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적 발전Ⅱ③
유학의 도입을 문화적 측면에서의 식민지적 발전이라 한다면, 이와 비슷한 발전은 역사 분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록 논리는 다르지만 역사에서도 몽골 지배에 반대하면서 자주적인 외피를 쓴 ‘발전’이 있었다. 무신정권기에 활동한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그 선구자이며, 몽골 지배기에 간행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와 이승휴(李承休, 1224 ~ 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는 마무리이자 완성에 해당한다.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아마 미완성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제목이 달라졌을것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라는 이규보의 개인 문집에 실린 이 영웅 서사시는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동명왕)의 탄생과 생애, 업적, 그리고 그의 아들 유리왕의 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아마 이규보는 내친 김에 시로써 고구려 역사 전체를 서술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미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나와 있었으나 이규보는 그 공식 역사서에서 생략된 고구려의 전사(前史)에 주목했다. 천제의 아들이자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를 과감히 역사적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후대에 자주적인 민족 의식이 표출된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좀 지나친 칭찬이라 하겠다.
이규보(李奎報)가 직접 밝힌 참고서는 『구삼국사(舊三國史)』라는 책인데,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이로 미루어보면 아마 이규보의 시대까지 고대 삼국에 관한 비공식 역사서들이 일부 전해졌던 듯하다. 이런 참고서들이 있는데 그는 왜 정식 역사서를 서술할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물론 그는 역사가가 아니라 문인이었고 역사서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역사가와 문인의 차이가 없었고 일찍이 최치원(崔致遠)도 그랬듯이 비공식 역사서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고 보면, 이규보는 사실 김부식(金富軾)의 유교적 사관에 도전하기는커녕 『삼국사기』를 보완한다는 의도를 지닌 데 불과했다.
이 점은 단군신화를 처음으로 다룬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옛 기록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헌적 가치는 대단히 크지만, 두 문헌 역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몽골 지배에 저항한 자주적 민족의식의 발로’라는 거창한 평가를 주기는 어렵다. 단군신화라면 독자적인 한반도 문명을 가리키는 것인데, 왜 자주적인 관점이라 할 수 없는 걸까? 앞서 단군신화가 한반도 토착 문명이 아님은 말한 바 있지만, 굳이 내용을 논하지 않더라도 단군신화를 언급한다고 해서 무조건 민족의식과 결부되는 것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유사(遺事)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내용을 보완한다는 의미로 저술된 책이며, 『제왕운기』 역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보잘것없는 문신 집안 출신의 지은이가 무신정권기에 실추된 왕권을 애써 끌어올리기 위해 지은 책에 불과하다. 바꿔 말하면 두 문헌 모두 『삼국사기』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려 한 게 아니라 그 사대주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이민족 지배의 설움을 달래려 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앞에서 말한 주자학의 취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한 가지 예로 『삼국유사』에서는 전권에 걸쳐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제왕운기』에서는 원 황실의 지지를 고려 왕실의 영광이라며 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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