다. 하지만 그 이름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것은 ‘추모’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광개토왕릉비에 ‘추모(鄒牟)’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건국시조 이름을 소홀히 기록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추모라고 써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자의 발음이 지금과 달랐으므로 정확히 추모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추모, 중모, 추몽, 주몽 등은 서로 비슷한 발음이니까 크게 다르지는 않았겠지만(『삼국사기』가 저술된 고려시대에는 아마 朱蒙과 鄒牟의 발음이 거의 같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기서는 널리 알려진 주몽이라는 이름을 그냥 쓰기로 한다】과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신화다. 공교롭게도 두 건국시조 모두 알에서 태어나는데, 이는 필경 아버지의 평범한 혈통을 삭제하려는 의도일 터이다(이러한 난생卵生 신화는 중국 고대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동북아시아 신화의 기본 유형 가운데 하나다).
주몽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유화라는 인간 여성을 수태시켜 태어난다. 유화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 해모수와 사귄 죄로 집에서 쫓겨나 부여 금와왕의 궁중에서 해모수가 보낸 햇빛을 받아 주몽(정확히는 주몽이 들어 있는 알)을 낳는다. 이는 아마 유화가 금와의 첩실로 들어가서 그의 아이를 낳았다는 뜻일 터이다. 환웅처럼 천제의 서자라면 또 모를까, 인간의 서자를 건국시조로 삼고 싶은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금와왕은 서자 출신이다). 어쨌거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주몽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활을 잘 쏘아 금와의 아들들에게서 시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재능있는 서자를 시기하지 않을 적자가 어디 있을까? 부여 왕자들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주몽은 처자까지 팽개치고 남쪽으로 도망쳐 압록강 부근의 졸본에서 고구려를 세운다. 이때가 기원전 37년, 그러니까 그가 스물한 살 나던 해다(그래서 그는 동명왕 혹은 동명성왕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 주몽의 첫 부동산 주몽은 부여 왕자들의 탄압을 피해 남쪽의 졸본으로 내려 왔으나 이곳도 역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산꼭대기에다 성을 짓고 고구려의 출범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은 주몽이 처음 세운 것으로 알려진 오녀산성인데, 현재 중국 랴오닝성에 있다. 주몽은 이 산성을 바탕으로 신흥국 고구려를 크게 일으키게 된다.
물론 고구려가 성립할 당시 졸본 지역은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런 비빌 언덕도 없이 스물한 살의 젊은이가 우지끈 뚝딱 나라를 세우기란 아무리 당시라 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침 졸본에는 부호로 이름을 날리던 소서노(召西奴)라는 과부가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확실치 않으나 주몽보다 다소 연상이었던 듯하다. 애정이었을지, 정략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그들은 결혼을 했고 소서노의 재력은 주몽이 새 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제는 소서노에게 비류(弗流)와 온조(溫祚)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에는 그들 형제가 주몽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으나, 식민지 시대 민족사학자인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그들을 소서노의 전남편 소생이라고 보는데, 아마 그의 주장이 옳을 듯싶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주몽의 계승자가 되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한반도 중부에 새로운 나라 백제를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신생국 고구려가 차츰 안정을 찾아갈 무렵인 기원전 19년, 고구려 왕궁으로 느닷없이 한 젊은이가 찾아온다. 그는 바로 주몽이 부여에 두고 온 예씨 부인의 아들 유리(琉璃)였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헤어진 탓에 정표로 남겨둔 부러진 칼을 맞춰보고서야 아들임을 확신한 주몽은 즉각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덕분에 비류와 온조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유리가 주몽의 적자라지만 비류 형제가 주몽의 친자였다면 20년 가까이 지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찾아온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는 일이 가능했을까? 더구나 형제의 어머니 소서노는 고구려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지 않았는가?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는 데는 모르긴 몰라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승자는 주몽과 유리 부자다. 비류와 온조는 굴러온 돌에 뽑힌 채 고구려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어머니 소서노까지 동반한 채 따르는 무리와 함께 남행열차를 타야 했으니까. 이들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거리를 행군해서 지금의 한강 하류, 바로 서울이 있는 곳에 이른다. 큰 강을 눈앞에 둔 곳에서 형제는 의견이 엇갈렸다. 형 비류는 강을 건너 더 하류로 갈 것을 주장했고, 동생 온조는 지금 이 자리가 좋다고 맞섰다. 당시 그 일대는 낙랑과 말갈이 강성했고 마한에 속하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던 곳, 따라서 비류는 위험을 걱정했을 테고 온조는 산자락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강이 휘감아 돌아가는 오늘날 서울 광진구 아차산 일대의 지세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어머니 소서노는 둘째 아들의 편을 들었다. 결국 비류는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자기 뜻대로 서쪽 미추홀(인천)로 가서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그 자리에 십제(十濟)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백제다【전하는 바에 따르면 온조는 원래 신하 10명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으로 국호를 십제라고 지었다가 나중에 백제로 고쳤다고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인천으로 간 비류가 결국 나라를 세우는 데 실패하고 돌아온 뒤부터 백제라고 고쳤다는 주장도 있고, 온조가 한강을 건너 오늘날 서울 송파구로 간 뒤 백제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당시 마한 연합국 내에는 백제라는 나라가 있었으므로 아마 이 세력과 연합하면서 이름을 바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인천으로 간 비류에 관해서도 이설이 있다. 그가 세운 나라가 온조의 백제와 연맹을 이루면서 상당 기간 존속하다가 나중에 살림을 합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모두 며느리도 모를 이야기들이지만, 당시에 국가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고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쟁점은 박혁거세의 경우에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건국신화를 보자(건국될 당시에는 서라벌이라는 이름이었지만 편의상 신라로 통일하기로 하자. 초기 신라를 뜻하는 서라벌, 서벌, 사로, 사라 등의 이름은 모두 음차어이며 신라와 뿌리가 같다). 사실 연대로만 보면 박혁거세가 주몽보다 약간 앞선다. 그는 주몽보다 9년 앞선 기원전 69년에 부화했기 때문이다. 경주 부근에 있는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어느 날 하늘에게 왕을 내려달라고 빌었다. 기도를 마친 뒤 그들은 우물가에서 백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가보니 붉은 알이 하나 있었다. 촌장들은 이 아이가 장차 세상을 빛나게 하리라는 예감으로 혁거세(赫居世)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바가지 같은 알에서 나왔다 해서 박(朴)씨 성을 붙여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박씨는 중국에도 없는 한반도만의 토착 성씨다(박혁거세는 나중에 여섯 마을에 각각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의 성씨를 내렸다고 하는데, 한자도 전래되지 않았던 당시에 신라가 과연 성씨를 썼는지는 의심스럽다. 신라에 한자가 널리 사용되는 때는 6세기 초 지증왕 때부터일 것으로 추측된다).
공식 연대에서는 박혁거세가 삼국의 건국자들 가운데 가장 앞서지만 그렇게 된 것은 순전히 고려시대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金富軾)의 공로다. 경주 김씨에다 신라 중심주의적 사관을 가졌던 김부식은 신라의 역사를 잔뜩 끌어올려 정통성을 강조했으며,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본기가 맨 앞에 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역사 왜곡일까?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중국 문명권에서 가장 먼 신라 지역에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먼저 나라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더구나 후대에 전개되는 삼국의 초기 역사에서 신라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상당히 뒤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라의 건국이 먼저라는 주장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나중에 보겠지만 사실 삼국시대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하는 시기도 실은 신라가 나라꼴을 내기 시작한 법흥왕 이후, 즉 6세기부 터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부식(金富軾)의 행위는 분명히 역사 왜곡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가도 아니고 문학적 상상력도 별로 없는 그가 신라의 초기 역사를 완전히 날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나중에 보겠지만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왕명을 받고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엄정하게 서술한 정사(正史)이며, 비록 사대주의 사관으로 도배되어 있어 거슬리기는 해도 없는 역사를 꾸며낸 흔적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건국신화는 어떻게 봐야 할까?
우선 내용으로 볼 때 박혁거세 이야기는 신화치고도 지나치게 신화적이다. 같이 알에서 나온 처지였지만 주몽의 경우는 탄생을 둘러싼 정황만 제거하면 그대로 역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스토리가 탄탄한 데 비해, 박혁거세는 날 때부터 왕위가 내정되어 있었으니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閼英夫人)의 경우는 한술 더 뜬다. 박혁거세가 13세에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뒤 5년이 지났을 무렵 용이 내려와 옆구리를 통해 여자아이를 낳는다. 닭의 부리를 입술 대신 달고 있던 그 아이는 사람들이 목욕을 시키자 부리가 빠지고 정상아로 돌아왔는데, 사람들은 이 신기한 여자아이를 박혁거세와 짝맺어준다.
김부식(金富軾)이 농간을 부린 게 아니라면 신라의 건국신화는 김부식 이전 시대부터 전해지던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제작 시기는 아마도 통일신라 시대 초기가 아닐까? 또 각본과 연출을 맡은 것은 당시 신라의 왕실이 아닐까? 후발주자로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오래 살아남아 한반도 역사의 적통을 이어받은 데 대한 역사적 변명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한 나라가 시작한 시기는 원래 정확할 수 없다. 나름의 출발점은 있겠지만 나라라는 게 출발선을 긋고 출발하는 육상경기도 아니고 몇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만드는 동아리도 아니니 딱히 언제 생겼다고 못 박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나라라 해도 오늘날과 같은 영토와 주권을 갖춘 나라가 아니니 어떤 정도의 결집체를 나라라고 불러야 할 지도 애매하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확히 언제 탄생했느냐는 식의 이야기는 역사 서술의 형식상 필요한 것일지는 몰라도 별다른 의미는 없다(신화적 서술을 싫어하는 김부식이 굳이 건국신화를 앞에 배치한 이유도 사관士官으로서 역사의 시작을 어떻게든 서술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가 기원전 69년 박혁거세의 탄생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그저 신라 왕실과 관련된 집안의 가족사가 그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정도로 여기고 넘어가면 될 것이다. 사실 신라의 경우에는 왕위 상속제가 자리잡는 것도 훨씬 후대의 일이니까 가족사도 못 되겠지만.
