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건국신화
외래인 집단이 많았으니 신라의 초기 왕계가 일정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왕이라는 직함의 명칭부터 혼란스럽다. 건국자인 박혁거세는 거서간(居西干)을 칭호로 썼다. 그러나 그의 아들 남해왕(南解王, 재위 기원후 4~24)은 차차웅(次次雄)이라는 다른 호칭으로 불린다. 이렇게 거서간과 차차웅을 한 명씩 배출한 뒤 그 다음 신라 왕들은 이사금(尼師今)이라는 직함을 가진다. 이사금이 4세기의 16대 흘해왕까지 약 300년간 사용되면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다음의 내물왕(奈勿王)부터 22대 지증왕까지는 또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을 쓴다. ‘왕’이라는 중국식 명칭을 쓰는 것은 6세기 초반의 지증왕 때부터다(여기서는 그 이전의 시기라 하더라도 간편하게 그냥 왕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왕을 뜻하는 이 여러 명칭들이 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각각의 뜻과 유래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아직 논란만 분분할 뿐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추측건대 이사금이란 잇금, 즉 이의 숫자가 많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임금의 옛말을 뜻하며, 마립간은 원래 머리라는 뜻으로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알려졌으나, 뜻은 그렇다 해도 왜 하필 그 시기에 이사금이나 마립간을 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앞서 말한 것처럼 신라 초기에는 외래 이주민들이 상당히 많았던 만큼 왕통도 어지러웠을 테고, 그 여러 직함은 그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터이다.
신라 초기의 왕위계승을 보면 그런 사정을 더욱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부자 또는 적어도 형제간에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던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와는 달리 신라의 왕위계승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일단 초반에는 그런 대로 ‘건국 이념’에 힘입어 부자 세습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유리왕(儒理王, 재위 24~57)이 즉위할 무렵에는 한 차례 혼란이 예고된다. 남해왕의 아들 유리가 당시 높은 덕망으로 유명한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탈해도 한사코 거절한다. 유리는 아버지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왕위가 이어져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으나, 탈해는 그렇다면 나이를 조사해보자고 제안한다. 물론 달력이 없으니 나이도 알 길이 없다. 결국 두 사람은 떡을 깨물어 잇금의 수를 따지기에 이른다. 잇금이 많으면 나이가 많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당시의 기준에 따른 것이었으니, 무차별적인 득표수로 결정하는 오늘날보다 더 폼나는 선거제도였다 할까? 불행히도(?) 유리는 잇금이 더 많았던 탓에 신라의 3대 왕이 된다.
유리왕 대에 이르러 신라 사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므로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자. 옛날에 유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문학과 관련이 깊었거나 음악적 감성이 풍부했던 모양이다. 황조가(黃鳥歌)라는 청승맞은 연가를 지어 한반도 최초의 서정시인이 된 사람이 고구려의 유리왕이라면, 신라의 유리왕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그에 못지않은 솜씨를 발휘한다(한자로는 고구려의 유리가 琉璃, 신라의 유리가 儒理로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이두문일 테니 사실 같은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연대도 엇비슷해서 두 사람 다 1세기 초반의 왕이다). 또한 신라의 유리왕은 행정에도 남다른 감각을 선보인다. 일찍이 건국의 토대가 된 여섯 마을을 6부로 만들어 각각 새로운 성씨를 부여하고(성씨가 귀족들에게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삼국시대 중반부터이므로 이 사실은 믿기 어렵다), 그 전까지 고구려에서 본뜬 대보 정도의 초보적 직책밖에는 없던 관직을 새로 창설해서 6부의 원로들을 정식 관리로 기용한다.
