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국한시사, 성리학(性理學)의 수입과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 성리학의 수입과 문학관념(文學觀念)의 대두(對頭)② 본문

카테고리 없음

한국한시사, 성리학(性理學)의 수입과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 성리학의 수입과 문학관념(文學觀念)의 대두(對頭)②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15:31
728x90
반응형

이로써 보면 백이정(白頤正)ㆍ우탁(禹倬)ㆍ권부(權溥) 등은 송유(宋儒)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한 선구자이며 안향(安珦)보다는 후배지만 안향(安珦)의 생전에 서로 만나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정주학(程朱學)은 수인(數人)의 유자(儒子)에게 처음으로 전수되었을 뿐 이때까지도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당시의 사정을 가장 적절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이제현(李齊賢), 역옹패설(櫟翁稗說)전집(前集)에 나타난 다음 문답에서 볼 수 있다.

 

 

덕릉(德陵, 忠宣王)이 제현(齊賢)에게 묻기를 우리나라가 옛적에는 문물이 중화(中華)와 비등하다고 칭하였는데 지금 학도(學徒)들이 중[]을 따라 글을 배우니 시문(詩文)이나 짓는 무리가 많고 경()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가 아주 적은 것이 당연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위와 같이 물었을 때 이제현(李齊賢)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옛적에 태조(太祖)가 초창기에 있어서도 먼저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였고 한번 서경(西京)에 행행(行幸)하여 드디어 수재(秀才) 정악(廷鶚)으로써 박사(博士)를 삼아서 육부(六部)의 생도(生徒)를 교수(敎授)하게 하여 채백(綵帛)을 주어서 권장하고 곡식을 내려서 먹게 하였으니 간절히 마음을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묘(光廟, 光宗)의 뒤에 더욱 문교(文敎)를 닦아서 안으로는 국학(國學)을 높이고 밖으로는 향교(鄕校)를 벌여 세우고 촌락에 학당(學堂)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서로 들리어 사유(師儒)와 제자가 훈도(薰陶)되어 따라서 일어나니 문물이 중화(中華)와 비등하다는 말이 과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불행히 의종(懿宗)의 말년에 무인(武人)의 변이 일어나서 옥과 돌이 함께 탔[]으므로 겨우 몸을 빼쳐 살아난 자는 깊은 산중에 도망하여 중의 의복을 입고 여년(餘年)을 마치었으니 신준(神俊)ㆍ오생(悟生)의 무리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뒤에 국가에서 점차 문치(文治)를 회복하매 사자(士子)들이 비록 공부하기를 원하는 뜻이 있으나 배울 곳이 없으므로 멀리 산중에 숨어 중의 의복을 입은 이들을 찾아가서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신준(神俊)이 그에게 배운 사람이 과거 보러 가는 데에 전송하면서 지은 시에 信陵公子統精兵 遠赴邯鄲立大名 天下英雄皆法從 可憐揮淚老侯嬴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학도(學徒)들이 중들에게 가서 글을 배우는 것은 그 근원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지금 전하께서 진실로 학교를 넓히고 교육에 힘쓰시어 문예(文藝)를 높이고 오륜(五倫)을 밝혀서 선왕(先王)의 도를 천명하신다면 어느 누가 참다운 유학자(儒學者)를 버리고 중들을 따르며 실학을 버리고 장구(章句)나 익히겠습니까? 이제까지 시문(詩文)이나 힘쓰던 무리들이 모두 장차 경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가 될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학문 풍토를 단적으로 적시(摘示)한 것이기도 하지만 장래(將來)할 여조유학(麗朝儒學)의 일대변혁을 예료적(豫料的)으로 진술할 발언이 될 수도 있다.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겪은 후에 학교(學校)가 폐이(廢弛)하게 되자 공민왕(恭愍王)은 숭문관(崇文館) 옛 터에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여 흥학(興學)의 의지를 보인다. 이때 이색(李穡)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은 교관(敎官)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르치고 강론(講論)한 것은 정자(程子)역전(易傳)과 주자(朱子)사서집주(四書集注)였다.

 

이색(李穡)은 학문이 순수하지 못하여 불법(佛法)을 믿어서 사람들의 비평을 받았다고 고려사(高麗史)는 기술하고 있지만 그가 성균관(成均館)에서 정주학(程朱學)만을 강설(講說)하였을 것은 틀림이 없다. 이것은 그가 정몽주(鄭夢周)를 칭찬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으며 더욱이 그의 문인(文人)인 박상충(朴尙衷)ㆍ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모두 그에게서 유학(儒學)을 배웠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