어쨌든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삼국은 이렇게 출발했다.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부터가 역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고조선에 비해서는 한층 명료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에 그 세 나라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직 신생국인 그들보다는 주변에 무력에서나 전통에서나 더 강한 나라들이 많았다. 따라서 세 나라의 출발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이후 한반도 역사가 삼국시대로 편제된다는 결과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물이 낳은 부부 이 두 사진의 문 안에는 각각 우물이 하나씩 있다. 위쪽은 박혁거세의 알이 나타난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이고, 아래쪽은 용이 내려와 그의 아내인 알영부인을 낳았다는 알영정(閼英井)이다. 비교적 사실적인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스토리에 비해 신라의 경우 신화적인 냄새가 훨씬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라의 성립이 늦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의 위기=고구려의 기회
앞서 고조선이 멸망하면서부터 한반도 역사는 독자적 정체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중국 역사와의 관련성도 한층 커지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고대 삼국이 신화로나마 건국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변화가 일어나면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달라진 덕택이 크다. 어떤 변화일까?)
한4군을 설치한 무제의 시대는 한나라의 최전성기이자 쇠락기의 시작이기도 하다【나중에도 보겠지만 이것은 중국 역대 왕조들의 기본 코스다. 중국의 통일 제국들은 건국한 뒤 초기에는 불안정하게 유지되다가 50년쯤 지날 무렵에 유능한 황제(이를테면 한 무제, 당 태종, 명나라의 영락제)가 등장해서 기틀을 잡고는 곧바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어 200여 년쯤 더 지나면 멸망하는 게 공식이다. 그 점에서도 한나라는 중국식 제국의 전형을 확립한 셈이다】. 무제는 화려한 대외 정복 이외에도 역법을 통일하고, 유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하고, 그밖에 여러 가지 재정정책을 시행하는 등 내치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올렸으나 한 가지 고질적인 ‘중국병’ 남겼는데, 그건 바로 외척과 환관이 발호하는 것이었다. 외척과 환관이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있었지만, 그들이 병폐로 등장한 것은 한나라 때부터다. 왜 그럴까? 통일 제국은 천자, 즉 황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국사를 황제가 처리할 수는 없는 일, 따라서 황제는 측근을 중용하게 되는데 황제가 가장 믿을 만한 가까운 측근이라면 바로 외척과 환관이 아닌가?
아무리 무제가 유학을 장려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유학에 뿌리를 둔 사대부가 관료 집단을 이룰 수 있는 사회 체제는 아니었다(이는 기원 후 6세기에 과거제(科擧制)가 생기면서 가능해진다). 따라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유능한 황제가 연이어 등장하지 않는다면 모든 권력은 결국 외척과 환관들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다시피 카리스마란 유전되는 게 아니다. 결국 외척과 환관들이 황실을 주름잡기 시작하면서 한나라는 점차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중앙정부가 이 모양이니 자연히 변방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한반도에 고대 삼국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조건 덕분이었다. 앞서 본 것처럼 한4군이 둘로 축소되었다가 결국에는 낙랑군만 한반도에 남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 시기부터는 낙랑군마저도 본국과의 통신이 거의 두절된 채 독립국처럼 행세하게 된다. 낙랑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우선 이름부터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한편 수렁에 빠진 한나라는 쉽게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그러다 급기야 기원후 9년에는 외척인 왕망(王莽, 기원전 45~기원후 23)이라는 자가 황실을 주무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름도 새롭고 신나게 신(新)나라다. 이것으로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는 일단 멸망한다. 신나라는 불과 몇 년 가지 못하고 기원후 23년에는 다시 한 황실이 복원되지만, 한 번 스타일을 구겼던 한나라는 과거와 같은 동아시아 질서의 강력한 중심이 되지 못한다(중국사에서는 이 새로운 한나라를 후한後漢, 그 전에 있었던 오리지널 한나라를 전한前漢이라 부른다).
이러한 한나라의 위상 변화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삼국 중에서도 단연 고구려다. 사실 말이 삼국시대지 당시 백제와 신라는 간신히 역사에 명패만 올려놓았을 뿐 나라라 할 것도 없는 처지였다(후대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백제와 신라라는 이름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고구려에 비해 대륙 문명권에서 먼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는 그때까지 국가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보잘것없는 부족연맹체들이 난립하면서 문명적으로도 후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할 기회가 없을지 모르니 이 참에 반도 중부와 남부를 간단히 개괄하고 나서 고구려의 활약상으로 넘어가자.
건국신화는 백제와 신라의 것만이 전해지지만 두 나라가 탄생할 무렵 한반도 중남부에는 수십 개의 부족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국가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수천 호의 가구로 이루어진 데 불과하니까 오늘날의 군이나 읍 정도의 규모로 여기면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즉 폴리스를 연상하면 알기 쉽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했듯이, 한반도의 폴리스들도 서로 얽히면서 느슨한 연맹체를 이루었다. 그 연맹체를 대충 가름하면, 오늘날 충청도와 전라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마한(馬韓), 경상도 지역에는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이 있었다【이것을 합쳐 삼한(三韓)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의 중국 측 사서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이 ‘세 개의 한국’은 서로 간에 서열을 짓지 못하고 병립하는 데 만족했을 뿐이므로 나중에 이 지역의 정치적 통일은 연맹체 자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연맹체에 속한 백제와 신라라는 도시국가가 주도하게 된다.
그에 비해 고구려는 그와 차원이 다른 국가였다. 물론 고구려도 아직 일정한 강역을 지니는 영토국가는 못 되었고 각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연맹을 이루고 있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초기부터 하나의 국가로서 결집된 행동을 취할 정도의 위상은 뚜렷이 지니고 있었다. 다만 변수는 중국이다. 한나라는 비록 중앙정부가 약화되고 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제국이었으므로 신생국 고구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주몽의 아들 유리왕(琉璃王, 재위 기원전 19~기원후 18) 대에 도성을 졸본성에서 더 후방인 압록강 중류의 국내성(오늘날 중국 지린성의 지안集安)으로 옮긴 것은 일단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어차피 고구려의 장기적 생존은 적어도 한나라의 동북쪽 변방, 특히 랴오둥을 물리치지 못하면 보장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때마침 왕망(王莽)의 집권 시기를 거쳐 후한이 들어서자 그 혼란을 틈타 고구려는 즉각 생존과 성장을 위한 작전 개시에 나선다【당시 중국의 정세 변화를 포착하는 고구려의 순발력은 놀라울 정도다. 유리왕 시절에 이미 고구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순종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중국이 예전 같지 않다는 기미를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나라의 왕망(王莽)은 기원후 12년에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려 한 적이 있다. 그때 유리왕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고구려 병사들은 중국의 동원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쳐 버린다. 그리고 그들을 응징하기 위해 추격하던 랴오시(遼西)의 한나라 군이 오히려 역공을 받아 전멸한다. 고구려가 이렇듯 과감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왕망(王莽)의 집권이 불안정하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일 터이다】.
주인공은 고구려의 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44)이다. 열다섯 살에 아버지 유리왕의 뒤를 이은 그는 곧바로 부여를 공략하여 멸망시킴으로써 할아버지 주몽의 원수를 갚는 것으로 정복사업을 출범시킨다. 이로써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비롯된 과거의 뿌리와 숙제를 모두 해결하고 완전한 새 나라로 정비됐다. 여세를 몰아 대무신왕(大武神王)은 압록강 상류를 손에 넣고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해서 영토를 크게 키운다. 이제 고구려는 낙랑과 한반도의 주인 자리를 놓고 쟁패할 만큼 힘을 길렀다.
그러나 고구려의 진출 방향은 남쪽의 낙랑이 아니라 북쪽의 랴오둥이다. 낙랑은 이미 한나라의 제후국이 아니라 사실상의 독립국이었으므로 고구려에게 특별한 위협이 되지 않는 데 비해, 랴오둥은 신생국 고구려의 생존을 위해 일단 제압해 놓아야만 했다. 한편 랴오둥 태수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가 부여를 마음대로 정복한 행위는 제국에 대한 반란이다. 그래서 28년에 태수는 고구려를 선공하지만,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미 고구려의 기세는 욱일승천하는 중이었다. 결국 그는 본전도 건지지 못했고, 고구려는 제국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자신감마저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나 그래도 그 경험은 북으로 향하는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차 고구려가 제국의 위협에 당당히 맞서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세 불리기’다. 그렇다면 적절한 타깃은 남쪽에 있는 낙랑이 될 수밖에 없다. 북수남진(北守南進), 즉 북쪽을 수비하고 남쪽을 공략한다는 방침은 나중에 전성기 고구려의 기본적인 대외 노선이 되지만 원조는 바로 대무신왕 때 생겨난 것이다. 그에 따라 32년부터 대무신왕은 방향을 급선회하여 낙랑에 대한 공격에 나서는데, 그 과정은 유명한 호동왕자 이야기로 전해진다. 자명고만 멀쩡했더라면! 아니, 낙랑공주가 호동의 꾐에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고구려의 거센 공격을 받은 낙랑은 간신히 명패는 유지했으나 사실상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이후 낙랑은 313년에 최종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의 삼한 사이에서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 기병의 기동력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기갑기병이 없었다면 남으로 낙랑을 압박하고 북으로 랴오둥을 공략하는 대무신왕의 뛰어난 기동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낙랑공주를 배신한 호동도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그림에 보이는 무사 같은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고구려의 성장통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정복군주였던 대무신왕(大武神王)은 사실 대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신생국 고구려를 크게 업그레이드한 왕이다. 특히 좌보와 우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한 것은 고구려가 고대국가로서의 위상을 지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였다(좌보와 우보는 고구려 고유의 관직인 대보大輔가 분리된 것인데, 조선시대의 좌의정과 우의정이라고 보면 된다). 왕이 전권을 가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모든 국사를 홀로 처리한다면 그것은 왕이 아니라 부족장일 뿐이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에는 대가(한자로는 ‘大加’라고 쓰지만 당시에 어떻게 발음했을지는 확실치 않다)라는 씨족장들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어 중앙집권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므로 관직이 분화된 것은 초보적인 관료제로의 발돋움이며, 부족국가를 탈피하여 왕국‘ 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새 국가 체제가 안정을 찾으려면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좀 더 오래 살아야만 했다. 당시로서는 평균 수명이었지만 그가 기원후 44년에 마흔 살의 한창 나이로 죽은 것은【옛날 사람들의 수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의 경우 근대에 이르기까지 40세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랬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신생아의 사망률이 워낙 높은 탓에 평균을 계산할 때 그렇다는 이야기고, 일단 ‘고비’를 넘기고 나면 중병에 걸리지 않는 한 오늘날과 비슷한 수명을 누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이 고대인들의 수명을 갉아먹었다면, 환경오염이 없었다는 점은 오히려 현대인보다 장수하는 데 유리했을 터이다】 아직 신생국의 티를 벗지 못한 고구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생국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보다 권력 승계가 안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은 태자로 책봉되고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 삼촌(대무신왕의 동생)인 민중왕(閔中王, 재위 44~48)이 4년 동안 재위한 뒤 태자는 애초의 예정대로 왕위에 올라 모본왕(慕本王, 재위 48~53)이 되지만 그의 운명은 여전히 순탄하지 않다. 불안정한 권력 기반을 다지려 한 것일까? 그는 아버지가 숙제로 남겨둔 랴오둥 정벌을 강행한다. 거기까지는 좋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을 산 데 있다. 랴오둥의 몇 개 현을 공략하고 태수와 강화를 맺는 등 성과는 다소 있었으나, 결국 재위 5년 만인 53년에 그는 귀족들에게 살해 당한다.