문화를 사랑한 군주답게 유리왕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한가위 명절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리왕은 6부를 둘로 나누어 8월 15일 무렵 양편에 속한 여자들로 길쌈 대회를 열었다. 대회가 끝나고 벌어진 파티를 가배(嘉俳)라 했는데, 여기서 가위 즉 한가위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대회가 상당히 치열했던지 진 편의 한 여자가 회소곡(會蘇曲)이라는 슬픈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는 전하지 않지만 그 관습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최대의 명절과 사흘의 공휴일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평화로웠던 유리왕의 시대가 끝나자 왕위를 이은 사람은 미리 예약되어 있던 탈해다. 묘한 것은 이 시기다. 유리왕 때의 신라 사회의 모습이 제법 사실적으로 알려진 것에 어울리지 않게 탈해왕(脫解王, 재위 57~80)의 시대에는 다시금 신화가 탄생한다. 대개의 나라들이 신화라고 하면 건국신화 한 편이나 챙기는 것과는 달리 신라에는 또 다른 건국신화가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신라는 아직 신화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걸까?
하나는 탈해의 탄생에 관한 신화다. 그는 왜국 동북방 1천 리에 있는 나라의 왕궁에서 알로 태어났다. 다시 난생 설화다. 남편이 알을 버리라고 했으나 아내는 알을 궤짝에 넣어 바다로 보낸다. 동해를 건너면서 알은 궤짝 속에서 부화되어 오늘날 경상북도 포항 부근의 해변에서 어느 할머니에 의해 발견될 때는 이미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졸지에 아이 엄마가 된 할머니는 그 아이의 이름을 석탈해(昔脫解)라고 짓는다. 석(昔)이라는 성은 당시 까치 한 마리가 궤짝 주변에 있었다 하여 까치 작[鵲] 자를 간단히 줄인 것이라고 전하는데, 아마도 이두문이었을 테니 발음 관계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혹시 과거에는 昔과 鵲의 발음이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탈해의 성을 굳이 밝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탈해로부터 비롯된 석씨는 이후 박씨와 더불어 신라 왕실의 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 왕실의 성은 박씨, 석씨 외에도 김씨가 있지 않던가? 김씨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대의 성씨가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신라의 건국신화가 셋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과연 곧이어 마지막 신화도 등장한다. 알에서 태어나는 것은 이미 유행에 뒤졌고 이제 첨단의 신화는 탈해처럼 궤짝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탈해가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기원후 65년) 금성 서쪽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곳으로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색의 궤짝이 걸려 있다. 과연 그 안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다. 탈해는 하늘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고 기뻐하며 그 숲을 닭 우는 숲, 즉 계림(鷄林)이라 이름짓고 아이에게는 금궤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금씨, 즉 ‘金’이라는 성과 ‘알지’라는 이름을 내린다. 그래서 가야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삼는 김해 김씨 외에 모든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다【알지는 한자로 閼智라고 표기하는데, 역시 이두문이니까 중요한 건 뜻이 아니다. 그러나 이두를 알지 못했던 김부식(金富軾)은 알지라는 이름이 총명하고 지략이 많은 아이라서 붙인 것으로 엉뚱하게 해석했다. 알지는 그냥 아기라는 뜻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기의 옛말은 아지인데, ‘ㄹ’이 탈락하지 않은 상태이면 알지가 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밖에도 김부식(金富軾)이 이두와 한자를 혼동한 경우는 『삼국사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후 김알지의 후손들은 초기 신라에서 주로 왕실의 외척 세력을 이루다가 3세기에 미추왕을 시작으로 신라의 왕통을 이어가게 된다.
