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리학(性理學)의 수입과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1. 성리학의 수입과 문학관념(文學觀念)의 대두(對頭)
고려는 국초부터 유교치국(儒敎治國)을 표방하였지마는 충렬왕(忠烈王) 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유학(基本儒學),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학유교(文學儒敎)로 일관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일찍이, 당시의 유사(儒士)들이 과거(科擧)의 문장(文章)만 익히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한 자가 없는 것을 개탄하여, 일경일사(一經一史)에 통한 사람을 국자감(國子監)에 교수(敎授)케 하라고 한 사실을 보면 이때까지도 국자감(國子監)에 경사(經史)에 통한 교수(敎授)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충렬왕(忠烈王) 30년에 안향(安珦)이 양현고(養賢庫)가 탄갈(彈渴)하여 선비를 기를 수 없는 것을 걱정하여, 육품(六品) 이상의 관직에 있는 자는 은(銀) 일근(一斤)을 내고 칠품(七品) 이하는 각각 포(布)를 내어 보조하자고 제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학교(學校)가 얼마나 쇠퇴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다음과 같은 시에 선명하게 보인다【이 시는 중국사신(中國使臣) 장모(張某)의 작(作)이라고도 한다】.
香燈處處皆祈佛 | 향등(香燈) 켠 곳곳마다 불공 드리고 |
簫鼓家家競賽神 | 퉁소 불고 북치는 집에 치성 드리느라 법석이네. |
獨有數間夫子廟 | 호올로 두어칸 공부자묘(孔夫子廟)가 있건마는 |
滿庭秋草寂無人 | 왼 뜰에 가을풀 뿐 사람이 없네. |
안향(安珦)은 만년(晚年)에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걸어두고 군모(軍慕)하는 뜻을 표하고, 호(號)도 주자(朱子)의 호(號) 회암(晦庵)을 본떠 회헌(晦軒)이라 하였다. 주자(朱子)가 죽은 뒤 불과 40년에 안향(安珦)이 났으므로 시대의 거리도 멀지 않았지만, 그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주자(朱子)를 숭모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충렬왕(忠烈王) 15년(1289)에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가서 그곳에 머무는 동안 주자서(朱子書)를 초(抄)하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진상(眞象)을 그려가지고 돌아왔으며,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두번째 원(元)나라에 갔을 때에는 그곳에서 문묘(文廟)를 배알(拜謁)하고 성리설(性理說)을 변론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충선왕(忠宣王) 때까지는 정주(程朱)의 학(學)이 중국에서 처음 행하여졌으므로 동방(東方)에는 아직 미치지 아니하였다. 백이정(白頤正)이 원(元)나라에 있으면서 이를 배워 돌아오게 되자 이제현(李齊賢)ㆍ박충좌(朴忠佐)가 가장 먼저 배우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우탁전(禹倬傳)」에 의하면, 탁(倬)이 경사(經史)에 통하고 더욱 역학(易學)에 깊었다고 한다.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이 처음으로 동방에 들어 왔을 때 이에 대하여 아는 이가 없었는데, 탁(倬)이 문을 닫고 연구하여 월여(月餘)만에 해득하여 생도(生徒)에게 교수(敎授)함으로써 이학(理學)이 비로소 행하여졌다고 적고 있다. 정씨(程氏)의 역전(易傳)은 송유이학(宋儒理學)의 정수(精髓)다. 때문에 역전(易傳)은 역학(易學)을 동방에 전하였다는 뜻으로 탁(倬)의 별호(別號)가 된 것이다.
또 「권부전(權溥傳)」에 따르면 권부(權溥)는 독서하기를 즐겨하여 늙도록 이를 폐하지 않았으며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조정(朝廷)에 건의하여 간행하였으므로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은 부(溥)에게서 창시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 역대(歷代)의 효자 64인의 사적을 모아서 그의 사위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찬(贊)을 짓게 하고 이를 효행록(孝行錄)이라 이름하여 세상에 행하게 하였다. 권근(權近)은 그의 현손(玄孫)이다.
이로써 보면 백이정(白頤正)ㆍ우탁(禹倬)ㆍ권부(權溥) 등은 송유(宋儒)의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한 선구자이며 안향(安珦)보다는 후배지만 안향(安珦)의 생전에 서로 만나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정주학(程朱學)은 수인(數人)의 유자(儒子)에게 처음으로 전수되었을 뿐 이때까지도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당시의 사정을 가장 적절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이제현(李齊賢), 『역옹패설(櫟翁稗說)』 전집(前集)에 나타난 다음 문답에서 볼 수 있다.