역사에는 모본왕이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 쿠데타로 실각한 왕은 그런 평가로 남는 법이다. 혹시 그는 아버지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이룩한 중앙집권적 행정 개혁의 희생물이 아니었을까? 대무신왕의 카리스마에 눌려 지냈던 귀족들은 그의 젊은 아들에게 대신 화풀이를 한 게 아니었을까? 진실은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그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모본왕이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으나 그들은 그 대신 그의 일곱 살배기 사촌동생을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왕통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이로써 건국시조인 주몽 이래 직계 혈통으로 순조롭게 승계되어 오던 고구려의 왕위는 처음으로 삐걱거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선택은 좋았다. 일곱 살 소년으로 즉위한 고구려 제6대 태조왕(太祖王, 재위 기원후 53~146)은 이후 93년 동안 재위했고 119세를 살아, 고구려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대 왕조의 모든 왕들 가운데 가장 오랜 재위에다 최장수를 기록한 왕이 되기 때문이다(그의 기록을 능가한 왕은 가야의 김수로왕인데, 나중에 보겠지만 그의 경우는 신화이므로 믿을 수 없다)【우리 역사상 모든 왕조의 왕들(왕계가 불확실한 가야와 삼한을 제외하면 고구려 28명, 백제 31명, 신라 56명, 발해 15명, 고려 34명, 조선 27명 모두 합쳐 191명이다) 가운데 태조왕은 재위 기간과 수명에서 단연 으뜸이다. 4세기의 장수왕(長壽王)도 워낙 오래 살아 그런 이름이 붙었지만 78년의 재위에 98세밖에(?) 살지 못했다】. 게다가 태조왕(太祖王)은 오랜 치적에 걸맞는 많은 업적을 쌓아 고구려에게서 마침내 신생국이라는 딱지를 떼어내게 된다.
대무신왕(大武神王)으로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팽창 전략은 태조왕에 이르러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마치 자신이 장차 오래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태조왕은 결코 서둘지 않는다. 어머니의 섭정이 끝나고 성년이 되자 그는 우선 주변에 아직 남아 있는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고구려의 강역을 최대로 확장한다. 당시 고구려의 국경은 서쪽으로 랴오둥 접경 지대, 북쪽으로는 부여가 있던 만주, 동쪽으로는 동해, 남쪽으로는 청천강에 이르렀으니 이미 마이너의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는 태생적인 불안정이 있었다. 여러 나라가 분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고구려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계속 팽창해야만 했고, 팽창하려면 반드시 고구려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북의 랴오둥과 남의 낙랑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애초에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남과 북 두 개의 한나라 군을 정복하려 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점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위 56년째를 맞은 해(109년)에 이제 자신이 생겼다 싶은 태조왕(太祖王)은 드디어 마음먹고 랴오둥을 공략한다. 하지만 역시 제국은 썩어도 준치였다. 오히려 랴오둥 태수의 강력한 카운터펀치를 맞고 태조왕은 뼈아픈 첫 패배를 당한다. 다행히도 좌절의 시기는 길지 않았다. 태조왕에게는 오래 전부터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크고 작은 정복 전쟁을 수행해 온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인물이 공식 무대에 데뷔할 때다. 그는 바로 태조왕의 동생인 수성(遂成)이었다.
한 번 꺾었다는 자신감에설까? 랴오둥 태수 채풍은 121년 초에 거꾸로 고구려를 침범해 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숨은 실력자 수성이 전면에 나와 멋지게 수성(守城)에 성공한다. 고구려 대 랴오둥의 대결이 1 대 1 무승부를 이루었다 싶은 순간 수성은 곧바로 역공을 개시한다. 랴오둥군을 본거지까지 추격한 수성은 드디어 채풍을 잡아죽이고 랴오둥 쟁탈전에서 우승한다. 이 사건에 약이 바짝 오른 중국인들은 『후한서』에 ‘고구려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힘이 세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을 좋아한다’는 다분히 주관적인 혹평을 기록함으로써 화를 달랬다.
중국인들이 뭐라 하든 이제 고구려는 생존이라는 과제를 확실히 해결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고구려는 랴오둥을 제압했다. 더구나 랴오둥은 한나라의 현직 군인 데다 인근의 소국들을 놓고 고구려와 경쟁하던 라이벌이었으니 남쪽의 전직 군인 낙랑을 물리친 것보다 훨씬 가치가 컸다. 이제 고구려는 화려한 정복국가로 우뚝 섰다. 이런 기세로 나아간다면 장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질서의 중심으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무릇 국가라면 대외적 성장과 대내적 안정 간의 균형이 필요한 법이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에 힘을 결집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고도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드라이브를 걸면 균형을 잃게 된다.
대외적 성공으로 한껏 주가를 높인 수성의 경우가 그랬다. 랴오둥을 정벌한 혁혁한 전공을 바탕으로 그는 형인 태조왕(太祖王)을 능가하는 인기와 권력을 누리면서 내치에도 일일이 간섭하게 된다. 여기에는 아마 칠순을 훨씬 넘은 늙은 형의 말없는 양보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수성은 오랜 2인자의 생활을 겪은 뒤에 맛보는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다. 용맹과 포악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걸까?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걸까? 전장에서 더없이 용맹했던 수성은 권력자가 되자 곧바로 포악한 심성을 드러냈다.
형은 혈육의 처지였으니 동생이 하는 일을 그냥 봐넘겼겠지만 태조왕의 신하들은 그럴 수 없었다. 수성이 사실상의 왕으로 처신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 태조왕의 우보 고복장은 이윽고 146년에 태조왕에게 수성을 제거하자는 건의를 한다. 그러나 태조왕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혈육도 혈육이지만 이미 그의 나이는 한 세기를 1년 앞둔 아흔 아홉 살이었다. 그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다. 하긴, 그 아우도 이제 일흔다섯의 노인이었으니. 그러나 백 세 노인은 박수칠 때 떠났다고 자부했을지 모르지만 아직 혈기왕성한(?) 칠순 노인의 생각은 달랐다. 실권이야 원래부터 지녔고 이제는 명함상으로도 왕이 된 수성, 즉 차대왕(次大王, 재위 146~165)은 반대파를 모조리 제거해야만 마음을 놓을 만큼 불안한 심정이었다. 결국 그는 일을 저지른다. 고복장을 죽인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태조왕(太祖王)의 두 아들마저 제거한 것은 도를 넘어선 만행이었다. 아직 대외적인 성공에 비해 대내적으로 왕권이 확실히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으니 귀족들이 그 사태를 그냥 넘어갈 리 없다. 결국 165년에 귀족의 리더였던 명림답부(明臨答夫, 67~179)가 차대왕을 살해하고 그의 동생 백고를 왕위에 옹립하니 그가 신대왕(新大王, 재위 165~179)이다. 그 공로로 당시 이미 98세였던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오늘날의 국무총리격인 국상에 임명되어 113세까지 권력을 누리면서 쿠데타의 단맛을 흠뻑 즐겼다.
한창 뻗어나야 할 시기에 자꾸 내정 불안에 발목이 잡히는 고구려, 그러나 고구려의 ‘성장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대 태조왕부터 8대 신대왕까지 고구려의 왕계는 벌써 100년이 넘도록 연속해서 형제에게로 이어지고 있다【형제 상속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고대에는 부자 상속이 훨씬 진보적인 왕위계승 방식이다. 물론 전 왕의 아들보다 동생이 나이도 더 많고 경륜도 풍부할 테니 왕위계승에 더 적임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통이 직계로 이어진다는 것은 곧 그만큼 왕권이 강력하다는 것을 뜻한다. 형제와 같은 방계로 왕통이 이어질 경우에는 우선 계속 왕위를 이어가야 할 형제가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게다가 형제를 왕으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간섭과 입김이 작용하게 되므로 그만큼 왕권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실 이 과정의 연대에는 큰 문제점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85쪽에서 백제, 신라의 경우와 한데 묶어 살펴보기로 하자).
신대왕은 죽은 형의 아들을 관직에 등용하는 회유책으로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한편,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공포함으로써 왕통을 둘러싼 더 이상의 잡음을 없애려 했지만, 해묵은 난제였던 만큼 권력 승계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 중국사 속의 고구려 아쉽게도 우리에게 알려진 고구려사는 대부분 중국 역사서에 전해지는 내용이다(나중에 보겠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중국 문헌에 크게 의존했다). 그림은 『삼국지』 「위지(魏志)ㆍ동이전」에서 고구려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오나라, 촉나라와는 달리 위나라는 고구려와 접경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고구려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물보다 흐린 피
일단 신대왕의 왕위는 그의 아들인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이 계승해서 왕위계승의 문제는 진정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왕위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고국천왕의 동생들에게도 과연 부자 상속의 의지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말해주는 주요한 제도를 하나 보고 넘어가자. 우리에게 고국천왕은 진대법(賑貸法)이라는 획기적인 제도로 잘 알려져 있다. 194년에 처음 시행된 진대법은 사실 국상 을파소(乙巴素, ?~203)의 작품이지만, 원래 어느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모든 업적은 그 왕의 치적으로 기록되게 마련이니(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오래 재위한 지배자는 거의 대부분 치적도 많다) 고국천왕의 업적이기도 하다. 더욱이 을파소가 국상으로 중용된 데는 고국천왕의 확고한 지지가 있었다.