김알지 신화로써 기나긴 신라의 신화시대는 끝난다. 이주민 국가로 출범했던 신라는 그에 어울리게 다양한 왕의 직함과 최소한 세 가지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신화의 시대가 이미 100년 전에 끝난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가 그 시대를 길게 끈 이유는 두 나라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약한 점도 있었겠지만 여러 혈통과 다양한 문명의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탈해의 고향이다.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곳은 일본 동북방 천 리쯤 되는 나라다. 과연 그곳은 어딜까? 우선 당시의 왜국이란 오늘날의 일본 열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일본 전체가 하나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은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대의 일이다). 섬이라는 독특한 조건에 있던 탓으로 일본은 약 1만 년 전부터 조몬 문명이라는 자체적인 신석기 문명을 유지해 오다가, 기원전 3세기 무렵에 한반도로부터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한꺼번에 받았다. 한반도 초기 삼국시대에 한반도인들에게 알려진 일본은 바로 금속기 문명이 전래된 일본, 즉 지리적으로 보면 기타큐슈(北九州, Kita Kyushu)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탈해가 탄생한 나라는 기타큐슈의 동북방 천 리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그럼 그곳은 어디일까?
기타큐슈에 전해진 금속기 문명은 곧바로 동쪽으로 이동해서 혼슈의 서부, 그러니까 오늘날 교토와 오사카 일대로 퍼지게 되며, 이후 일본 역사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탈해가 탄생할 당시 이 지역은 수많은 소국들이 분립하면서 서로 다투는 시대를 맞고 있었다. 반고(班固)가 쓴 『한서』에 나오는 ‘낙랑의 바다 한가운데에 왜인들이 100여 국을 이루고 있다’는 표현은 바로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탈해의 고향은 바로 그 소국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탈해(혹은 그의 아버지)는 궤짝 대신 배를 타고 한반도 남동부로 왔을 것이며, 처음부터 환대를 받았던 것을 보면 일부 따르는 무리도 동반했음직하다.
아닌 게 아니라 탈해는 즉위하자마자 호공(瓠公)을 최고 관직인 대보에 임명하는데, 호공이란 신라의 건국에 기여한 왜인 집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앞에서 본 것처럼 박혁거세 시대에도 신라는 마한에 왜인 출신의 인물을 사신으로 파견할 정도였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탈해가 호공을 더욱 중용한 것은 자신과 동향인이기 때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신라의 초기 지배집단은 대부분이 이주민들이었으므로 탈해가 왕위에까지 오른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다. 다만 다른 세력들과 달리 탈해가 일본 출신이라는 사실은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단서다. 실제로 백제와 비교해볼 때 신라의 외적 조건에서는 일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에서도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아달라왕 시절인 157년 동해 바닷가에 사는 어부 부부인 연오랑과 세오녀는 갑자기 나타난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서 왕이 된다. 그 후 신라에는 해와 달의 빛이 약해지는 괴변이 일어났는데, 일관(日官)은 연오랑 부부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아달라왕이 부부를 귀국시키려하자 연오랑은 명에 따르지 않고 그 대신 비단을 내주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라고 한다. 과연 그대로 하니 해와 달의 빛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이는 초기 신라가 일본 내의 몇몇 소국들을 중요한 동맹 세력으로 여겼음을 말해주는 설화다】.
물론 당시 일본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니, 신라에게 도움만 준 것이 아니라 해도 많이 끼쳤다. 백제가 낙랑과 마한, 말갈에 시달린 반면 신라는 건국 초부터 주로 북부의 말갈과 더불어 동해 쪽에서 침략해 오는 왜인(최초의 왜구)들 때문에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 또 하나의 시조 이주민 국가였던 만큼 신라는 건국시조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그림은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묘사한 작품이다. 나뭇가지에 금궤가 걸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17세기 화가인 조속(趙涑)의 작품인데, 하권에서 보겠지만 조선은 고려와 더불어 신라를 계승한 왕조인 데다 17세기라면 이른바 진경산수화가 싹트기 시작할 무렵이므로 이런 그림이 그려졌을 터이다.
인용
'역사&절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마지막 건국신화(김수로) (0) | 2021.06.12 |
---|---|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미스터리의 세기 (0) | 2021.06.12 |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이주민 국가(신라의 이민사) (0) | 2021.06.12 |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포위 속의 생존(위례) (0) | 2021.06.12 |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물보다 흐린 피(고국천왕, 을파소, 산상왕, 동천왕) (0) | 2021.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