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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국한시사, 성리학(性理學)의 수입과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 성리학의 수입과 문학관념(文學觀念)의 대두(對頭)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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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성리학(性理學)의 수입과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 성리학의 수입과 문학관념(文學觀念)의 대두(對頭)③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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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교관(敎官) 중에는 정몽주(鄭夢周)가 가장 성리학(性理學)으로 이름이 있었다. 정몽주(鄭夢周)가 성균관(成均館)에서 사서(四書)의 주자집주(朱子集注)를 강의할 때에 사람들의 의견 밖에 뛰어난 것이 있어 듣는 이들이 의심하였는데 호병문(胡炳文)이 지은 사서통(四書通)이 중국에서 나오자 정몽주(鄭夢周)의 의견과 부합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여러 선비들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가 리()를 논하는 것은 횡설(橫說)이나 수설(竪說)이라도 리()에 당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여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조()라 하였다고려사(高麗史)ㆍ열전(列傳)ㆍ정몽주(鄭夢周). 더구나 그에게는 기울어지는 고려의 왕실을 붙들려다가 이씨(李氏)에게 피살된 정충대절(精忠大節)이 있을 뿐 아니라 명()나라를 높이고 중화(中華)의 제도를 쓰자고 먼저 주장한 사람이므로 후세의 유학자(儒學者)들이 그를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보았다.

 

그는 저술이 거의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왕(禑王)ㆍ창왕(昌王)을 폐할 때 이성계(李成桂)에게 협력하였다고 의심한 이(鄭逑李植 )도 있었으나 의연히 이학(理學)의 조()로서 추숭을 받았다. 그는 중용(中庸)대학(大學)을 외워 궁리치지(窮理致知), 반궁천실(反躬踐實)하여 혼자 염락부전(廉洛不傳)의 비법을 얻었다는가(成傳林, 圃隱行狀). 염락(濂洛)의 도()를 부르짖고 불로(佛老)의 틈을 배척하며 강론(講論)이 정묘(精妙)하며고려사(高麗史)ㆍ열전(列傳)ㆍ정몽주(鄭夢周)주자(朱子)를 종()으로 삼아 후학으로 하여금 주경입본(主敬立本), 궁리치지(窮理致知)를 알게 했다송시열(宋時烈)신도비명(神道碑銘)는 후대의 평가가 이를 사실로써 입증해준다.

 

그러므로 고려말의 신유학(新儒學)은 안향(安珦)으로부터 비롯하여 백이정(白頤正)ㆍ우탁(禹倬)ㆍ권부(權溥) 등이 배출되고, 백이정(白頤正)()은 그를 정점으로 하여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 등을 거쳐 문벌관료층으로 이어지지만 한편 정몽주(鄭夢周)를 대종(大宗)으로 하는 절의파(節義派)성리학(性理學)길재(吉再)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정여창(鄭汝昌)ㆍ김굉필(金宏弼)을 거쳐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는 연원(淵源) 계보(系譜)가 작성되고 있다.

 

고려말 이전까지만 해도 문학을 논하는 데 있어 사상과 같은 것이 표준이 된 일은 없다. 그러나 고려말에 주자학(朱子學)이 수입됨에 따라 문학의 본질이 문학의 내질에서 변별되지 못하고 오히려 문학외적인 사상적 표준에 의하여 논의되는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문학관념이 성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후, 문학을 한갓 도()의 표현수단으로 생각하는 문이관도(文以貫道)’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전통적인 문학관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어 왔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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