고국천왕은 즉위 초부터 거듭난 새 나라를 안정시킬 인재를 백방으로 찾고 있었다. 그가 낙점한 인물은 안류(晏留)라는 사람, 그러나 안류는 더 적임자가 있다며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을파소를 왕에게 천거한다. 반신반의한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우태라는 벼슬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을파소는 의외로 거절한다. 그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은 그 정도 벼슬로는 자신의 큰 뜻을 펼치기 어렵다는 것, 마음으로 그 심정을 이해한 고국천왕은 그제야 을파소가 큰 인물임을 깨닫고 그를 국상으로 기용한다. 농사꾼이 졸지에 국상에 올랐으니 귀족들이 반발할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왕이 예상치 못했을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혹시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사람됨에 매료되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기존의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새로 왕당파를 육성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건 아니었을까? 그것으로 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온 귀족들의 간섭과 견제를 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이미 190년에는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於卑留)가 이끄는 귀족 반란이 일어난 적도 있었으니, 을파소를 기용한 데는 그런 정치적 배려가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대법은 일종의 빈민 구제법으로, 흉년이 들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것[賑]과, 식량이 떨어지는 봄에 국가국가가 농민들에게 식량을 빌려주고 가을에 추수한 곡식으로 갚게 하는 것[貸]을 내용으로 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진대법이 시행되려면 당연히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 빽 하나 없는 을파소가 자신의 정책을 굳건히 추진하기 위해서도 왕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지만, 적어도 중앙정부가 각지의 곡식을 수집하고 배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만 진대법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대법도 역시 고구려가 확고한 왕국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그토록 왕권 안정에 노력한 고국천왕이었지만 불행히도 그에게는 왕위를 상속시킬 아들이 없었다. 용의 그림을 다 그려놓고 눈만 찍지 못한 격이랄까? 게다가 그에게는 장성한 남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다시 고구려의 왕위계승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가 죽으면서 해묵은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여기에는 그의 아내까지 한몫 거든다. 왕비 우씨는 남편의 죽음을 숨기고 시동생을 찾아갔다. 첫째 시동생 발기(發岐)를 유혹해서 왕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도다. 당시 고구려에는 형이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옛 부여의 풍습이 남아 있었으니 오늘날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수상쩍게(?) 여길 행동은 아니다【이런 풍습은 전세계 여러 문명권에서 볼 수 있는데, 아마 남편이 죽으면 그 처자식의 생계가 막막해지므로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것이다. 유명한 사례로는 15세기 영국 왕 헨리 8세의 경우가 있다. 그는 형 아서가 젊어서 죽자 여섯 살 연상인 형수 캐서린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결국 왕이 된 다음에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 후로 다섯 차례나 새 왕비를 얻었고 그 때문에 중세 영국의 왕실만이 아니라 캐서린의 친정인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황실과 로마 교황청까지 발칵 뒤집어놓는 대사건을 불렀다(『종횡무진 서양사』, 「꽃」 3장 참조)】. 하지만 발기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는 아직 형의 죽음을 몰랐지만 형에게 아들이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 따라서 그 자신이 누구보다 유력한 대권 후보였으니 굳이 우씨의 유혹과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그러자 우씨는 다시 다음 시동생 연우(延優)에게 가는데, 그로서는 어차피 대권과 무관했던 처지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다. 그들은 곧장 궁으로 들어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다음날 아침 군신에게 왕의 죽음을 공표하면서 동시에 연우의 왕위계승을 공식화한다. 이제 발등에 불이 붙은 것은 발기다.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한 그는 랴오둥으로 가서 태수 공손탁(公孫度, 그는 고구려 초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랴오둥의 공손씨 정권을 개창한 인물이다)에게 몸을 의탁하고는 랴오둥의 군대 3만을 빌려 고구려를 침공한다. 명백한 반역이요 매국행위지만, 왕족이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곧 당시까지 고구려와 라오둥의 구분이 얼마나 희미했는지, 또 고구려의 정체성이나 민족의식이 얼마나 희박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이다.
차대왕에게 랴오둥의 본토를 내주고 서쪽 끝자락으로 밀려나 있던 랴오둥 태수는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게 됐으니 물론 대환영이다. 그러나 연우에게는 나름대로 대책이 있다. 나라를 배반한 형이 공격해오자 형을 배반한 동생은 막내 계수(罽須)를 보내 싸우게 한다. 과연 거짓말같이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 결국 넷째(罽須)에 쫓긴 둘째(발기)는 자살하고 첫째(고국천왕)가 남긴 왕위는 셋째(연우)가 물려 받아 제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이 된다. 토끼를 잡았으니 이제 사냥개 따위는 필요없다. 산상왕은 우씨를 멀리 하고 따로 첩실을 두어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나중에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이 된다. 집안으로 봐도, 개인적으로 봐도 욕된 과거와의 확실한 단절을 위해 산상왕은 209년, 인근에 환도성을 새로 짓고 왕궁을 그곳으로 옮긴다.
이것으로 어지러웠던 고구려의 왕계는 최종적으로 정리되고 부자 간의 왕위계승이 확립된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죽으면서 부자 상속이 끊어진 지 무려 150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무렵이면 이미 고구려의 역사는 250년 가까이 되지만, 사실 고구려가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한 것은 이 시기다. 그때까지의 기간은 부족국가의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강역을 확장하고, 왕국으로서 가장 중요한 권력의 승계 제도를 매듭짓고, 행정제도와 관제를 비롯한 각종 제도를 갖춘 준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 고구려 역사의 시작은 이제부터다.
▲ 매국의 대가 고구려는 주몽이 창건한 이래 꾸준히 남쪽으로 내려왔다. 수도를 옮길 때마다 조금씩 남하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위쪽 사진은 초기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의 환도성(국내성)이다. 비록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이것은 아마 원래의 환도성이 아니라 발기의 매국 행위로 공손탁에게 빼앗긴 뒤 산상왕이 다시 지은 환도성일 것이다. 아래쪽 사진은 중국에서 최근 복원한 성곽 일부분인데, 고구려는 우리 역사지만 그 옛 영토는 현재 중국에 속하기에 안타깝게도 중국 측이 관리를 맡고 있다.
포위 속의 생존
지금까지 살펴본 고구려 초기사에서도 연대나 사실에서 부정확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나마 고구려의 경우는 한결 나은 편이다. 한반도 중남부로 오면 상고사를 가리고 있는 안개층은 더욱 두터워진다. 왜 그런지는 알기 쉽다. 전등에서 멀어질수록 빛이 흐려지듯이 중국 문명권에서 먼 중남부는 반도 북부보다 문명의 빛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북부의 고구려와 낙랑이 동방으로 오는 문명의 빛을 흡수, 차단하고 있는 탓에 북부의 정세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그 빛이 남부에까지 퍼질 수 없는 형편이다(그래서 백제와 신라의 역사가 선명해지는 시기는 고구려가 반도 북부의 확고한 패자로 떠오르는 4세기부터다).
하지만 지금 우리로서는 안개가 있으면 있는 대로 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가 나라 꼴을 갖추는 2세기 말까지 한반도의 중남부에 둥지를 튼 백제와 신라는 어떤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쳤을까?
건국신화에서는 신라가 앞서지만, 실제의 역사는 고구려 왕실의 혈통과 문명의 일부를 나눠받은 백제가 역시 한 걸음 앞서나간다. 그런 이유에서, 신라 본기(本紀)를 맨 앞에 배치한 『삼국사기』와는 달리 백제를 먼저 살펴보는 게 바른 순서라 할 것이다.
인천을 선택한 비류는 비록 자신의 위치 선정에서는 삐끗했지만, 온조(溫祚)가 자리잡은 아차산 일대를 위험스럽게 본 판단에서는 옳았다. 온조는 결국 나라를 세운 지 13년 만에 주변의 위협에 못 견디고 한강을 건너 오늘날 서울의 송파구로 터전을 옮겼기 때문이다. 온조는 아차산 이북의 원래 거점을 위례(慰禮)라고 불렀는데, 강을 건너서도 그 이름은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하북위례와 하남위례로 구분한다. 그러나 새 터전에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라를 세웠다고는 하지만 북쪽에 낙랑이 버티고 있는 데다 삼한 중에서도 가장 강성하고 규모가 큰 마한의 세력권에 자리잡은 백제의 입장에서는 우선 영토의 확장이나 문명의 발전보다도 생존이 급선무였다.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한강 하류의 위례로 천도했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사실 천도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이사한 격이었다. 당시 백제는 변변한 강역조차 가지지 못한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형편에서 백제가 취해야 할 가장 좋은 생존 방법은 뭘까? 백제는 서쪽으로 바다에 면하고 북의 낙랑, 동의 말갈, 남의 마한으로 삼면이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세 세력이 연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낙랑은 명색이 한나라의 군이고, 말갈은 만주족의 갈래로서 목문명권에 속한 부족이며【말갈이 나온 김에 지금까지 말하지 않 은 한반도 동북부, 즉 오늘날 함경도와 강원도의 사정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삼국시대가 본격화되는 3세기 무렵부터는 한반도 역사 속으로 편입되지만, 당시까지 이 지역은 한반도 문명권이라기보다는 반농반목(半農半牧) 성격의 만주 문명권이었다. 이곳에 있었던 부족국가로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있는데, 옥저는 만주 동남부와 함경도, 동예는 옥저의 남쪽에서부터 경상북도 북부까지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민족적으로 두 나라의 주민들은 대부분 말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2세기 말경에 고구려에게 복속되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고구려가 신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전부터 경상북도까지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쪽 방면에서는 백제가 강성했으므로 고구려의 남하가 쉽지 않았다】, 마한은 한반도 남부의 토착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나아갈 노선은 명백하다. 셋 중 한 세력과 결탁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처음부터 기습공격으로 백제와 상견례를 나눈 말갈을 제외하면, 낙랑과 마한은 신생국 백제에 대해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자니 쉽지 않겠고 그렇다고 놔두자니 찜찜하다. 그래서 두 나라는 신생국 백제를 어느 정도 복속시키는 선에서 그 존재를 인정해주고자 한다. 쉽게 말하면 자기 휘하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셋 중 어디에 붙을까? 온조(溫祚)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정답을 찾아낸다. 우선 말갈은 사납고 싸움을 즐기는 데다 문명의 성격이 다르고 특정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지 못하므로 논외다. 그 다음 낙랑은 중국의 한나라 계열인 데다 자신이 떠나온 고구려 쪽으로 향하는 방향에 위치해 있으니 동맹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답은 마한밖에 없다.