덕릉(德陵, 忠宣王)이 제현(齊賢)에게 묻기를 우리나라가 옛적에는 문물이 중화(中華)와 비등하다고 칭하였는데 지금 학도(學徒)들이 중[僧]을 따라 글을 배우니 시문(詩文)이나 짓는 무리가 많고 경(經)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가 아주 적은 것이 당연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위와 같이 물었을 때 이제현(李齊賢)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옛적에 태조(太祖)가 초창기에 있어서도 먼저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였고 한번 서경(西京)에 행행(行幸)하여 드디어 수재(秀才) 정악(廷鶚)으로써 박사(博士)를 삼아서 육부(六部)의 생도(生徒)를 교수(敎授)하게 하여 채백(綵帛)을 주어서 권장하고 곡식을 내려서 먹게 하였으니 간절히 마음을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묘(光廟, 光宗)의 뒤에 더욱 문교(文敎)를 닦아서 안으로는 국학(國學)을 높이고 밖으로는 향교(鄕校)를 벌여 세우고 촌락에 학당(學堂)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서로 들리어 사유(師儒)와 제자가 훈도(薰陶)되어 따라서 일어나니 문물이 중화(中華)와 비등하다는 말이 과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불행히 의종(懿宗)의 말년에 무인(武人)의 변이 일어나서 옥과 돌이 함께 탔[焚]으므로 겨우 몸을 빼쳐 살아난 자는 깊은 산중에 도망하여 중의 의복을 입고 여년(餘年)을 마치었으니 신준(神俊)ㆍ오생(悟生)의 무리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뒤에 국가에서 점차 문치(文治)를 회복하매 사자(士子)들이 비록 공부하기를 원하는 뜻이 있으나 배울 곳이 없으므로 멀리 산중에 숨어 중의 의복을 입은 이들을 찾아가서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신준(神俊)이 그에게 배운 사람이 과거 보러 가는 데에 전송하면서 지은 시에 “信陵公子統精兵 遠赴邯鄲立大名 天下英雄皆法從 可憐揮淚老侯嬴”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은 학도(學徒)들이 중들에게 가서 글을 배우는 것은 그 근원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지금 전하께서 진실로 학교를 넓히고 교육에 힘쓰시어 문예(文藝)를 높이고 오륜(五倫)을 밝혀서 선왕(先王)의 도를 천명하신다면 어느 누가 참다운 유학자(儒學者)를 버리고 중들을 따르며 실학을 버리고 장구(章句)나 익히겠습니까? 이제까지 시문(詩文)이나 힘쓰던 무리들이 모두 장차 경에 밝고 행실이 닦인 선비가 될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학문 풍토를 단적으로 적시(摘示)한 것이기도 하지만 장래(將來)할 여조유학(麗朝儒學)의 일대변혁을 예료적(豫料的)으로 진술할 발언이 될 수도 있다.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겪은 후에 학교(學校)가 폐이(廢弛)하게 되자 공민왕(恭愍王)은 숭문관(崇文館) 옛 터에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여 흥학(興學)의 의지를 보인다. 이때 이색(李穡)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김구용(金九容)ㆍ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등은 교관(敎官)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르치고 강론(講論)한 것은 정자(程子)의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였다.
이색(李穡)은 학문이 순수하지 못하여 불법(佛法)을 믿어서 사람들의 비평을 받았다고 『고려사(高麗史)』는 기술하고 있지만 그가 성균관(成均館)에서 정주학(程朱學)만을 강설(講說)하였을 것은 틀림이 없다. 이것은 그가 정몽주(鄭夢周)를 칭찬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으며 더욱이 그의 문인(文人)인 박상충(朴尙衷)ㆍ김구용(金九容)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이 모두 그에게서 유학(儒學)을 배웠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당시의 교관(敎官) 중에는 정몽주(鄭夢周)가 가장 성리학(性理學)으로 이름이 있었다. 정몽주(鄭夢周)가 성균관(成均館)에서 사서(四書)의 주자집주(朱子集注)를 강의할 때에 사람들의 의견 밖에 뛰어난 것이 있어 듣는 이들이 의심하였는데 호병문(胡炳文)이 지은 『사서통(四書通)』이 중국에서 나오자 정몽주(鄭夢周)의 의견과 부합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여러 선비들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색(李穡)은 정몽주(鄭夢周)가 리(理)를 논하는 것은 횡설(橫說)이나 수설(竪說)이라도 리(理)에 당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여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조(祖)라 하였다【『고려사(高麗史)ㆍ열전(列傳)ㆍ정몽주(鄭夢周)』】. 더구나 그에게는 기울어지는 고려의 왕실을 붙들려다가 이씨(李氏)에게 피살된 정충대절(精忠大節)이 있을 뿐 아니라 명(明)나라를 높이고 중화(中華)의 제도를 쓰자고 먼저 주장한 사람이므로 후세의 유학자(儒學者)들이 그를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보았다.
