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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외교로 넘긴 위기(서희)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외교로 넘긴 위기(서희)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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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로 넘긴 위기

 

 

성종이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고 뿌듯해 하던 그 해에 압록강 부근의 여진족은 머잖아 요나라 황제 성종이 침공해 오리라는 불길한 소식을 고려 측에 전한다(고려의 왕은 成宗이고 요의 황제는 聖宗이지만 공교롭게도 한글 발음으로는 같다). 당시 여진은 랴오둥의 요나라와 대동강 이남의 고려 사이에 해당하는 중립지대에서 살고 있었으나 아직 부족 통일을 이루어 국가 체제를 형성할 만한 단계는 아니었다(이렇듯 랴오둥은커녕 옛 고구려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압록강 주변 지역조차 관장하지 못했으니, 영토적으로 봐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말이 중립이지 실상 여진은 이 지역을 제패하려는 거란에게서 시달림을 받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고려에 친화적이었다. 고려에 거란의 준동을 경고해준 것은 그런 심정의 발로였다.

 

과연 그들의 경고대로 해를 넘기지 않고 993년 말에 요나라의 성종은 소손녕(蕭遜寧)을 사령관으로 삼아 무려 80만의 대군으로 느닷없이 고려의 북변을 침공하게 했다. 일단 앉아서 당할 수는 없으므로 고려의 성종은 서둘러 군대를 북쪽으로 파견하지만, 가뜩이나 국력이 안정되지 못한 데다가 개국 초부터 무관을 차별대우해왔던 고려의 군사력이 거란군을 당해낼 수는 없다. 더구나 그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 것은 도대체 왜 그들이 침공해 왔는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몇 차례 패전을 거듭한 뒤 성종은 거란 측에 사신을 보내 의도를 타진하는데, 소손녕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할 뿐이다.

 

사실 그들이 침략해 온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우선 추리를 위한 단서들을 모아보자. 요나라의 궁극적 목표는 중국 대륙이지 고려가 아니다. 더구나 불과 몇 년 전에 요나라는 연운 16를 수복하려는 송나라와 싸운 바 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고려를 침략하면서 항복만을 요구한다. 이 고리들을 꿰어 맞추면 하나의 사슬밖에 나오지 않는다. 즉 요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후방의 정지작업을 도모한 것이다. 대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뒤를 든든히 다지는 건 상식이니까.

 

그러나 다급해진 고려 조정의 눈에는 이런 상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릇된 정세분석에서는 그릇된 대책밖에 나올 게 없다. 소손녕의 태도를 나름대로 분석한 고려 조정은 엉뚱하게도 요나라에 대동강 이북의 땅을 내주자는 결론에 도달한다(소손녕은 땅을 요구한 게 아니었을뿐 아니라 대동강 이북은 원래 고려의 영토도 아니었으니 터무니없는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이 다수의 결론에 반발하고 나선 사람이 서희(徐熙). 계속 싸우자는 서희의 강경론에 성종이 거들고 나서자 사태는 묘하게 돌아간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자는 전략이 대체 어디 있을까? 사실 서희가 그런 무리한 주장을 편 데는 아마도 옛 신라계 세력이 고려 조정을 휘어잡고 있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원래 경기도 이천의 토착 호족이었다가 아버지 대부터 중앙 정치 무대에 데뷔한 신흥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운은 아직 고려의 편이다. 항복하겠다는 대답을 듣지 못한 소손녕은 급한 마음에 군대를 움직였다가 청천강 부근의 안융진(安戎鎭)에서 가로막혀 주춤하게 된다. 어차피 고려의 항복만 받아가면 될 뿐 정복하려는 의지는 없었으므로 그는 다시 고려 측에 대화를 요구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던가? 고려 측 협상 파트너는 당연히 주전론을 주장한 서희(徐熙)가 될 수밖에 없다.