그래서 온조는 일단 말갈만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한편, 겉으로는 낙랑과 마한에 사신을 보내 두루 친교를 맺으면서도 속으로는 낙랑과 마한을 분명하게 차별적으로 대한다.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기원전 11년에 온조는 도성 북쪽에 방어용 울타리를 쳤다. 낙랑 태수가 사신을 보내 우리를 경계하는 게 아니냐고 따지자 온조는 내 집에 내가 담을 세우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단호하게 대한다. 반면 그로부터 16년 뒤에는 남쪽(오늘날의 안성)에 울타리를 친 것에 대해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항의하자 그의 태도는 사뭇 달라진다. 군말없이 울타리를 헐어 버린 것이다.
정세를 읽는 온조의 감각은 무척 뛰어났다. 낙랑과 마한은 아직 백제에게 버거운 상대였으나 실은 지는 해였다. 어차피 두 나라는 몰락할 터, 따라서 백제는 해가 지고 나면 어느 쪽 방향으로 진출할지를 미리 계획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가 선택할 방향은 남쪽밖에 없다. 온조가 낙랑을 뿌리치고 마한과 우호를 유지한 것은 그런 판단에서였던 것이다. 미래의 적에게 오히려 우호를 보이는 그의 방침은 장기적인 전략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왕릉 대신 사당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묘가 있지만 그의 아들로 백제를 창건한 온조는 묘가 없다(실은 평양에서 발굴된 동명왕릉도 정말 주몽의 시대에 쌓은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 대신 온조는 사당을 얻었다. 사진은 고려시대에 온조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온조가 하남위례로 천도한 데 유념해서 남한산성 내에 지었다.
과연 온조는 마한의 약화가 가시화되자 곧바로 마한의 변방을 공략해서 영토를 확장한다. 마한은 반격할 힘이 없다. 마한이 최종적으로 병합되는 것은 4세기 중반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일이지만 이미 온조 때부터 마한과 백제의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온조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전환해서 치세 말기에는 이미 북쪽으로 임진강, 동쪽으로 오늘날 춘천에 이르는 강역을 이루게 된다. 기원후 20년, 최초로 그는 전국 순시에 나섰는데 무려 50일이나 걸릴 정도였다. 이제 백제는 신생국의 딱지를 떼고 왕국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건, 즉 일정한 강역과 백성을 얻은 것이다.
조상을 잘 둔 덕분에 온조 이후의 왕들은 바깥에 대해 어느 정도 안심하고, 주로 내치에 주력할 수 있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신생국이 법과 제도를 갖추는 지름길은 선진국의 것을 모방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백제는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관제와 행정제도를 모방했을 것이다. 백제 초기의 세부적인 제도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구려처럼 좌보와 우보를 중심으로 편성된 관제나 죄인을 석방하고 사면해주는 제도 등은 확인되고 있다.
백제가 안정을 찾으면서 그 주변 정세도 조금씩 달라진다. 낙랑이나 마한과는 여전히 별다른 마찰이 없다. 말갈은 여전히 잊을 만하면 침략해와서 골칫거리지만 그것도 늘상 있던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동쪽이다. 기원후 60년 무렵이 되자 백제의 강역은 오늘날 청주까지 확대되기에 이른다. 거기서 백제는 처음 듣는 나라와 접촉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신라라는 나라였다.
이 무렵부터 2세기 말까지 100여 년 동안 백제의 대외 관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라는 신라다. 물론 아직까지 두 나라의 관계는 분명한 색깔이 없다. 백제는 신라와 몇 차례 소규모 전쟁을 벌이는가 하면, 말갈이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의 SOS를 받아들여 원군을 파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두 나라는 파트너라기보다는 라이벌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이 점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흥미로운 논평이 하나 있다(김부식은 연도별로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하면서도 가끔씩 구미가 당기는 대목이 나오면 論曰, 즉 ‘논하여 가로되’로 시작하는 개인적 논평을 달고 있다). 백제의 4대 왕인 개루왕 시절, 그러니까 155년에 신라의 반역자가 백제로 망명해 왔다. 신라 왕(아달라왕)이 반역자를 압송해 달라고 요청하자 백제가 단호히 거부하면서 양국 관계가 전쟁일보 직전에 이르기까지 악화된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관계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은 춘추시대의 중국 사례까지 들먹이면서 (이건 김부식의 특기다) 백제 왕의 악덕과 무지를 탓하고 있다. 이런 김부식의 왜곡된 백제관은 백제 본기 다른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그렇게 보면 영호남 지역 감정의 뿌리는 무척 역사가 오랜 것인지도 모른다】. 건국신화 하나 남겨놓은 것 이외에는 아직 역사에 자취도 보이지 않아야 할 신라가 어떻게 해서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놓고 백제와 다툼을 벌일 만큼 성장했을까?
이주민 국가
고구려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신라의 경우에도 나라가 있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있었다. 건국신화에서 보았듯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여섯 마을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그 지역의 원주민은 아니다. 『삼국사기』의 맨 첫머리에는 조선(고조선)의 유민들이 내려 와서 여섯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되어 있다. 이 점은 신라라는 국가의 독특한 성격을 암시한다.
우선 앞에서 보았듯이 건국신화도 독특하다. 신화적 성격이 유달리 강할뿐더러 같은 계통에서 출발한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와는, 의도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관련을 두지 않고 있다.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빼고 역사적인 요소만을 추출하면, 신라의 건국은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중국과도 무관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과연 문명의 빛이 강한 대륙에서 가장 동떨어진 한반도 남동부에서 우연히 신라가 생겨나서 초고속으로 성장했다는 게 가능할까?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박혁거세 신화에서 얻을 수 있는 추측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박혁거세가 외부인이라는 추측이다. 앞서 단군신화에서도 보았듯이 신화에서 하늘이란 대개 외부를 가리킨다. 따라서 박혁거세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아마도 신라가 일어난 지역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일 것이다. 여섯 마을의 주민들 자체도 원래는 외부에서 온 이주민들이었으니 외부인에 대한 시선이 그리 배타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박혁거세와 용의 몸에서 태어난 그의 아내를 이성(二聖, 두 명의 성인)이라 부르며 존경했다는 사실은 그 점을 뒷받침한다. 자신들과 같은 지역 출신이라면 당연히 혈통이 확인되므로(누구나 부모가 있으니까!) 십대 청소년에게 굳이 성인이라는 호칭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박혁거세의 경우 신화적인 탄생 과정만 전해질 뿐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13년의 시기에 관해서는 신화적인 기록조차 없다.
그게 아니라면 두 번째 추측은 박혁거세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신라는 나중에 중국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단일 왕조 시대를 연다. 승자의 입장에서 출발기, 즉 초기 역사는 충분히 신화로 포장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박혁거세 신화는 신라가 한반도 역사의 적자가 되는 7세기 이후, 혹은 적어도 삼국 중의 하나로 명함을 내밀게 되는 6세기에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6세기 중엽 신라의 거칠부는 진흥왕의 명을 받아 신라의 역사를 다룬 『국사(國史)』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는데, 이 책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혹시 이 책에서 건국신화를 지어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신화를 그대로 수용하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열세 살 소년 박혁거세가 건국했다. 연도로 보면 고구려보다도 이르지만 당시 신라는 거의 촌락 규모에 불과했을 게 분명하다. 백제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온조(溫祚)만 해도 어느 정도의 신민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열었으므로 처음부터 걱정한 것은 새 나라의 안위였다. 그러나 박혁거세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신라의 문제는 오히려 내부가 부족하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사과 한 알로 출발했다면 신라는 달랑 사과 씨 하나로 출발한 격이다. 따라서 백제는 그나마도 남에게 빼앗길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지만 신라는 오히려 자꾸만 살을 붙여나가야 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신라는 건국하자마자 부지런히 외부로부터 인구를 유입한다. 주변의 촌락들은 당연히 일차 섭외 대상이다. 또한 북부의 옥저와 동예 쪽에서 남하하는 사람들도 신라의 원주민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고 자연스레 뒤섞인다. 심지어 일본 쪽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유민들도 합류해서 신라의 몸집을 불린다(일본이라는 이름은 7세기에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가 들어섰을 때 생겼지만, 편의상 일본이라 부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고구려 호동왕자의 낙랑 공격이 있을 때는 낙랑인 5천 명이 신라로 이주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의 ‘이민사’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기사가 나온다. 기원전 20년 마한에 파견된 신라의 사신이 마한 왕에게 꾸지람을 듣고 용감하게 신라의 입장을 변호한 적이 있었다. 김부식(金富軾)은 그 사신의 용기를 칭찬하기 위해 그 부분을 서술했지만,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그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둘러싼 두 가지 정황이다. 우선 마한 왕이 화난 이유는 옥저와 동예의 유민들이 신라로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 용감한 신라의 사신은 바로 일본에서 건너온 왜인이었다. 사건의 주제나 행위자가 모두 신라의 외부인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북부의 유민들이 마한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남하해서 신라로 흡수되고, 일본 출신의 인물이 신라의 관직에까지 임용될 정도라면 신라는 처음부터 이주민들의 국가로 출발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당시 신라로 온 ‘북쪽 사람들’ 중에는 스키타이 혈통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스키타이라면 오늘날 이란 북부에 살던 고대 유목민족이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먼 거리다. 이들은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가 일어날 때 그들에게 밀려 고향을 잃고 동서양 방향으로 이동했다. 서쪽으로 간 무리는 러시아까지 진출했고 동쪽으로 온 무리는 무려 1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신라까지 온 것이다. 엄청난 이동이지만 알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보면 한반도의 남동부 신라는 ‘땅끝’에 해당한다. 물론 작정하고 출발한 여행도 아니고(그래서 신라까지 오는 데 수백 년이나 걸린 것이다), 오는 도중에 곳곳에서 눌러앉은 무리도 많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신라까지 올 수밖에 없다. 그들의 이동로에는 내내 강한 문명권들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곳들을 모두 우회하고 나면 결국 한반도 남단에 정착하게 된다. 한 예로, 신라 금관의 사슴뿔 장식은 대표적인 스키타이 문화의 흔적이다】.