그는 저술이 거의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왕(禑王)ㆍ창왕(昌王)을 폐할 때 이성계(李成桂)에게 협력하였다고 의심한 이(鄭逑ㆍ李植 등)도 있었으나 의연히 이학(理學)의 조(祖)로서 추숭을 받았다. 그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외워 궁리치지(窮理致知), 반궁천실(反躬踐實)하여 혼자 염락부전(廉洛不傳)의 비법을 얻었다든가(成傳林, 「圃隱行狀」). 염락(濂洛)의 도(道)를 부르짖고 불로(佛老)의 틈을 배척하며 강론(講論)이 정묘(精妙)하며【『고려사(高麗史)ㆍ열전(列傳)ㆍ정몽주(鄭夢周)』】 주자(朱子)를 종(宗)으로 삼아 후학으로 하여금 주경입본(主敬立本), 궁리치지(窮理致知)를 알게 했다【송시열(宋時烈)의 「신도비명(神道碑銘)」】는 후대의 평가가 이를 사실로써 입증해준다.
그러므로 고려말의 신유학(新儒學)은 안향(安珦)으로부터 비롯하여 백이정(白頤正)ㆍ우탁(禹倬)ㆍ권부(權溥) 등이 배출되고, 백이정(白頤正)의 (學)은 그를 정점으로 하여 이제현(李齊賢)ㆍ이색(李穡)ㆍ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 등을 거쳐 문벌관료층으로 이어지지만 한편 정몽주(鄭夢周)를 대종(大宗)으로 하는 절의파(節義派)의 성리학(性理學)은 길재(吉再)ㆍ김숙자(金叔滋)ㆍ김종직(金宗直)ㆍ정여창(鄭汝昌)ㆍ김굉필(金宏弼)을 거쳐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는 연원(淵源) 계보(系譜)가 작성되고 있다.
고려말 이전까지만 해도 문학을 논하는 데 있어 사상과 같은 것이 표준이 된 일은 없다. 그러나 고려말에 주자학(朱子學)이 수입됨에 따라 문학의 본질이 문학의 내질에서 변별되지 못하고 오히려 문학외적인 사상적 표준에 의하여 논의되는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문학관념이 성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후, 문학을 한갓 도(道)의 표현수단으로 생각하는 ‘문이관도(文以貫道)’나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전통적인 문학관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어 왔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이룩한 이 방면의 연구성과도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대부분이 문학의 내질에 관한 문제, 특히 시론(詩論)과 같은 것에 편중함으로써 사실상 문학이론 위에 군림하여 문학이론 자체를 규제해 온 문학관의 구실에 대하여 해명하는 과정을 구하는 노력도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관념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학(文學)’의 자의와 그 내용의 함의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덕행엔 안연과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이요, 언어엔 재아와 자공이요, 정치엔 염유와 계로요, 문학엔 자유와 자하가 있다.
德行: 顔淵ㆍ閔子騫ㆍ冉伯牛ㆍ仲弓. 言語: 宰我ㆍ子貢. 政事: 冉有ㆍ季路. 文學: 子游ㆍ子夏
이른바 십철(十哲)을 그 소장(所長)에 따라 사과(四科)로 나눈 가운데서 문학(文學)엔 자유(子游)ㆍ자하(子夏)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문학이라고 한 것은 물론 문학비평의 대상으로서의 순문학(純文學) 그것이 아니고 문장(文章)과 박학(博學)의 이의(二義)를 겸유(兼有)하고 있는 광막무은(廣漠無垠)한 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 일체의 서적(書籍)과 일체의 학문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진(周秦)시대에 있어서의 문학의 개념에 대해서는 청말(淸末)의 학자인 증국번(曾國審)이 유학(儒學) 사상을 분류, 개관한 가운데서도 나타나 있다. 증국번(曾國審)은 위학지술(爲學之術)의 기원을 공문사과(孔門四科)에 두고, 유학(儒學)사상을 다음과 같이 사개부문(四個部門)으로 분류한 바 있다.