 

거란군 진영에 마련된 협상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은 우선 기 싸움으로 시작한다. 소손녕이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하자 서희는 그러지 말고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하자고 맞섰다. 자랑거리는 못 되지만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모두 중국의 한족 왕조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힌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서희의 당당한 기세가 실은 허세임을 아는 소손녕의 첫 마디는 예리하기 그지없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면서도 왜 요나라 땅인 압록강 부근으로 진출하려 하는가?” 날카롭기는 하지만 대답하기 까다롭진 않은 질문이다. 고려는 실제로 신라를 계승했지만 명분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는 국호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의 후예다. 따라서 영토로 따지면 오히려 요나라 심장부인 랴오양도 우리 땅이 돼야 하는데, 무슨 소린가?” 여기까지는 서희도 명분에서 밀리지 않았으나 정작 본론은 그 다음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럼 고려는 왜 이웃인 요나라를 멀리하고 바다 건너에 있는 송나라를 받드는가?”

 

고려의 건국 이념에 내포된 모순을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한 뼈아픈 질문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정답을 말한다면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는 늘 중국의 한족 왕조에게 사대해왔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나 아무리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간 서희(徐熙)라 해도 그렇게까지 대답할 배짱은 없다. 그렇다면 거란과 고려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니까. 그래서 서희는 여진을 팔기로 마음먹는다. “요나라를 받들고 싶지만 간사한 여진의 도적들이 조공 길을 막고 있어 불가능하다.” 영리하지만 야비한 술책이 아닐 수 없다. 여진은 오히려 고려를 도우려는 세력이 아닌가? 어쨌든 효과는 만점이다. 무리해가면서 고려를 정복할 생각은 없는 소손녕과 어떻게든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려는 서희의 계산은 바로 그 지점에서 맞아떨어졌다. 양측은 여진을 공동의 적이자 희생양으로 삼는 데 동의한다. 고려는 조공로를 튼다는 구실로 여진의 거주지인 압록강 동쪽을 정복할 수 있고, 요나라는 고려의 복속을 받아낸 것은 물론 고려의 손을 빌려 은근한 골칫거리인 여진마저 제압할 수 있다. 이것으로 각본은 다 짜였다서희는 미리부터 요나라의 의도가 영토 확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고려와 송을 떼어놓으려는 요나라의 진의를 알고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협상에 나서면서 그는 처음부터 송과의 국교를 끊고 요의 연호를 사용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고려 조정에서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송을 배척하고 오랑캐인 요에게 사대하느니 차라리 땅을 떼어주는 게 훨씬 낫다는 판단에서 그걸 인정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토와 주권이 어느 것보다 중요한 오늘날의 국제관계에서라면 서희(徐熙)의 입장이 단연 옳겠지만 명분이 중요했던 시대에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으므로 서희의 입장을 일면적으로 평가할 순 없겠다.

 

약소국을 놓고 강대국들이 맺는 조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걸까? 당시 서희는 그로부터 밀레니엄이 지난 뒤인 1905년에 미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이 필리핀과 조선의 지배를 서로 묵인하기로 하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으면서 후손들이 나라를 잃게 되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쓰라와 태프트가 한반도와 필리핀의 운명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듯, 소손녕과 서희(徐熙)는 여진의 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조약은 이듬해부터 발효된다. 994년 고려는 요나라에 대한 복종의 증거로 통화(統和)라는 요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하면서 송나라와의 국교를 끊었고, 거란어를 배우기 위해 요나라에 유학생을 보냈으며, 압록강 하류 일대를 여진에게서 빼앗아 강동 6주를 설치했다. 고려의 국경이 압록강에 이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강대국 요에 사대하고 약한 여진을 괴롭힌 결과였으니 뒷맛이 개운친 않다. 더구나 거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중국 역대 한족 왕조의 전매특허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함) 수법을 멋지게 써먹은 결과일 뿐 아니라 고려의 복속을 받아냈으므로 고려가 개척한 영토 역시 형식적으로는 자기들의 땅이라고 여겼을 테니 당연히 불만은 없다.

 

 

분쟁 지역 11세기 초반 극동 3국의 쟁탈지는 중국 방면의 연운 16와 한반도의 강동 6주였다. 서희(徐熙)가 강동 6주를 설치한 것은 외교적 성과일 수도 있지만, 실은 거란의 수에 놀아난 측면도 있다. 거란은 고려가 설사 압록강 유역까지 차지한다 해도 거란을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으므로 오히려 고려가 말썽많은 여진을 정복해준 게 고마웠을 것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중국화 드라이브

외교로 넘긴 위기

전란에의 초대

동북아 국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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