물론 이주민들이 오기 이전에도 신라 지역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원주민들, 순수한 토박이들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주민들과 유전적으로 혼혈되고 문명적으로 흡수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는 토박이가 없는 독특한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모두들 고향을 떠나온 처지라는 공감대는 아마 신라인들에게 오히려 주체적인 생존 방식을 형성하게 했을 것이며, 나아가 외래의 것을 배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태도를 길러주었을 것이다. 나중에 신라가 중국 당나라 세력을 저항감 없이 끌어들이는 데는 혹시 그런 전통적인 자세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신라는 애초부터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한반도 외부에서 온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였다는 의식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 신라의 초기 위상 고구려와 백제가 나라꼴을 갖춰갈 무렵에도 신라는 아직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따라서 주몽이나 온조(溫祚)와는 달리 박혁거세는 실존 인물이라 해도 단지 한 마을의 창건자일 뿐이다. 그러나 지도에서 보듯이 신라는 지리적으로 ‘땅끝’에 해당하므로 북방과 일본에서 이주민이 유입되기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라는 그 이주민들을 바탕으로 국가를 성립시키게 된다.
세 편의 건국신화
외래인 집단이 많았으니 신라의 초기 왕계가 일정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왕이라는 직함의 명칭부터 혼란스럽다. 건국자인 박혁거세는 거서간(居西干)을 칭호로 썼다. 그러나 그의 아들 남해왕(南解王, 재위 기원후 4~24)은 차차웅(次次雄)이라는 다른 호칭으로 불린다. 이렇게 거서간과 차차웅을 한 명씩 배출한 뒤 그 다음 신라 왕들은 이사금(尼師今)이라는 직함을 가진다. 이사금이 4세기의 16대 흘해왕까지 약 300년간 사용되면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다음의 내물왕(奈勿王)부터 22대 지증왕까지는 또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을 쓴다. ‘왕’이라는 중국식 명칭을 쓰는 것은 6세기 초반의 지증왕 때부터다(여기서는 그 이전의 시기라 하더라도 간편하게 그냥 왕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왕을 뜻하는 이 여러 명칭들이 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각각의 뜻과 유래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아직 논란만 분분할 뿐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추측건대 이사금이란 잇금, 즉 이의 숫자가 많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임금의 옛말을 뜻하며, 마립간은 원래 머리라는 뜻으로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알려졌으나, 뜻은 그렇다 해도 왜 하필 그 시기에 이사금이나 마립간을 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앞서 말한 것처럼 신라 초기에는 외래 이주민들이 상당히 많았던 만큼 왕통도 어지러웠을 테고, 그 여러 직함은 그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터이다.
신라 초기의 왕위계승을 보면 그런 사정을 더욱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부자 또는 적어도 형제간에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던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와는 달리 신라의 왕위계승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일단 초반에는 그런 대로 ‘건국 이념’에 힘입어 부자 세습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유리왕(儒理王, 재위 24~57)이 즉위할 무렵에는 한 차례 혼란이 예고된다. 남해왕의 아들 유리가 당시 높은 덕망으로 유명한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탈해도 한사코 거절한다. 유리는 아버지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왕위가 이어져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으나, 탈해는 그렇다면 나이를 조사해보자고 제안한다. 물론 달력이 없으니 나이도 알 길이 없다. 결국 두 사람은 떡을 깨물어 잇금의 수를 따지기에 이른다. 잇금이 많으면 나이가 많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당시의 기준에 따른 것이었으니, 무차별적인 득표수로 결정하는 오늘날보다 더 폼나는 선거제도였다 할까? 불행히도(?) 유리는 잇금이 더 많았던 탓에 신라의 3대 왕이 된다.
유리왕 대에 이르러 신라 사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므로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자. 옛날에 유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문학과 관련이 깊었거나 음악적 감성이 풍부했던 모양이다. 황조가(黃鳥歌)라는 청승맞은 연가를 지어 한반도 최초의 서정시인이 된 사람이 고구려의 유리왕이라면, 신라의 유리왕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그에 못지않은 솜씨를 발휘한다(한자로는 고구려의 유리가 琉璃, 신라의 유리가 儒理로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이두문일 테니 사실 같은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연대도 엇비슷해서 두 사람 다 1세기 초반의 왕이다). 또한 신라의 유리왕은 행정에도 남다른 감각을 선보인다. 일찍이 건국의 토대가 된 여섯 마을을 6부로 만들어 각각 새로운 성씨를 부여하고(성씨가 귀족들에게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삼국시대 중반부터이므로 이 사실은 믿기 어렵다), 그 전까지 고구려에서 본뜬 대보 정도의 초보적 직책밖에는 없던 관직을 새로 창설해서 6부의 원로들을 정식 관리로 기용한다.
문화를 사랑한 군주답게 유리왕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한가위 명절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리왕은 6부를 둘로 나누어 8월 15일 무렵 양편에 속한 여자들로 길쌈 대회를 열었다. 대회가 끝나고 벌어진 파티를 가배(嘉俳)라 했는데, 여기서 가위 즉 한가위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대회가 상당히 치열했던지 진 편의 한 여자가 회소곡(會蘇曲)이라는 슬픈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는 전하지 않지만 그 관습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최대의 명절과 사흘의 공휴일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평화로웠던 유리왕의 시대가 끝나자 왕위를 이은 사람은 미리 예약되어 있던 탈해다. 묘한 것은 이 시기다. 유리왕 때의 신라 사회의 모습이 제법 사실적으로 알려진 것에 어울리지 않게 탈해왕(脫解王, 재위 57~80)의 시대에는 다시금 신화가 탄생한다. 대개의 나라들이 신화라고 하면 건국신화 한 편이나 챙기는 것과는 달리 신라에는 또 다른 건국신화가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신라는 아직 신화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걸까?
하나는 탈해의 탄생에 관한 신화다. 그는 왜국 동북방 1천 리에 있는 나라의 왕궁에서 알로 태어났다. 다시 난생 설화다. 남편이 알을 버리라고 했으나 아내는 알을 궤짝에 넣어 바다로 보낸다. 동해를 건너면서 알은 궤짝 속에서 부화되어 오늘날 경상북도 포항 부근의 해변에서 어느 할머니에 의해 발견될 때는 이미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졸지에 아이 엄마가 된 할머니는 그 아이의 이름을 석탈해(昔脫解)라고 짓는다. 석(昔)이라는 성은 당시 까치 한 마리가 궤짝 주변에 있었다 하여 까치 작[鵲] 자를 간단히 줄인 것이라고 전하는데, 아마도 이두문이었을 테니 발음 관계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혹시 과거에는 昔과 鵲의 발음이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탈해의 성을 굳이 밝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탈해로부터 비롯된 석씨는 이후 박씨와 더불어 신라 왕실의 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 왕실의 성은 박씨, 석씨 외에도 김씨가 있지 않던가? 김씨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대의 성씨가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신라의 건국신화가 셋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과연 곧이어 마지막 신화도 등장한다. 알에서 태어나는 것은 이미 유행에 뒤졌고 이제 첨단의 신화는 탈해처럼 궤짝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탈해가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기원후 65년) 금성 서쪽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곳으로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색의 궤짝이 걸려 있다. 과연 그 안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다. 탈해는 하늘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고 기뻐하며 그 숲을 닭 우는 숲, 즉 계림(鷄林)이라 이름짓고 아이에게는 금궤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금씨, 즉 ‘金’이라는 성과 ‘알지’라는 이름을 내린다. 그래서 가야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삼는 김해 김씨 외에 모든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다【알지는 한자로 閼智라고 표기하는데, 역시 이두문이니까 중요한 건 뜻이 아니다. 그러나 이두를 알지 못했던 김부식(金富軾)은 알지라는 이름이 총명하고 지략이 많은 아이라서 붙인 것으로 엉뚱하게 해석했다. 알지는 그냥 아기라는 뜻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기의 옛말은 아지인데, ‘ㄹ’이 탈락하지 않은 상태이면 알지가 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밖에도 김부식(金富軾)이 이두와 한자를 혼동한 경우는 『삼국사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후 김알지의 후손들은 초기 신라에서 주로 왕실의 외척 세력을 이루다가 3세기에 미추왕을 시작으로 신라의 왕통을 이어가게 된다.
김알지 신화로써 기나긴 신라의 신화시대는 끝난다. 이주민 국가로 출범했던 신라는 그에 어울리게 다양한 왕의 직함과 최소한 세 가지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신화의 시대가 이미 100년 전에 끝난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가 그 시대를 길게 끈 이유는 두 나라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약한 점도 있었겠지만 여러 혈통과 다양한 문명의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탈해의 고향이다.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곳은 일본 동북방 천 리쯤 되는 나라다. 과연 그곳은 어딜까? 우선 당시의 왜국이란 오늘날의 일본 열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일본 전체가 하나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은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대의 일이다). 섬이라는 독특한 조건에 있던 탓으로 일본은 약 1만 년 전부터 조몬 문명이라는 자체적인 신석기 문명을 유지해 오다가, 기원전 3세기 무렵에 한반도로부터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한꺼번에 받았다. 한반도 초기 삼국시대에 한반도인들에게 알려진 일본은 바로 금속기 문명이 전래된 일본, 즉 지리적으로 보면 기타큐슈(北九州, Kita Kyushu)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탈해가 탄생한 나라는 기타큐슈의 동북방 천 리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그럼 그곳은 어디일까?