① 의리(義理) | ② 고거(考據) |
공문(孔門) ‘덕행德行)’의 과(科) | 공문(孔門)의 ‘문학(文學)’의 과(科) |
오늘날의 송학(宋學) | 오늘날의 한학(漢學) |
주돈이(周敦頤)ㆍ이정(二程) 형제ㆍ장재(張載)ㆍ주희(朱熹) 등 | 허신(許愼)ㆍ정현(鄭玄)ㆍ고염무(顧炎武)ㆍ요내(姚鼐) 등 |
③ 사장(詞章) | ④ 경제(經濟) |
공문(孔門)의 ‘언어(言語)’의 과(科) | 공문(孔門)의 ‘덕행(德行)’으로 정사(政事)를 겸한 것 |
종고(從古)의 예문(藝文)과 금세(今世)의 제(制)ㆍ의(義)ㆍ시(詩)ㆍ부(賦) | 전대(前代)의 전례(典禮)ㆍ정서(政書)와 당세(當世)의 장고(掌故) |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ㆍ구양수(歐陽修)ㆍ曾聲ㆍ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소식(蘇軾)ㆍ黃庭堅 등 | 제갈량(諸葛亮)ㆍ육지(陸贄)ㆍ범중엄(范仲淹)ㆍ사마광(司馬光) 등 |
여기서는 공문(孔門)에서 이르는 문학은 고거지학(考據之學) 또는 경학(經學)에 가까운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공자(孔子)의 문학관의 일단을 살펴보았거니와 여기서 다시 한번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공자(孔子)가 문(文)을 숭상한 것은 도처에 유로(流露)되고 있는 사실이지마는 공자(孔子)에 있어서의 ‘문(文)’은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경향에 다분히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자공이 “공문자는 어째서 문(文)이라 일컬어지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니, 공자께서 “민첩하고 배우길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文)이라 일컬어졌다.”라고 말씀하셨다.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공문(孔門)에서의 문학은 비록 도(道)를 소외하고 문(文)을 말한 것이지만 그러나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의 학(學)이 모두 인륜(人倫)을 밝힌 것이므로 고인(古人)의 이른바 문학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겠다는 것이다. 공문(孔門)의 문학은 곧 삼대(三代)의 학(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어서 이 또한 다분히 학술적인 의의로 파악한 것이며 부화(浮華)한 수식만을 일삼던 한 대(漢代) 이후의 문(文)과 스스로 구별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의 문학은 지(知)와 행(行)을 겸하고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공문(孔門)의 문학관에서 가장 중요한 두 방면으로 지적되고 있는 상문(尙文)ㆍ상용(尙用)의 양면성과도 부합되는 소론(所論)인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주진(周秦)시대에 있어서의 이른바 문학은 문장(文章)과 박학(博學)의 이의(二義)를 동시에 겸유하고 있어 문(文) 곧 학(學)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의 개념이며 최초의 문학관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양한(兩漢)시대에 이르면 문(文)과 學을 분별하여 부르게 되었고 이에 따라 문학과 문장(文章)을 또한 분별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대(漢代) 있어서의 문학은 다만 학술적인 의의만 함유하게 되었고 문(文) 또는 문장(文章)은 오직 사장(詞章)만을 지론하는 것이 되었는 바 이에 이르러 근대인이 일컫는 문학의 의의와 가까워진 것이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 나오는 ‘문학(文學)’은 대개 학술을 지칭하는 것이며, 이에 반하여 미이동인(美而動人)하는 문사(文辭)를 다른 문건(文件)과 구별해서 문(文) 또는 문장(文章)이라 했던 것이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 있어서는 문학이 이때에 와서 비로소 학술과 획연히 구별이 되어 스스로 그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문학과 그 의의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문학비평의 전문적인 작업이 비롯된 것도 물론 이때의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육조(六朝)의 문학은 그 문사(文辭)의 성격에 따라 문(文)과 필(筆)로 나누기도 하는 바 이에 따르면 문(文)은 주로 정(情)이나 미감(美感)을 중시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순수문학(純粹文學)이라 하고 필(筆)은 그 중히 하는 것이 지(知)와 응용(應用)에 있다 하여 이를 잡문학(雜文學)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수당(隋唐)ㆍ북송(北宋)에 이르면 다시 복고(復古)의 풍이 일어나게 된다. 