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멸망?③
이것으로 장수왕(長壽王)은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원한을 완전히 풀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으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역관계가 완전히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두 나라의 건국 이후 500년간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건국 이후 두 나라는 400년 가까이 지나도록 낙랑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탓에 직접 조우할 기회가 없었다. 완충지가 사라지자 두 나라는 곧바로 접경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 결과는 교류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서전(緖戰)은 예상과 달리 백제의 완승,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고구려가 대중국 관계에 주력하느라 남부 전선에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근초고왕은 그점을 알았기에 승리한 뒤에도 고구려의 침략을 걱정했던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분열 상태였지만 강남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던 화북에서 북위가 패자로 발돋움하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기 시작한다. 북위는 고구려에게 랴오둥의 소유를 인정해주었고 그 대가로 고구려는 북위의 서열을 인정해주었다(그런 관계였으니 개로왕이 북위에 접근하려 한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남진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장수왕(長壽王)은 건국 이후 최대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것이지만, 백제는 반대로 건국 이후 최대의 수난을 당했다. 다행히도 개로왕은 도성의 몰락을 눈앞에 두고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아들 문주에게 어서 도망쳐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는데, 그런 기지를 발휘하지 못했더라면 백제는 아마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졌을 것이다. 문주는 신라에서 1만의 병력을 빌려 황급히 돌아왔으나 이미 아버지는 죽고 성은 무너진 상태였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고구려군이 물러갔다는 것인데, 아마 장수왕은 도성을 유린한 것으로 백제가 완전히 멸망했다고 본 듯하다【오늘날 영토국가의 개념으로 보면 장수왕(長壽王)의 철군은 이해할 수 없는 게 된다. 그는 왜 백제의 뿌리마저 잘라 버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는 모두 완전한 영토국가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 ‘국경선’이라는 분명한 울타리를 두른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백제의 도성이 산 속에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모두 ‘선’ 개념이 아니라 성곽을 중심으로 하는 ‘점’ 개념의 국가다. 그러므로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라는 ‘점’을 제거한 것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믿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볼 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아마 그는 이후의 백제를 잔존 세력이 세운 ‘지방정권’에 불과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선’ 개념의 국가가 아니었기에 변방에 지방정권이 성립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비록 고구려군이 철수했다 해도 죽은 아버지의 왕위만 이었을 뿐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은 원래의 도성을 회복할 자신이 없었다.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일 처지도 아니려니와 여기서 얼쩡거리다간 언제 다시 장수왕의 철퇴를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남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멀리 내려가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에 해당하는 웅진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을 원래의 백제와 구분하여 웅진백제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래 백제가 멸망했다고 본다면 그런 구분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왕계의 보존을 고려한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도 싶다. 어쨌거나 그건 뭐든지 구분하기를 즐기는 학자들의 몫이니까 여기서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일설에 따르면 그 무렵 백제 지배층의 일부가 대규모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야마토 정권의 성립에 기여했으며, 따라서 일본 천황의 혈통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도 하는데,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감안하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국가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시대에 굳이 두 나라 왕조의 혈통을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비극적인 천도 아신왕(阿莘王)을 살려준 광개토왕(廣開土王)과 개로왕(蓋鹵王)을 죽인 장수왕, 그것은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잔인했기 때문은 아니다. 신라를 거느리고 있던 광개토왕은 백제의 항복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고 판단했기에 여유가 있었고, 장수왕은 나제동맹이라는 강력한 수비망을 의식해서 독하게 나간 것뿐이다. 어쨌거나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文周王)은 500년 도읍지를 버리고 사진에서 보는 웅진성으로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지금 이름은 공주의 공산성인데, 돌로 된 성벽은 조선시대에 개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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