기타큐슈에 전해진 금속기 문명은 곧바로 동쪽으로 이동해서 혼슈의 서부, 그러니까 오늘날 교토와 오사카 일대로 퍼지게 되며, 이후 일본 역사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탈해가 탄생할 당시 이 지역은 수많은 소국들이 분립하면서 서로 다투는 시대를 맞고 있었다. 반고(班固)가 쓴 『한서』에 나오는 ‘낙랑의 바다 한가운데에 왜인들이 100여 국을 이루고 있다’는 표현은 바로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탈해의 고향은 바로 그 소국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탈해(혹은 그의 아버지)는 궤짝 대신 배를 타고 한반도 남동부로 왔을 것이며, 처음부터 환대를 받았던 것을 보면 일부 따르는 무리도 동반했음직하다.
아닌 게 아니라 탈해는 즉위하자마자 호공(瓠公)을 최고 관직인 대보에 임명하는데, 호공이란 신라의 건국에 기여한 왜인 집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앞에서 본 것처럼 박혁거세 시대에도 신라는 마한에 왜인 출신의 인물을 사신으로 파견할 정도였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탈해가 호공을 더욱 중용한 것은 자신과 동향인이기 때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신라의 초기 지배집단은 대부분이 이주민들이었으므로 탈해가 왕위에까지 오른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다. 다만 다른 세력들과 달리 탈해가 일본 출신이라는 사실은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단서다. 실제로 백제와 비교해볼 때 신라의 외적 조건에서는 일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에서도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아달라왕 시절인 157년 동해 바닷가에 사는 어부 부부인 연오랑과 세오녀는 갑자기 나타난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서 왕이 된다. 그 후 신라에는 해와 달의 빛이 약해지는 괴변이 일어났는데, 일관(日官)은 연오랑 부부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아달라왕이 부부를 귀국시키려하자 연오랑은 명에 따르지 않고 그 대신 비단을 내주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라고 한다. 과연 그대로 하니 해와 달의 빛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는 초기 신라가 일본 내의 몇몇 소국들을 중요한 동맹 세력으로 여겼음을 말해주는 설화다】.
물론 당시 일본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니, 신라에게 도움만 준 것이 아니라 해도 많이 끼쳤다. 백제가 낙랑과 마한, 말갈에 시달린 반면 신라는 건국 초부터 주로 북부의 말갈과 더불어 동해 쪽에서 침략해 오는 왜인(최초의 왜구)들 때문에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 또 하나의 시조 이주민 국가였던 만큼 신라는 건국시조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그림은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묘사한 작품이다. 나뭇가지에 금궤가 걸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17세기 화가인 조속(趙涑)의 작품인데, 하권에서 보겠지만 조선은 고려와 더불어 신라를 계승한 왕조인 데다 17세기라면 이른바 진경산수화가 싹트기 시작할 무렵이므로 이런 그림이 그려졌을 터이다.
미스터리의 세기
탈해왕(脫解王)으로 한 번 삐딱선을 탄 신라의 왕계는 그 다음부터 유리왕의 후손, 즉 박씨 세력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박씨 혈통이 파사-지마-일성-아달라까지 이어지다가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재위 154~184)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는 다시 석씨 집안으로 옮겨간다. 왕의 성씨가 여러 차례 달라지는데도 별다른 마찰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초기 왕계로 미루어보면 기원후 2세기까지도 신라는 건국 당시의 이주민 국가적 성격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건국한 지 무려 200년이 넘어설 무렵에도 왕계가 고정되지 못했다면 사실 국가라고 보기에도 수준 미달이다. 따라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신라의 건국 시기는 김부식(金富軾)의 노력(?) 덕분에 적어도 200년은 길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유일한 공식 문헌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바로 그 무렵, 그러니까 기원후 2세기의 왕계에서 알 수 없는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그것도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의 경우가 모두 그렇다. 왜 하필 건국 초기도 아니고 세 나라가 생겨난 지 100년이 훨씬 지난 2세기에 그런 미스터리가 생겨났을까? 우선 미스터리의 내용을 보자.
먼저 고구려의 경우다. 앞서 보았듯이 고구려의 태조왕(太祖王)은 기원후 53년에 7세의 나이로 즉위해서 146년까지 무려 93년을 재위했으며, 그 후에도 19년을 더 살아 119세로 죽었다. 일단 우리는 그를 한반도 역대 왕조의 왕들 가운데 최장수 챔피언으로 꼽았으나 실은 쉽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물론 당시에 119세까지 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확률상으로 보면 대단히 희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 사실(史實)은 사실(事實)일까?
아닌 게 아니라 상세히 따져보면 고구려의 건국 시기부터 2세기에 이르는 왕계 전체에 믿기 어려운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부터 덧셈 게임을 약간 해보자. 건국 시조인 주몽이 사망한 해(기원전 19년)부터 11대 동천왕(산상왕山上王의 아들)이 즉위한 해(기원후 227년)까지는 246년의 기간이다. 여기까지야 별로 이상할 게 없지만 문제는 세대수로 셈하면 그 기간 동안 고구려 왕실은 불과 여섯 세대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세대당 평균 재위 기간은 무려 50년에 가깝다. 왕들의 수명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왕으로 있는 기간, 즉 재위 기간이 연속적으로 그랬다면 왕들 모두가 일흔 살을 넘겨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여기에는 의심해볼 여지가 충분하다.
사실 주몽에서부터 6대 태조왕(太祖王)까지는 네 세대인데 그 중 4대 민중왕과 5대 모본왕의 치세가 짧았으므로 이 과정에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2세기의 왕들이다. 태조왕과 7대 차대왕(재위 146~165), 8대 신대왕(재위 165~179)은 모두 형제로, 유리왕의 아들이자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동생인 재사(再思)의 아들들이라고 되어 있다. 즉 모두 유리왕의 손자라는 이야기다. 유리왕은 기원전 40년 무렵에 태어나서 기원후 18년에 죽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 재사는 최소한 기원후 18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길래, 또 얼마나 오래 젊음을 유지했길래 기원후 179년까지 산 아들(신대왕)을 둘 수 있단 말일까?
이렇게 보면 태조왕(太祖王)의 비정상적인 재위 기간에는 모종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아마도 거기에는 몇 명의 왕이 누락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일흔다섯 살에 즉위해서 아흔넷에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당한 그의 동생 수성(차대왕)의 비정상적인 나이 추산에도 모종의 흑막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원후 53년에서 179년까지 120여년 동안 고령의 형제들 간에 왕위를 계승한 태조왕-차대왕-신대왕의 재위 기간에는 아마도 밝혀지지 않은 간단치 않은 사실이 숨어 있을 것이다(게다가 명림답부마저 100세를 넘겨 살았다는 것도 이 시기 역사에 관한 의혹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러나 고구려의 그 이례적인 장수만세만 해도 백제의 경우와 비교하면 오히려 정상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백제 초기 왕계에서는 고구려의 경우보다 더욱 명백한 누락이 보이기 때문이다. 골치 아프겠지만 다시 한번 숫자 놀음을 해보자.
온조(溫祚)의 아들인 백제의 2대 다루왕(多婁王, 재위 28~77)은 온조왕 28년(기원후 10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8년 뒤에 즉위하여 50년간 재위했다. 그렇다면 갓난아기 때 책봉을 받았다 해도 ‘18 + 50 = 68’, 즉 최소한 68세 이상 수를 누린 셈이다. 여기까진 좋다. 그런데 그 아들인 3대 기루왕(已婁王, 재위 77~128)은 다루왕 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재위 52년이니 그의 수명은 ‘44(다루왕의 나머지 재위 기간) + 52’, 최소한 96세 이상을 장수한 셈이 된다. 약간 고개가 갸우뚱거려지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다.
4대 개루왕(蓋婁王, 재위 128~165)은 언제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거의 100세 노인인 기루왕의 아들이었고 39년을 재위했다고 되어 있으니까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그도 역시 최소한 70세 이상은 살았다고 봐야 한다(그것도 기루왕이 60세가 넘어서 개루왕을 낳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어서 5대 초고왕(재위 49년), 6대 구수왕(재위 21년), 7대 사반왕(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즉시 폐위되었다)을 거쳐 8대 고이왕(古爾王)이 즉위하는데, 그는 놀랍게도 4대 개루왕의 둘째 아들(초고왕의 동생)이다. 그렇다면 그는 개루왕의 재위 기간(그의 아버지가 50세에 고이왕을 낳았다 하더라도 20년), 초고왕 시절(49년), 구수왕 시절(21년)을 합쳐 90세가 넘은 노인의 몸으로 즉위한 것이 된다. 그런데도 그는 무려 이후 53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경우도 그와 비슷하다. 신라 미스터리의 주인공도 역시 2세기 왕인 7대 일성왕(逸聖王, 재위 134~54)이다. 그에게 이르기까지의 신라 왕계를 보자. 5대 파사왕(婆娑王, 재위 80~112)은 3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며, 재위 기간 32년이다. 유리와 파사 사이에는 석씨인 4대 탈해왕(脫解王)이 24년간 재위했다. 또 6대 지마왕(祇摩王, 재위 112~134)은 파사왕의 아들이며, 재위 기간 22년이다. 그런데 다음 일성왕은 3대 유리의 맏아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기원후 57년에 죽었는데, 맏아들은 기원후 134년에 즉위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더구나 동생인 파사와 조카인 지마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까? 만약 그렇다면 일성왕은 최소한 77세에 즉위한 게 되는데, 이후에도 그는 20년을 재위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탈해왕이 62세의 노인으로 즉위한 사실을 특기하고 있으면서도 일성왕이 더욱 고령으로 조카 지마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사실에 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전혀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모두 2세기에서 왕계가 삐끗거린 이유는 뭘까? 물론 왕계가 역사의 전부는 아니며, 왕들의 계보가 틀렸다고 해서 그 시대의 역사를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대에 왕계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문제다. 왕들은 각 시대의 중요한 정책 결정자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들이 고대의 달력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따라서 왕들의 계보가 틀렸다면 그에 따라 서술된 다른 기록들도 모두 연대가 틀려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본받아 기전체(紀傳體)의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기전체는 왕의 재위 연도를 기준으로 국가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방식이므로 왕계가 틀리면 모든 게 틀려진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국 왕들의 계보는 기원 후 2세기 무렵에서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적어도 2세기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든 왕들이 특별히 장수하는 세기였을 리는 없을 테니 여기에는 뭔가 역사상 누락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혹시 그것은 삼국이 함께 연동되어 있는 미스터리는 아닐까?