수당(隨唐)ㆍ오대(五代)의 창작계가 음미(淫靡)ㆍ부람(浮濫)으로만 흐르게 됨에 따라 이때에 육조(六朝)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내질(內質)에서 변별하려 함으로써 문학을 논하는 표준으로서의 문학관을 학(學)의 바깥에서 구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대(唐代)에 있어서는 문학을 논하는 표준을 이미 성현(聖賢)의 저작에서 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성현(聖賢)의 저작을 통해서 도(道)를 밝히려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문(文)에 치우친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당인(唐人)은 ‘문이관도(文以貫道)’를 말하고 ‘문이재도(文以載道)’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관도(貫道)라고 하면 이는 이미 문(文)을 인하여 도(道)를 보는 것이 되므로 도(道)는 반드시 문(文)에 의빙해야만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文)과 도(道)의 경중(輕重)이 나타나게 되며 결과적으로 문(文)과 도(道)는 이개물(二個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한(李漢)이 「한창려집서(韓昌黎集序)」에서 ‘문자관도지기(文者貫道之器)’라 한 것이 이를 뒷받침해 주는 단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송대(宋代)에 있어서는 한 걸음 나아가 성현(聖賢)의 사상이 문(文)을 논하는 표준이 됨으로써 문학은 한갖 도학(道學)의 부용(附庸)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주돈이(周敦頤)가 통서(通書)에서 밝힌 ‘문소이재도야(文所以載道也)’가 그 대표적인 발언이 될 것이다. 재도(載道)에 있어서의 문(文)은 도(道)를 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고려말 충렬왕대(忠烈王代)에 송대(宋代)의 유학(儒學)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당(唐)ㆍ송(宋) 이래의 ‘문이관도(文以貫道)’나 ‘문이재도(文以載道)’가 문학이론의 지배원리로 군림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미구(未久)에 나타날 조짐을 보인다.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충선왕(忠宣王)과 이제현(李齊賢)의 문답내용은 아직도 성리학(性理學)의 보급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기에 있었던 것이므로 흥학(興學)과 교화(敎化)를 앞세운 것이며 사장(詞章)을 배격하는 효용론(效用論)은 후차적(後次的)인 것이 되고 있다. 때문에 이제현(李齊賢)은 시를 관풍(觀風)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전래의 민요(民謠)를 악부(樂府)형식으로 옮기고 있으며 이곡(李穀)이 ‘본국(本國)의 문풍(文風)이 부진한 것은 공리(功利)를 급무로 삼고 교화(敎化)를 여사(餘事)로 삼기 때문이다【이색(李穡), 『가정집(家亭集)』5, 「영해부신작소학기(寧海府新作小學記)」】’라고 한 것도 동궤(同軌)의 현상이다. 이곡(李穀)에 이르러, ‘載道之器 皆謂經 釋氏所說 誠難思【이색(李穡), 「順菴新置大藏李克禮州判作詩以讚次其韻」】’라하여 경술(經術)이 재도(載道)의 수단임을 강조한 초기의 발언이 되고 있지만, 이는 불교를 배척하기 위하여 제시한 입론(立論)에 지나지 않으며 문학의 기능에 대하여 직접 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색(李穡)에 이르러서는 직접 시도(詩道)를 논하여 효용적인 문학관을 개진하고 있며 시의 효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시도(詩道)가 관계하는 것이 막중하여 왕화(王化)와 인심(人心)이 이에서 나타난다. 세교(世敎)가 쇠하자 시(詩)가 변하여 소(騷)가 되었으며, 한(漢)나라 이래로 5언(言)과 7언(言)이 시작되면서부터 시의 변화가 극도에 달했다. 비록 고시(古詩)와 율시(律詩)가 아울러 나타나고 공교(工巧)하고 치졸한 것이 계통이 다르긴 하지만 또한 각각 그 성정(性情)을 도야하여 그 취지(趣旨)에 적용하였으니 그 사기(詞氣)에서 따져보면, 세도(世道)의 오르내림이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
詩道所係重矣, 王化人心於是著焉. 世敎衰, 詩變而爲騷, 漢以來五七言作, 而詩之變也極矣. 雖其古律並陳, 工拙異貫, 亦各陶其性情, 而適其適, 就其詞氣而觀之, 則世道之升降也. 如指諸掌.- 이색(李穡), 「中順堂集序」(『牧隱文』9),
물론 여기서 제시한 ‘성정(性情)’은 시의 소발처(所發處)를 천명한 상투어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다음 글들은 이색(李穡) 자신의 문학관을 선명하게 보여준 부분이다.
