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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1장 역전되는 역사, 고구려의 육탄 방어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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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1장 역전되는 역사, 고구려의 육탄 방어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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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육탄 방어

 

 

수 문제는 영양왕의 일탈(?)을 용서했으나 그의 아들로 수나라 2대 황제가 된 양제(煬帝, 재위 604~618)의 생각은 달랐다아버지와 형을 살해할 만큼 잔혹한 인물이긴 해도 양제는 통일제국의 황제답게 스케일이 큰 군주였다. 특히 대외적 안정에만 힘쓴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제국을 제국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래서 벌인 게 대운하 건설이다. 이것은 정치적 중심인 화북의 황허와 경제적 중심인 강남의 양쯔강을 남북으로 잇는 엄청난 규모의 운하인데, 당대의 백성들은 그 대역사 때문에 죽어나야 했고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수 양제는 큰 욕을 얻어 먹어야 했지만 이 운하는 오늘날까지도 잘 사용되고 있으니 지금의 중국인들은 오히려 양제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이집트를 관광대국으로 만든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진 시황제가 남긴 방대한 시황릉,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벌어지던 로마의 콜로세움 등은 모두 당대에는 적지 않은 비난을 받은 건설 사업이지만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지금 인류의 문화유산은 보잘 것 없었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역사적 평가란 없는 걸까?. 먼저 아버지가 시작한 정복사업을 이어받아 북쪽의 돌궐과 서쪽의 토욕혼(Tuyuhun, 吐谷渾)을 물리친 다음 그는 고구려를 2차 작전 대상으로 선포한다(앞서 한 무제에게 쫓겨난 흉노의 경우처럼 돌궐도 둘로 나뉘어 동돌궐은 고구려 북변을 침략했고 서돌궐은 멀리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의 민족이동 도미노를 낳게 된다. 607년 고구려 사신이 있는 자리에서 양제는 고구려 왕이 직접 황궁으로 와서 예를 올리지 않으면 장차 응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물론 제 발로 적지에 들어가 죽을 왕은 없으니 그건 명백한 선전포고다.

 

그로부터 4년 뒤인 611년 드디어 수 양제는 일정을 확정하고 제국 전체의 군대를 베이징 북쪽의 탁현(涿縣)으로 소집했다. 그가 발표한 출사의 변은 상당히 장황한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고구려는 오랑캐 나라다.

둘째, 오랑캐임에도 중국에 제대로 조공하지 않는다.

셋째, 조공하기는커녕 중국의 달력과 연호도 사용하지 않는다.

넷째, 백제와 신라가 중국에 조공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다섯째, 고구려 백성들은 지배자들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주목할 것은 셋째다. 고구려는 장수왕(長壽王) 때부터 북위에 조공하며 상국의 예우로 대해주었다. 그러나 양제의 말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중국을 섬기면서도 중국의 연호를 쓰지는 않았다. 고대국가에서 연호란 독립국의 상징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북위에 사대하되 속국화되지는 않았고, 북위 역시 고구려의 상국이라고 자처하는 정도에서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분열기에는 이렇게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가능해도 통일기에는 그럴 수 없다.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면 필연적으로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하리라는 점은 이것으로도 증명된다.

 

이듬해인 612년 정월에 출발한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군은 우선 규모에서부터 엄청났다. 전투 병력만 1133800명에 보급 병력이 그 두 배였으니 아마 크세르크세스 시대(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군 이래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가 아닐까 싶다(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당시 페르시아 다국적군은 5283220명이라고 하는데,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좌우간 어지간히 많았던 모양이다). 매일 한 부대씩 출발시켰는데 다 보내는 데만도 40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수 양제로서는 총력을 기울일 만도 한 것이, 그에게 고구려는 마지막 정복 대상이었다. 즉위하고 얼마 뒤에 북방의 돌궐과 서역의 토욕혼을 정복했으니 이제 유일한 적은 동북방의 고구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세를 몰아 고구려마저 제거하고 아직도 불안정한 신생 통일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게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는 토욕혼이나 돌궐과 다른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유목 민족이었으므로 적을 당해낼 수 없을 경우에는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나면 그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늘 서쪽이 열려 있었으므로 언제든 비단길을 따라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달아날 수 있었고, 실제로 수나라에 밀려나게 되자 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농경 민족의 피를 가지고 있었으니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이 심한 데다 달아나고자 해도 달아날 데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가 있을 뿐 아니라 설사 그곳으로 도망쳐봤자 곧 바다로 둘러싸인 막다른 골목만 나올 뿐이다. 따라서 어차피 고구려는 백만이 아니라 천만의 병력이 쳐들어온다 해도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또 한 가지, 고구려는 돌궐이나 토욕혼과 달리 일정한 강역과 성곽을 지닌 국가였다(이것 역시 농경문명의 붙박이 성격 때문이다). 중국처럼 국경 주변에 장성을 두르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요처마다 산성을 쌓아 방어했으므로 수비 병력에 비해 훨씬 많은 공격 병력을 상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공격하는 수나라 군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구려의 성들을 모두 깨뜨려야만 앞으로 진군할 수 있었다(당시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은 대중국 수비를 위해 남북으로 포진해 있었는데, 오늘날 만주의 하얼빈 창춘 - 쓰핑 푸순 선양 안산 다롄의 직선으로 이어지는 도시들은 그 성곽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결국 이 점이 전면전으로는 최초로 맞붙은 중국 고구려 대전의 승부를 갈랐다.

 

 

 

빛과 그늘 100만이 넘었다는 수나라의 병력은 사실로 믿기 어렵다. 그러나 부풀리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습관일지도 모르지만 중국이 이긴 전쟁도 아닌데 과장할까 싶기도 하다. 살수대첩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을지문덕은 사진에서처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으로뿐 아니라 을지로라는 서울 중심가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러나 또 다른 일등공신인 건무는 잊힌 채 그늘 속의 영웅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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