▲ 『삼국사기』의 참고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는 내용과 체제에서 중국 역사서에 크게 의존했다. 위쪽 그림은 김부식의 영정이고, 아래쪽 그림은 『삼국사기』만이 아니라 역대 중국과 한반도 왕조들의 표준적인 역사 서술 방식을 제시한 사마천의 『사기(史記)』다. 아쉽게도 김부식은 형식만 모방하는 데 그치고 사기의 엄정성까지는 모방하지 못했는데, 2세기 왕계가 엉터리인 게 그 증거다.
마지막 건국신화
2세기 왕계에 관한 미스터리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만 그것은 삼국의 왕계가 아니므로 여기서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겠다. 그 미스터리는 한반도 왕조의 마지막 건국신화와 관련된다. 주인공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金首露王, 재위 42~99)이다. 김수로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의 파사왕과 연루되면서부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의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나서 기쁜 나머지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석씨로서는 최초의 왕이자 일본 출신이었으니 탈해가 굳이 박씨를 다시 후계로 삼지 않으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김알지는 유리왕의 아들인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했고, 그 덕분에 신라는 다시 박씨 왕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새로운 성씨로서 왕위를 잇기에는 아직 자신의 힘이 부치다고 여긴 걸까? 아니면 신라의 왕위가 그만큼 보잘 것없었다는 뜻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거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사건’이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김알지의 양보는 초기 신라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약이 되었다. 파사왕은 신라 최초의 정복군주였기 때문이다. 전대의 왕들이 주로 신생국의 생존과 방어에만 부심한 데 비해 그는 즉위 초부터 군신들에게 병장기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라고 명하면서 ‘공격적인 방어’에 나섰으며, 경주 지역을 벗어난 곳에 처음으로 성을 쌓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대에는 전통적인 외적들인 말갈(북), 백제(서), 왜구(동) 이외에도 남쪽의 가야라는 새로운 적수가 출현했다. 96년 대규모로 신라를 침공해 온 가야군을 맞아 파사왕은 직접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했는데, 이는 최초로 신라의 왕이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다.
파사와 김수로가 한 가지 외교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다. 102년 신라 인근에 있던 음즙벌과 실직곡이라는 두 나라가 서로 영토 다툼을 벌이다가 신라의 파사왕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선뜻 어느 편을 들어주기가 곤란하다고 여긴 파사는 나이도 많고 지혜도 풍부한 가야의 수로왕에게 자문을 구해 사태를 해결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파사왕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6부에게 수로왕을 접대하라고 명하자 다른 부들은 고위급 인사를 보냈는데 한지부라는 곳에서만 직급이 낮은 자를 보낸다. 분노한 수로왕은 그만 한지부의 수장을 잡아죽인다.
놀라운 일이다. 6부라면 초기 신라의 내각이나 다름없는 핵심 기관인데, 어떻게 가야의 왕이 그 책임자를 함부로 죽일 수 있었을까? 또 파사왕이 그 ‘주권 침탈 만행’에 대해 변변한 항변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면 수로왕의 권위는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신라의 남쪽이라면 오늘날 경상남도, 당시 이 지역의 패자로 떠오른 가야는 한반도 초기 왕조사를 ‘삼국시대’에 머물지 않게 한다【사실 삼국시대라는 용어는 삼국 초기와는 무관하고 6세기 이후 삼국이 쟁패하는 시대를 가리킨다. 다만 그 삼국의 뿌리가 기원 전후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될 뿐이다. 굳이 나라의 수로써 시대의 이름을 붙이자면 5세기까지는 ‘이국시대’ 또는 ‘사국시대’라는 이름이 어울릴 듯싶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뒤졌으므로 신라를 배제한다면 이국시대가 된다. 반면 신라를 끼워넣는다면 그와 엇비슷한 국력을 유지하면서 6세기 초반까지 존속했던 가야를 배제할 이유가 없으므로 사국시대가 된다】.
또 하나의 나라가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으니 또 하나의 건국신화가 필요할 것이다. 과연 가야라는 나라도 역시 출발점은 신화다. 『삼국사기』에는 가야의 건국자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를 이름밖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그의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김수로의 신화는 건국신화의 기본 코스를 충실히 따르는데, 박혁거세와 김알지(金閼智)의 신화를 섞어놓은 것과 비슷하다. 기원후 42년 가야 땅에 사는 아홉 부족의 족장들이 하늘의 명을 받고 산에 올라가 왕을 내려달라고 빌었다. 거북에게 왕을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는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으니 기도 방법치고는 좀 괴상한 것이었지만 과연 효험은 있었다. 하늘에서 금빛 알이 여섯 개 내려왔는데, 거기서 나온 여섯 명이 각기 가야 6국의 왕이 되었다. 김수로는 그 중 맏형으로 금관가야의 건국자다.
김수로 신화의 특이한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왕위에 올라 기원후 199년까지 무려 157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점이다. 아무리 2세기가 미스터리의 세기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신화라 하겠다. 앞서 단군신화의 경우에서처럼 김수로의 오랜 재위 기간은 아마도 후계자들이 건국자의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이 신화적으로 기록된 결과일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그의 아내다. 김수로는 멀리 서역의 아유타라는 나라에서 온 허황옥(許黃玉, ?~188)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아유타는 놀랍게도 인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녀 역시 남편처럼 오래 살아 기원후 189년까지 금관가야의 왕비를 지내다가 157세로 죽었다고 한다.
아유타가 실제로 인도에 있는 나라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허황옥이 서쪽에서 배를 타고 온 것만은 분명하다【아유타에 관해서는 다른 추측도 가능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지은이인 일연(一然, 1206~89)은 김수로 신화를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책에서 읽었다는데, 이 책은 11세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승려가 쓴 것이라고 한다(물론 지금은 전하지 않는 책이다). 그 승려가 말한 아유타는 혹시 오늘날 타이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승려였던 만큼 그는 아마 허황옥이 불교의 나라에서 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생겨났지만 오히려 인도에서는 얼마 퍼지지 못하고 동쪽으로 가서 동남아시아와 극동으로 전래되었다. 타이는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불교 국가다. 게다가 타이에는 아유타야라는 나라가 있었다. 비록 14세기에 세워진 나라이지만 그 이름의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을까? 또 중국 역사서에는 아유타야가 섬라(暹羅)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어 발음은 신라(新羅)와 거의 같다. 신라를 나라 이름이 아니라 지역명으로 보면 가야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까마득한 옛날에도 섬라와 신라는 어느 정도의 관계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것은 신라의 다문화적 성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또한 김수로가 알에서 나왔다는 것은 가야의 외부에서 온 지도자라는 뜻일 터이다. 따라서 김수로는 박혁거세의 경우처럼 부부가 모두 외지인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만 김수로의 출신지는 분명하지 않고 허황옥의 고향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그들은 동향인이 아니었을 것이다(반면 박혁거세의 경우는 부부가 동향 출신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럼 김수로는 어디서 온 인물일까? 물론 추측밖에 가능하지 않지만, 적어도 알에서 부화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믿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짚어볼 만한 요소는 있다. 김수로가 새 나라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고 새로 궁궐을 지어 이사할 즈음 한 인물이 그에게 도전을 해온다. 그는 바로 나중에 신라의 4대 왕이 되는 탈해였다. 김수로도 석탈해도 둘 다 젊은 시절이었으니 혈기가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탈해는 감히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며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두 사람은 곧 싸움에 들어갔는데, 후대의 손오공이 보았다면 서러워할 만한 탁월한 술법으로 치열하게 싸운다. 탈해가 참새로 변하면 수로는 매로 변하고, 탈해가 매로 변하면 수로는 독수리가 되는 식이다. 결국 탈해는 수로에게 한수 뒤진다는 것을 자인하고 가야를 떠나 신라로 간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탈해는 다파나라는 나라 출신이고 『가락국기』의 탈해는 완하라는 나라 출신이다. 그런 탓에 일연은 두 탈해가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어떨까? 두 탈해는 모두 알에서 나왔고 연대도 같으며, 김수로와 일전을 벌인 탈해도 신라로 갔다. 따라서 그들은 동일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 탈해는 일본 출신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그렇다면 혹시 김수로 역시 일본 출신이 아닐까? 비록 고향은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함께 바다를 건너 서쪽의 한반도 남단에 자리잡은 처지였기에 권력 다툼을 벌인 것은 아니었을까? 신라의 경우처럼 가야도 초기에는 일본 세력이 상당히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추측에 불과하지만 가야가 이후 일본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고대 한반도와 일본 관계사의 일단을 밝히는 추측일 수도 있다. 적어도 한반도 남동부와 일본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밀접한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당시의 관계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때 일본 사학자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이나, 일부 국내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왕계의 일본 경영설은 내용으로 보면 정반대지만 그릇된 극우적 역사관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전혀 다를 바 없다. 고대에는 한반도도 일본도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의 관계는 어느 한 편으로 흐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 관계의 이름부터 고쳐야겠다. ‘고대 한일관계’라는 표현은 한국도 일본도 없었을 때와는 무관한 말일 테니까.
▲ 외국인 부부? 신라만이 아니라 가야도 이주민 국가로 볼 수 있다. 아마 이주민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존재로 이미 문명의 빛이 밝았던 한반도 서부를 우회해서 남동부로 찾아들었으리라. 왼쪽은 가야의 건국자인 김수로이고 오른쪽은 그의 아내인 허황옥이다. 김수로는 일본 출신일 가능성이 있고 허황옥은 인도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니, 잘 어울리는 외국인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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