문장(文章)은 외도(外道)다. 그러나 마음에 뿌리를 박으므로 마음의 발로(發露)는 시대와 관계가 있다. 때문에 시를 외우는 자는 풍아(風雅)의 정(正)과 변(變)에 느낌이 있지 않을 수 없다. 말세(末世)의 장구(章句)는 날로 아래로 쳐져 정음(正音)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文章外也. 然根於心, 心之發關於時, 是以誦詩者, 不能不有感於風雅之正變焉. 叔世章句, 日趍于下, 無愧乎正音之不復作也. -이색(李穡), 「栗亭先生逸藁序」(牧隱文』 8),
도(道)가 문(文)의 근본이며 문(文)은 도(道)의 지엽(枝葉)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는 이숭인(李崇仁)의 『도은집발(陶隱集跋)』에서 시를 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은(陶隱)의 시어(詩語)는 이미 쇄락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으며 그 취향(趣向)이 오직 이에 있으므로 넉넉히 사람의 성정(性情)의 정(正)을 감동시켜 ‘무사(無邪)’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陶隱詩語旣灑落無一點塵, 而其趨惟在於此, 足以感人情性之正, 而歸於無邪矣.
이숭인(李崇仁)의 시가 성정(性情)의 표에서 나와 사무사(思無邪)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칭도(稱道)하고 있다.
이색(李穡)의 이러한 효용적인 도학문학관(道學文學觀)은 그의 시작(詩作)에서도 도처에 유로(流露)되고 있다.
坐對東風一笑新 | 앉아서 동풍을 대하게 되어 또 한번 웃어보네. |
乾坤容此老衰身 | 천지가 이 늙은 몸 용납해 주었으니까. |
文章小技漸趨俗 | 문장(文章)은 소기(小技)인데 점점 시속(時俗)이 되어 |
箕斗虛名眞累人 | 기성(箕星)ㆍ두성(斗星) 헛된 이름 사람을 얽어매네. |
流水浮雲沒蹤迹 | 흐르는 물 뜬 구름은 종적이 없는데 |
落花啼鳥有精神 | 떨어지는 꽃 우는 새는 정신이 있네. |
餘生更感君恩重 | 여생(餘生)에 또다시 임금의 은혜 느끼게 되니 |
江上田廬不患貧 | 강 위에 오두막집 가난 걱정 아니하네. |
그는 「유감(有感)」이란 시에서, 문장(文章)의 기능이 소기(小技)에 지나지 않는 사실 상태를 확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장(文章)이 속상(俗尙)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색(李穡)의 「독시(讀詩)」에서도 그는 시경시(詩經詩)의 효용적인 ‘사무사(思無邪)’를 재확인하고 있다.
豳自風爲雅 王由雅列風 | 관풍(關風)은 풍(風)으로부터 아(雅)가 되었고 왕풍(王風)은 아(雅)로 말미암아 풍(風)의 열(列)에 끼었네. |
人心自今古 世道有汙隆 | 인심(人心)은 고금(古今)이 있고 세도(世道)는 승침(昇沈)이 있네. |
草木皆蒙化 鳶魚亦降衷 | 초목(草木)들도 교화(敎化)를 입고 연어(鳶魚)도 본성(本性)을 받았네. |
思無邪一句 誰識素王功 | 사무사(思無邪) 일구(一句)를 누가 공자(孔子)의 공(功)인 줄 알리오? |
시경시(詩經詩)의 정신을 한마디로 ‘사무사(思無邪)’로 단정하여 효용성을 강조한 공자(孔子)도 ‘말이란 뜻이 통하면 그만이다[辭達而已]’라 하여 그의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표현론을 개진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보이기까지 한다.
정몽주(鄭夢周)는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로서 후대인의 추앙을 받아왔지만 유전(遺傳)하는 저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정몽주(鄭夢周) 자신이 직접 개진한 문학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다음과 같은 그의 자작시(自作詩)인 「교수현별서교유선(膠水縣別徐敎諭宣)」를 통하여 경술(經術)을 존숭하는 학문의 세계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萬邦同軌日 聖主右文時 | 만방(萬邦)이 질서대로 돌아가는 날이요 성주(聖主)가 글을 숭상하는 때라. |
邂逅逢佳士 懽忻似舊知 | 뜻밖에 가인(佳人)을 만나 이렇게 기쁜 것은 옛부터 알기 때문이라. |
風儀傾後輩 經術卽吾師 | 풍의(風儀)는 후배를 경도시키고 경술(經術)은 바로 내 스승이네. |
遠大宜相勉 何須惜別離 | 멀고 크게 서로 힘써야 할 것이니 어찌 모름지기 이별을 안타까와 하리오? |
이 시의 주지는 일상적인 해후(邂逅)를 읊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의리정도(義理精倒)한 포은(圃隱)의 진면목이 약여(若如)하다.
그러나 후인(後人)의 글에 비친 정몽주(鄭夢周)의 효용적인 문학관은 당시의 삼은(三隱: 牧隱ㆍ圃隱ㆍ陶隱) 가운데서도 가장 짙은 농도를 보여준다. 정몽주(鄭夢周)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전(道傳)이 16ㆍ7세 때 성율(聲律)을 익혀 대우(對偶)를 맞추고 있는데, 하루는 려강민자복(驪江閔子復)이 도전(道傳)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달가(鄭達可)선생을 만났더니 하는 말이, ‘사장(詞章)은 말예(末藝)일 뿐이다. 이른바 수기(修己) 정심(正心)의 학(學)이 있는데 그 설(說)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두 책에 갖추어져 있다.’ 하고, 지금 이순경(李順卿)과 더불어 이 두 책을 가지고 삼각산(三角山) 절에 가서 강구(講究)하고 있는데 그대는 이 사실을 아는가?” 하므로 나는 이 말을 듣고 두 책을 구하여 읽었다. 비록 얻은 것은 없으나 자못 기뻤다.
道傳十六七, 習聲律爲對偶語, 一日, 驪江閔子復, 謂道傳曰: “吾見鄭先生達可, 曰: ‘詞章末藝耳. 有所謂身心之學, 其說具大學中庸二書.’ 今與李順卿携二書, 往于三角山僧舍講究之, 子知之乎?” 予旣聞之, 求二書以讀, 雖未有得, 頗自喜. - 정도전(鄭道傳), 「圃隱奉使藁序(三峯集』 권3),
여기서 그가 사장(詞章)을 말예(末藝)라고 한 것은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삼는 도학문학관(道學文學觀)의 간접 표현이며 앞에서 보인 이색(李穡)의 ‘문장외야(文章外也)’ 보다도 그 강도를 높인 것이다.
이숭인(李崇仁) 역시 시도(詩道)를 성정(性情)에서 구하여 시는 여사(餘事)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제김가행시고후(題金可行詩藁後)」란 글에서 그것을 보여준다.
시도(詩道)의 변한 것이 지극하여 논자(論者)들은 왕왕 성정(情性)에 근본을 두지 않고 오직 한 귀절 한 글자의 공졸(工拙)만을 추구하니 내가 이를 병통(病痛)으로 여긴지 오래다…… 일찍이 시가 발(發)하는 것이 정성(情性)에 근본을 두지 않는다고 하였느냐. 가행(可行)이 내 문하(門下)에 출입한 지 10년인데 진실로 그 사람됨을 좋아하며 시는 그 밖의 일이다. 그런데 이와 같으니 마음 속에 쌓이면 밖에 나타난다는 것이 사실이구나.
詩道之變極, 而論者往往不本於情性, 惟一句一字之工拙是求, 余之病此久矣. …… 曾謂詩之發不本於情性乎? 可行游予門十年于玆, 固藥其爲人, 詩廼餘事也. 而又如此, 積於中形諸外, 信哉!
그러나 이숭인(李崇仁)의 구체적인 시작(詩作)에서는 효용적인 문학관의 투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선미(禪味)를 느끼게 하는 허다한 작품들이 도처에 산견(散見)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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